며칠전 세상을 떠난 고 신상옥 감독에 관한 추모의 글들을 읽어보다가 몇년 전 <필름2.0>의 특집기사(2003. 05. 07)를 찾게 됐다. 김영진 편집위원의 글인데, '20세기 최고의 영화감독 7인'이 타이틀이다(오해가 있을까봐 페이퍼의 제목에는 '한국'을 더 집어넣었다). 아마도 설문조사에 토대하여 작성된 듯한데, 이 참에 잠시 한국영화 '거장들'의 면면을 확인/기억해 두도록 한다. 기사에서 거명되고 있는 그 7인의 감독은 임권택, 김기영, 유현목, 홍상수, 신상옥, 이창동, 이만희이다(이창동과 이만희는 공동 6위이다). 기사에 포함돼 있는 '응답자 코멘트'는 생략한다(대신에 간간이 '나의 코멘트'는 덧붙이겠다).  

 

 

 

 

-여기 모인 7인의 감독들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들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 남다른 작가 의식으로 역사에 기록될 이들에게 작가의 만신전을 바친다.

1위 임권택 뒤통수의 미학을 보여주는 감독

-임권택은 1980년대 후반 어느 인터뷰에서 "뒤통수를 찍어도 그 인물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내 영화의 목표“라고 말했다. 임권택의 영화는 무심하게 보면 흘려 지나치기 쉬운, 그 무수한 뒤통수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겉으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형식 속에서 인물의 감정과 세상의 공간적 기운을 꾹꾹 눌러 담는 자기만의 세계로 오랜 충무로 경력 끝에 도달한 미학을 펼쳐보이고 있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후 <춘향뎐> <취화선>의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임권택의 행보는 한 예술가의 고통스러운 성숙의 행로이기도 하면서 충무로라는 전통적인 한국 영화 산업이 배출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미학을 가늠할 수 있는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1960년대 내내 오로지 먹고살기 위하여 영화를 찍었던 임권택은 흥미로운, 그러나 기억되지는 않는 숱한 오락 영화를 연출했으며 본인의 말에 따르면 1973년 작 <잡초>를 계기로 영화를 통해 자신과 세계에 대해 발언할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하기 시작했다. <깃발 없는 기수> <족보> 등의 영화로 1970년대 후반 주목받지 못한 채 성큼 진전된 영화 세계에 이른 그는 <짝코> <만다라> 등의 영화를 통해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족보> <짝코> <만다라> 등은 물론이고 <티켓> <길소뜸> <서편제>, 최근작인 <취화선>에 이르기까지 임권택은 저마다의 도덕적, 인간적 결함을 안고 방황하며, 더러는 돌아오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거처할 곳을 찾는 등장인물을 그렸다. 임권택의 영화에서는 당연히 길의 이미지가 떠나지 않는다. 빨치산 토벌 대장 송기열과 빨치산인 백공산의 일생에 걸친 추적과 도피의 삶을 다룬 <짝코>는 물론이고 <만다라>에서의 두 승려의 구도의 길, <길소뜸>에서 동진과 화영이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길, <개벽>에서 해월 최시형이 끊임없이 걷는 길은 모두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선이었다. 임권택 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을 거둔 <서편제>에서도 길은 소리와 함께 주인공의 마음을 전해주는 풍경의 주제를 품고 있다.

 

 

 

 

-2002년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취화선>에서 임권택은 적은 편집과 간결한 화면으로 생략과 압축을 취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더 밀고나가면서 <춘향뎐>에서 시도했던 완벽한 형식주의의 세계를 한 예술가의 전기라는 이야기의 세계와 조화시켰다. 그는 여전히 감정의 노출을 절제하는 생략의 싸움을 벌인다. 장승업의 일대기로 이야기의 구심력을 삼으며, 장승업이 그리는 그림과 그가 그림에 채워 넣고자 했던 자연 산수의 풍경을 겹쳐놓은 채 이야기의 원심력을 매듭 짓는 <취화선>은 임권택의 통 큰 미학의 정체를 증명하고 있다. 역사적 상처에 대한 강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임권택은 플롯에 의존하지 않는 모자이크적인 에피소드 구성의 생략을 통해, 화면과 화면의 연결 사이에 큰 관념을 넣을 줄 아는 이 시대의 어른 감독이다. 그가 성취한 것과 성취하지 못한 것은 상당 부분 한국영화의 현재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임권택은 영화의 거장이라기보다는 '한국 영화', '한국적 영화'의 거장이라고 해야 할 듯.) 

2위 김기영 '영화 작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

-“인간의 몸을 자르면 검은 피가 나온다”고 생전의 김기영 감독은 말했다. 김기영은 능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감독이다. 하길종 감독은 1970년대에 이미 “김기영은 누구보다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고 ‘영화 작가’란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이다”라고 그를 평했다. 세월의 흐름을 이겨낸 김기영의 황당무계한 발상과 독창성은 지금 봐도 무시무시하다. 1960년에 처음 발표한 뒤 그 뒤 여러 차례 리메이크해서 김기영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하녀> 시리즈는 가정부나 술집 여자가 중산층의 가정에 들어와 그 가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얘기다.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인간들의 심리를 독특한 화면 색감과 공간 연출을 통해 파헤치며 농촌 출신 여자가 도시 가정을 무너뜨리는 이야기 구조에 은근히 근대화 과정에 있었던 한국 사회에 대한 계급적 통찰까지 새겨놓았다.

 

 

 

 

-그러나 김기영이 처음부터 사이코 스릴러영화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설>(1958), <10대의 반항>(1959) 등의 영화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배어 있다. 그러나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김기영 특유의 염세적인 비틀린 유머나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독특하게 풍기는 취향이 튀어 나온다. 심지어 김기영의 두번째 장편 극영화인 <양산도>(1955)에는 여주인공이 무덤에 있는 연인과 성교를 하고 함께 하늘로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1970년대의 김기영은 주로 문학 작품이 원작인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광수와 이청준의 소설을 각각 영화로 만든 <흙>과 <이어도>는 원작의 분위기와는 저만큼 떨어져 있지만 영화적으로 훌륭하게 재구성된 이 시기의 걸작이다. 또한 이 시기에 김기영은 저예산 날림 영화지만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을 지닌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 등의 영화로 훗날 일부 영화광에게 컬트 감독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하길종은 그런 김기영의 작품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김기영의 영화는 인습적인 줄거리 틀이 없고 인간의 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만이 있다. 그는 다분히 실험적이고 편집광적인 태도로 인간의 의식 구조에 집착한다. 김기영은 항상 한국 사회의 한 측면을 과장된 수법으로 그렸지만 이야기가 황당무계하냐 아니냐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이야기가 황당하다면 당대의 한국 사회를 황당무계하게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는 '영화작가'이면서 '감독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아닌가 싶다.) 

3위 유현목 '예술'을 하려 한 감독, 실제로 그렇게 한 감독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사가 이영일은 유현목의 <오발탄>에 대해 “이것은 한국 리얼리즘영화의 전형이다”라고 단언했다. <오발탄>은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한국영화가 아직 산업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온전한 얼굴을 갖추기 전에 만들어진 <오발탄>은 지식인의 실존적 자의식과 몽타주와 화면 구성이라는 영화 미학의 양대 통사를 가장 체계적으로 구사한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그때 이후로 유현목에게는 늘 ‘예술파 감독’이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공처가 3대> <수학여행> <한> 등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유현목 영화의 본령은 역시 비판적인 현실 안목, 전후 불행한 삶의 조건을 내려받은 한국 사회에 대한 도저한 구원 의식, 영화의 미학적 표현에 예민한 손끝을 드러내는 일련의 진지한 작품에 있었다.

 

 

 

 

-<김약국집 딸들> <막차로 온 손님들> <문>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사람의 아들> 등 유현목의 주요 작품을 일별하다 보면, 우리는 그가 흔히 말하는 리얼리즘 스타일의 감독이라기보다는, 곧 현실을 응시하는 감독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어떻게 형식에 반영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모더니즘 취향의 재능이 더 강한 감독임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동시대의 다른 한국영화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현목도 영화사에서 주문받은 작품을 만드는 자의 운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현목은 당대의 어떤 감독보다 인간의 실존적인 조건에 고민하고 그에 따르는 가난, 분단, 종교, 근대화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카메라의 눈을 들이댄 예민한 예술적 자아의 소유자였다. <오발탄>은 그런 유현목의 예술적 자아가 가장 의기충전했을 때 세상에 나온 작품이며 한국적인 사실주의의 범례로 남는, 동시에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예술적 자아의 증거물로 역사에 제출된, 유현목 영화 세계의 기념비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다른 영화들을 별로 보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의 <오발탄>은 영화사의 과녁에 명중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 

4위 홍상수 내게 거울을 비춰줘

-홍상수의 등장과 함께 한국영화는 ‘일상’이란 비평 어휘를 얻었다.(*그 일상은, 그러나 매우 '충격적인' 일상이었다.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은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와 함께 쉽게 넘보지 못할, 전설적인 데뷔작으로 남을 것이다.) 대다수 극영화에서 간과하고 무시했던 일상의 극적이지 않은 사건들이 홍상수의 영화에선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차곡차곡 모아진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했을 때 사람들은 서울에 이토록 누추하고 비루한 일상이 펼쳐진다는 것에 새삼스레 놀랐고, 그 심심해보이는 공간 속에서 그렇게 격정이 은밀하게 휘몰아친다는 것에 또 놀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이어 홍상수는 연애 삼부작이라 할 수 있는 <강원도의 힘> <오! 수정>을 연달아 내놓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여러 남녀가 엇갈리며 교차하는 사랑 이야기를 짜맞췄다면 <강원도의 힘>은 같은 시간에 강원도를 따로 여행하는 불륜 관계의 남녀 이야기를 각자의 시점에 따라 1,2부로 나눠 찍은 것이고 <오! 수정>은 남녀의 기억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펼쳐지는 연애담을 펼쳐놓는다.

 

 

 

 

-홍상수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표면을 꼼꼼하게 관찰하기 위해 영화 형식을 열어놓는 스타일에 능한 감독이며 조금씩 자기 스타일의 영역을 확장했다. <생활의 발견>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여행중에 만나 진귀한 에피소드를 펼쳐놓는 또 한 편의 연애담이다. 홍상수는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찍지 않는다. 그는 대부분의 대사와 행위를 현장에서 즉석에서 만들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영화의 전개를 관찰한다. 그것이 그의 영화의 톤을 멜로드라마의 정형화된 과장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슬픔과 웃음과 치욕과 기쁨을 오락가락하는 기묘한 초상화로 꾸민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거울을 보듯이 우리 삶을 보는 것이다. 매일 거울로 나를 바라보듯이" 라고 말했다. 그가 영화로 비춘 거울은 앞으로도 볼 만할 것이다.(*그의 <해변의 여인>을 빨리 보고 싶다.) 

5위 신상옥 1960년대 한국영화의 뿌리

-신상옥은 한 명의 영화감독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1960년대의 한국 영화 시스템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과장하자면 1960년대의 한국영화는 신상옥이 관여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대별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신상옥 감독을 감독이라고만 부르는 건 왠지 부족해 보인다. 그는 '한국영화 시스템' 자체였기에.) 신상옥이 설립한 신필름은 오늘날의 방송국 규모에 견줄 만한 규모와 인력으로 전근대적인 한국 영화 산업 시스템에서 최초로 메이저 스튜디오를 지향한 굉장한 한국 영화 제작의 본거지였다. 신필름을 무대로 신상옥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쌀> <상록수> 등의 예술적인 기품이 묻어나는 영화와 <빨간마후라>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등의 대작 전쟁 영화와 사극을 고루 찍었다. 신상옥의 작품 세계는 하나의 말로 요약될 수 없는, 대제작자의 욕망과 영화 작가의 욕망이 늘 충돌하는 다양한 색깔을 지닌 것이었지만 그것은 곧 그의 영화가 대다수 한국영화의 장르에 걸쳐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신상옥 본인의 표현을 빌면, “한국영화에선 처음으로 화면 사이즈 연출 감각이 드러나는 영화”였으며 <성춘향>은 컬러 현상으로, <빨간마후라>는 특수 효과로 한국 영화 기술사에 남는 영화기도 하다. 신상옥은 평생의 반려자인 최은희를 비롯해 수많은 감독과 배우를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배출했고 잘 알려진 대로 1980년대에는 피랍된 북한에서도 자신의 연출 경력을 이어나갔다. 오늘날 신상옥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거대한 한국 영화 역사의 중간 뿌리를 묶음째로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선 전근대적인 삶의 자취를 응시하면서도 영화 형식의 현대적인 발언을 대중적인 통로로 쏟아내려 한 맹렬한 야심을 읽을 수 있다.

6위 이창동 영화감독은 지금 출장중

-이창동의 영화 세계는 한국 영화 역사의 오랜 화두였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맨 얼굴로 서로 부딪치는 격전장이다. 이창동 본인은 리얼리즘적 태도를 대중적 화술과 조화시키려는 것이 자신의 영화 세계라고 말하지만 <박하사탕>과 <오아시스> 등의 그의 영화에서 현실을 재현해 보여주려는 그의 태도는 관객의 반응을 섬세하게 고려해 '과연 영화를 보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집요하게 묻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창동은 잘 알려진대로 소설가 출신이며 그의 모든 영화는 상징적 의미가 정연한 논리 체계로 완벽하게 짜여진 폐쇄적 소우주다. 그의 영화에서의 공간과 사물은 어느 것도 무심히 존재하는 법이 없다. 이미 의미론적으로 꽉 채워진 세계에 주인공은 던져져 있으며 그 세계에서 이창동은 삶의 구체적인 꼴을 그리는 자기만의 내기를 건다.(*<박하사탕>을 통해서 이창동은 많은 이들의 시대에 대한 채무를 대신 갚아주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늘 그에게 감사한다. 약간의 채무감을 느끼면서.) 

 

 

 

 

-일산과 영등포를 통해 현재와 과거의 한국 사회에서 잃어버렸고 잃어가고 있는 가치를 담아내려 한 데뷔작 <초록물고기> 이후 <박하사탕>을 통해 이창동은 본격적으로 현실과 영화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는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되고 독재 정권 시절의 대공분실에서 일하며, 가구점을 운영하는 천민 자본가로 증권에 투자했다가 신세를 망치는, 한국 현대사의 이런저런 현장에 늘 가까이 있던 인물이다. 그는 그 대가로 인간성의 파멸이라는 천형을 받는다. 그를 구원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영화의 플롯이다. 역순 구조의 플롯을 통해 이 인물은 역사적 인과 관계의 희생자라는 천형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

-세번째 영화 <오아시스>에서 이창동은 꽉 짜인 의미론적 세계에 불행한 남녀의 사랑을 던져놓고 들고 찍기로 일관하는 느슨한 카메라로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의 정체를 거꾸로 되묻고 있다. 잔인하지만 동시에 통렬한 이 방식을 통해 그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잠깐 ‘출장중’이다.(*물론 그는 출장에서 돌아왔다. 그의 <밀양>은 언제 햇볕에 나오는지?) 

6위 이만희 시대를 잘못 만난 공인받은 천재

-이만희는 전설의 걸작, 그렇지만 현재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은 <만추>의 감독 바로 그 사람이다. 동세대의 감독들로부터 가장 인정받는 천재가 이만희였으며 자기 삶을 거의 방치하듯이 마구잡이로 영화를 찍었는데도 늘 수일한 영화의 완성도를 일궈냈던 불가사의한 재능의 소유자도 바로 그 사람이다. 이만희는 출세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이래 어떤 소재의 영화를 만들어도 탁월한 시각미를 지닌, 동시에 긴장감을 주는 이야기를 짜내는 재능으로 부러움을 샀다. 그는 도회적인 우수와 고독을 그리는 데 특히 뛰어났으며 도시 공간을 그리는 데 능했던, 체질적으로 현대적인 감수성을 지닌 감독이었다.(*이만희는 김기영에 이어서 최근에 가장 주목받고 있는 거장이다.) 

 

 

 

 

-한국 영화감독들 가운데 드물게 추리영화를 만드는데도 뛰어났던 이만희는 당시의 억압적인 정치 현실에 좌절해 늘 술에 절어 살았으며 제작자가 의뢰한 숱한 영화를 마구잡이로 찍었지만 자기 색깔을 놓치진 않았다. 심지어 반공 전쟁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등의 영화도 이만희가 메가폰을 잡자 상투적인 전쟁 무용담을 벗어나는, 체제와 인간의 대결 의식이라는 주제 의식이 돌출되는 박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만희는 아쉽게도 너무 빨리 세상을 등졌다.

-그의 유작인 <삼포가는 길>(1975)은 황석영의 동명 단편 소설을 각색해 영화로 만든 것이며 영화 속 세 주인공의 따라지 인생에는 당시 한국 사회에 맺힌 슬픔과 삶의 흥이 격정적으로 담겨 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한국의 스산한, 그렇지만 고향 같은 푸근함을 동시에 간직한 남도의 풍경을 아스라이 전해주는 이만희 최후의 유작이다.

06. 04. 18.

P.S. 사랑도 이젠 소용 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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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8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4-18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마무리가 한발 늦었군요...

로쟈 2006-04-18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제가 이명세나 박찬욱 감독의 (최근) 영화를 별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 거 같군요. 취향이야 제각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