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의는 물론 전공학회와도 거리를 두고 지내다 보니 학술서를 손에 들 일이 아주 드물어졌다. 관심이 가는 책들은 구해놓는 편이지만 좀처럼 읽을 여유를 내기 어려울 뿐더러 외서 같은 경우도 (학술서라서) 너무 비싸서 '그림의 책'으로 보관함에만 넣어두는 일이 많다. 그럼에도 눈에 띄니까 몇 권은 페이퍼로 갈무리해놓는다.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 연구총서'로 나오는 책들과 한국외대의 '세미오시스 번역총서' 책들이다.
불어문화권 총서로 이번에 나온 책은(아무래도 주로 아프리카 지역을 다룬다) <카빌리 베르베르 문화사전>(사회평론아카데미, 2016)이다. '알제리 소수민족의 삶과 역사'가 부제. 사전인 만큼 분량도 두툼하다.
"알제리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거꾸로 프랑스에 유무형의 영향을 미쳤고, 지중해의 수많은 민족들이 로마와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사라져갔음에도 지금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바로 카빌리 베르베르인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하게는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의 혈통이며, 알베르 카뮈를 포함한 여러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지역이다."
카뮈를 포함한 여러 프랑스 작가들 가운데 카뮈만 떠오르는지라(누가 또 있는지?) <이방인> 등의 작품을 염두에 두게 되는데, 아무려나 그 배경이 되는 지역과 혈통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 이 총서에는 그밖에도 국내 연구자들이 쓴 <검은, 그러나 어둡지 않은 아프리카>(사회평론아카데미, 2014)와 엘렌 달메다 토포르의 <아프리카: 열일곱 개의 편견>(한울, 2010)이 포함돼 있다. 출간 간격으로 보아 잊을 만하면 한권씩 나오는 편이다. 직접 구입하긴 어려워도 도서관에 있다면 대출해서 주루룩 넘겨보고 싶은 책들이다.
'세미오시스 번역총서'는 '세미오시스 연구총서'와 짝을 이루는데, 번역총서에 더 눈길이 간 것은 러시아의 언어철학자 알렉산드르 포테브냐의 <사고와 언어>(외대출판부 지식출판원, 2016)이 포함돼 있어서다. 이번에 코르넬리스 드발의 <퍼스 철학의 이해>와 같이 나왔는데, 1권은 2013년에 나온 <퍼스 기호학의 이해>였다. '세미오시스'라는 총서명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주로 기호학 분야의 책들이 연구총서와 번역총서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도 당장 관심이 가는 건 <사고와 언어>.
"저자는 슬라브 제 민족 언어 창작물의 실증적 사례를 통해 언어의 의미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내적 형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언어학과 시학과 심리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통학문적인 관점에서의 언어현상 연구를 주창하고 있다. 저자는 언어가 기존의 사고와 새로운 지각 사이의 매개 활동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사고와 언어>에서 개진된 사상은 이후 언어의 대화적 본성을 주장하게 될 후대 철학가들에게 사상적 모델을 제시했다."
오래 전에 읽은 기억으로는 포테브냐의 언어철학이 러시아 형식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잊은 지 오래다.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해선 기본서이면서 고명한 연구서인(영어권 최초의 연구서이자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빅토르 어얼리치의 <러시아 형식주의>(문학과지성사)도 절판된 지 오래 되었군. 이런 책들과 씨름하던 게 어즈버,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16. 0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