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EBS 세계명화에서 짐 자무쉬(1953- )의 <천국보다 낯선>(1984)을 다시 봤다. 집안 청소를 하면서 봤기 때문에 제대로 봤다기보다는 그냥 틀어놨었다고 해야 맞겠다(중간에는 분리수거도 하러 내려갔다 오고). 사실 이 영화는 국내에 개봉되기 이전에 아주 오래전 한 대학의 영화제에서 거푸 두 번을 본 적이 있다. 이후에 개봉관에서도 한번 보고. 그러는 사이에 80년대 대학가의 '전설'이었던 이 영화는 이젠 '낯익은' 영화가 되었다. '포스트모던적'이었던 영화의 포스터는 거의 키치가 되었고.   

<천국보다 낯선>은 얼마전 최근작 <브로큰 플라워>(2005)가 국내 개봉된바 있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기린아' 짐 자무쉬의 두번째 장편영화이고, 일설에는 빔 벤더스가 <파리, 텍사스>(1984)를 찍고 남은 필름으로 찍은 영화이다(자무시는 벤더스의 조감독 출신이다). 영화 속 이야기나 화면은 쓸쓸하고 황량하지만, 처음 볼 때는 아주 낯설고 참신한 영화였다(빅토르 슈클로프스키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예술은 '낯설게 하기'이다). '진공청소기를 돌리다'는 '악어의 목을 조르다'라고 표현하는 게 '미국식'이라고, 헝가리에서 날아온 사촌동생 에바에게 '미국인' 윌리가 한 수 가르쳐주는 대사처럼. 나 또한 악어의 목을 한참 조르고 난 후에 이 페이퍼를 쓴다.

먼저, 의례적인 영화 줄거리를 이미지들과 함께 옮겨온다. 영화는 '신세계(The New World)', '1년 후(One year Later)', '천국(Paradise)'이란 소제목으로 나뉘어진다.

-뉴욕 빈민가의 낡은 아파트에 사는 윌리에게 어느 날 사촌 에바가 찾아온다. 갑자기 군식구를 떠맡게 된 윌리는 처음엔 그녀를 성가셔 하지만 10일이 지나 에바가 떠날 무렵이 되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낀다.  

-일년 후 윌리는 친구 에디와 함께 에바를 만나러 클리블랜드로 무작정 떠난다. 괴짜 로티 아주머니와 함께 사는 에바는 핫도그 가게 점원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세 사람은 함께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한다. 이들의 여정은 개경주에서 윌리와 에디가 가진 돈을 거의 다 날리게 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남은 돈을 털어 경마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있을 때 에바는 우연치 않게 큰 돈을 손에 넣는다.  

-윌리와 에디를 기다리던 에바는 결국 혼자 공항으로 떠나고,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진다. 언제 도착했건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인 이민자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는 화려하고 꿈같은 파라다이스와는 거리가 멀다. 신세계의 꿈을 안고 도착한 에바에게 이 거대한 나라는 뉴욕이건, 클리블랜드건, 플로리다건 간에 쓸쓸하고 황량할 뿐이다. 

<천국보다 낯선>은 한겨레신문이 선정한 세계영화 100선에도 꼽혔던 작품이니만큼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작품 해설은 이렇다. 

 

 

 

 

-헝가리 아가씨 에바가 뉴욕에 사는 건달 친척 윌리의 집에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천국보다 낯선>은 착상이 도전적이다. 이 영화에 담긴 미국 사회의 풍경은 아메리칸 드림,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이 흑백 장편영화는 삭막하고 스산하기조차 한 미국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영화로 청년 감독 짐 자무쉬는 84년의 칸 영화제 신인감독상과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 표범상을 받았다. 그는 단숨에 뉴욕 독립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천국보다 낯선>은 미국영화지만 사실 미국영화라기보다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유럽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 화면이 한 장면을 이루는 길게 찍기, 시선의 비상한 집중을 요구하는 고정된 카메라 스타일, 서로 진정한 의사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관계, 여기저기 떠돌지만 정신적으로 건조한 삶의 조건, 긴 페이드 아웃의 화면전환이 주는 형식의 단절감 등은 무엇보다 대리만족을 주는 이야기체 영화를 중시했던 미국영화의 전통과는 별로 상관없다. 자무쉬는 빔 벤더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 브레송 등의 유럽 영화감독과 일본 영화의 대가 오즈 야스지로 등의 영화로부터 영감을 빌려와 황폐한 미국 생활의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영화 표현의 뿌리를 여러 혈통에서 빌려온 셈이다. 그래서 곧잘 '포스트모던'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자무쉬 영화의 새로움은 유럽영화에서는 이미 상투화한 진술을 미국의 상황으로 옮겨놓은 낯설음에서 온다. 예를 들면 에바와 에바의 사촌 오빠 윌리가 식탁에서 TV 디너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같은 것이다. "티브이 디너 안먹을래?" "안먹어, 배 고프지 않아." "왜 티브이 디너라고 부르지?" "그냥... 티브이를 보면서 먹으니까... 텔레비전말이야." "텔레비전이 뭔지는 나도 알아." "그 고기는 어디서 난거야?" "뭐?" "그 고기는 어디서 난거야?" "쇠고기지 뭐." "쇠고기야? 고기같이 보이지 않는데." "휴... 상관하지마. 어쨌든 여기선 이런 걸 먹는다구. 고기, 야채, 디저트, 그리고 설거지할 필요도 없어." 이런 식의 반복된 대화의 연속과 단조로운 양식은 황폐한 미국생활을 암시하는 놀라운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자무쉬는 원래 이 영화의 1부인 <신세계>를 단편영화로 발표했었다. 영화가 평판이 좋자 자무쉬는 두 단락을 더 붙여서 장편영화로 공개했다. 그러나 1부 '신세계'에 이어 추가된 '일년 후'와 '천국'은 1부의 부연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뉴욕에서 클리블랜드와 플로리다로 옮겨 다닌다. 이 여정은 야만의 땅에 문명을 심으며 서부영화의 주인공들이 걷던 신화적인 여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장소이동 모티브에는 더 이상 상징적인 의미가 없다. 클리블랜드로 가는 차 안에서 주인공들은 어딜 가나 다 똑같다고 중얼거린다.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저 천국보다 낯선 곳일 뿐이다.

-자무쉬는 그러나 <천국보다 낯선> 이후에 만든 영화들에서 <천국보다 낯선>의 신선함에 맞먹는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형식이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종래의 미국적인 이미지를 뒤집는데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재미있는 것은 이 관심이 모방과 짜집기와 재구성이라는 80년대 이후의 양식적 경향 속에서 추구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주 미국적인 감독이다.

한데, 영화를 여러 차례 보다 보면, 메시지는 모두 증발해버리고, 형식미나 디테일 정도만이 인상에 남는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러한 디테일은 여주인공 에바가 듣는 음악들인데, 그 중에서도 'Screamin' Jay Hawkins'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는 잴러시 호킨스(Jalacy Hawkins; 1929-2000)의 '절규하는' 로큰롤 'I put a spell on you'(1956)가 가장 인상적이다(http://www.youtube.com/watch?v=bvWf9djVg9c).  

I put a spell on you
Because you're mine.
I can't stand the things that you do.
No, no, no, I ain't lyin'.
No.
I don't care if you don't want me
'Cause I'm yours, yours, yours anyhow.
Yeah, I'm yours, yours, yours.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Yeah! Yeah! Yeah! Yeah....
I put a spell on you.
Lord! Lord! Lord! ...
.'Cause you're mine, yeah.
I can't stand the things that you do
When you're foolin' around.
I don't care if you don't want me.
'Cause I'm yours, yours, yours anyhow.

Yeah, yours, yours, yours!
I can't stand your foolin' around.
If I can't have you,
No one will!

I love you, you,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you, you!
I don't care if you don't want me.
'Cause I'm yours, yours, yours anyhow.

witchesattea.jpg

가사에서 'I put a spell on you'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어요'라고 옮긴 경우도 있던데) '나는 당신에게 주문을 걸어요'란 뜻이겠다. 왜냐면, "당신은 내 거니까." 마지막 가사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을 나를 원하지 않더라도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어쨌거나 당신 거니까."란 식이니까, 거의 '당신'의 목을 조르는 내용이다.

해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은 '천국보다 낯선' 아메리카가 우리에게 거는 '주문'인지도 모르겠다.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황량한 텍사스 사막에 '파리'라는 지명이 붙은 것처럼, <천국보다 낯선>에서는 황량한 들판이 (천국보다 낯선) '천국'에 비유된다. 우리가 에바처럼 서 있는 이 자리, 끊임없이 주문/마법이 필요한 이 자리...

 

06. 04. 09. 

 

 

 

 

 P.S. 한편, 아메리카의 반대편 러시아에서 '악어'하면 떠오르는 두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풍자소설 <악어>와 러시아 어린이들의 친구이자 마스코트 <체브라시카>에 등장하는 악어 친구 '게나'이다. <악어>는 당대 19세기 유럽이란 (천국보다 낯선) '천국'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신랄한 풍자와 조소를 담고 있는 작품이며, <체브라시카>는 원송이도 아니고 곰도 아닌 주인공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험담이다. 동물원에 출퇴근하다가 체브라시카의 모험을 따라나선 악어 게나는 그런 체브라시카를 도와주는 친구. 만약 아이가 미키마우스 대신에 이런 만화/동화를 좋아한다면,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닌) 러시안 스타일로 키우셔도 되겠다...   

P.S. 짐 자무시(자무쉬)의 인터뷰집이 출간됐다. <짐 자무시>(마음산책, 2007). "1981년부터 2000년까지, 20여 년에 걸쳐 다양한 국적의 인터뷰어들이 기록한 열다섯 편의 글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인터뷰는 '영원한 휴가'부터 '커피와 담배'에 이르기까지, 짐 자무시 자신이 영화에 담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들려준다.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에피소드 외에, 그의 삶과 개인적 이야기를 담은 글들도 많다. 그의 세계관, 정치적인 입장 등이 드러나기도 하며, 로베르토 베니니, 카우리스마키 형제, 빔 벤더스 등과 같은 동료들과의 만남이 소개되기도 한다."

아직 빔 벤더스에 관한 책도 변변한 게 나오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의외이긴 한데, 여하튼 반갑다. 짐 자무시보다 더 고대하는 건 아키 카우리스마키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언젠가 소개한 바 있지만 나는 러시아어에서 나온 연구서 하나를 갖고 있다). "원서인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에 수록된 17편의 인터뷰 가운데, 15편을 골라 편집했다."고 하는데, 굳이 2편을 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07.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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