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저녁에 지방에서 강의하고 늦게 귀경한 탓에 오랜만에 심야 합승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나보다 앞서 술에 취한 중국 여자가 뒷죄석에 타고 있었는데, 같은 방향이어서 나도 동승하게 되었다. 여자는 곯아떨어질 정도로 만취한 건 아니어서 계속 운전기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중국에 관한 내용이었다. 택시 기사가 중국에 자주 왕래한다면서 핸드폰에 저장된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준 때문이었다. 기사는 중국어도 당연히 할 줄 안다고 말했지만 '정말요?'하면서 중국어로 묻는 질문에는 손사래치며 답하지 않았다. 여기는 한국이니까 한국말로 해야 한다며. 아마도 옆자리에 앉은 나를 의식한 것 같은데, 두 사람만 있었다면 중국어 대화도 가능했을 성싶었다. 두 사람의 대화 덕분에 나는 현재 중국 위안화 환율이 180원이란 것과 중국 택시 기본요금이 (지역마다 다르긴 해도) 5위안이라는 것(버스는 1위안) 등을 알 수 있었다(심야택시는 배울 게 많군).

 

 

이런 얘기를 서두에 꺼내는 건 '세계화' 시대의 한 가지 표정이 아닌가 해서다. 가까운 이웃나라이긴 하지만 외국인과 택시를 합승하는 것도,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이런저런 대화가 가능한 것도 이젠 드물지 않은 일이다. 1시 반이 넘어 귀가해서 내가 처음 한 일은 택배상자들을 풀고 배송된 책들을 정돈하는 일이었는데(주문한 게 많았다), 열댓 권 가운데 제일 먼저 펴든 게 김이듬 시인의 <디어 슬로베니아>(로고폴리스, 2016)였다. '사랑의 나라에서 보낸 한때'가 부제. 제목과 부제가 모두 시인이 쓴 여행서라는 걸 알려주는 책이다. 실제는 예상보다 더 여행서다운 책이었다. 아래는 류블랴나 성 사진. 체코의 프라하 성과는 또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슬로베니아 곳곳의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좀 오래 전에 한 번 다녀온 중국에는 아직 다시 갈 계획이 없지만 불현듯 슬로베니아에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가 300만이 안 되는(책에는 면적이 한국의 전라도만 하고 인구는 200만 정도라고 소개된다) 발칸의 작은 나라.   

"김이듬 시인이 2015년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류블랴나 대학교 파견 작가로 슬로베니아를 방문하고 쓴 여행에세이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여러 유럽 국가들과 원활한 연결망을 가지고 있어 여행객들에게는 중간 경유지 정도로 여겨지는 슬로베니아에서 시인은 오랫동안 천천히 그곳의 사람과 자연, 문화를 음미했다. 이 책에서 시인은 동유럽 패키지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슬로베니아의 명소―블레드 호수, 포스토이나 동굴, 프레드야마 성―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매혹된 슬로베니아의 다양한 도시를 소개하고 있다."

 

한 여행서에서 슬로베니아를 '슬라보예 지젝의 나라'라고 소개해서 웃음을 지은 적이 있는데(여행객들에게 어필할 만한 제목인가?) 사실 슬로베니아란 나라와 류블랴나란 수도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지젝 덕분이긴 하다. 국내에는 '슬로베니아학파 총서'도 나오지 않았던가. 지젝을 제외하면 레나타 살레츨과 알렌카 주판치치, 미란 보조비치 등이 슬로베니아학파의 멤버들이다(무슨 조직은 아니고,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을 융합하여 작업하는 지젝의 동료들이다). 덕분에 슬로베니아는 적은 인구의 나라라는 이미지와 함께 대단히 지적인 나라라는 인상을 받는다. 실제로도 그럴까? 하긴 단위 인구당 철학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일 수는 있다.

 

 

슬로베니아에도 여러 관광명소가 있다지만 내가 먼저 들르고 싶은 곳은 수도 류블랴나다. 강병융 작가가 '아내를 닮은 도시'라고 부른 도시(인디고 연구소에서 기획한 인터뷰집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도 지젝과의 류블랴나 현지 인터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추천사를 보면 편혜영 작가도 '류블랴나파'에 속한다.

"얼마간 류블랴나에 다녀온 후 나는 어떤 도시보다 자주 류블랴나를 들먹였다. 류블랴나는 말이지, 로 시작하는 말은 대개 과장이었다. 당연했다. 나는 고작 며칠 그곳에 머물렀고, 본 것보다 보고 싶은 것, 간 곳보다 가고 싶은 곳이 여전히 많았다. 소설 쓰는 강병융이 그리로 간다고 했을 때 오랜 거짓말을 들킨 기분이었다. 동시에 함께 그곳을 그리워할 동지를 만나 즐거웠다. 그때부터 이 책을 기다려왔다."

언젠가 모스크바에서 일년을 지낸 것처럼, 류블랴나에서도 한 시절을 보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대로 '디어 슬로베니아' 한권쯤 쓸 수 있을 텐데...

 

16. 0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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