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읽기의 계속이다.  지난번에 제2부의 4장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소!'를 정리하다가 끊었었는데, 그걸 다시 이어서 가급적이면 4장까지는 정리해놓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예정대로 내일쯤 집에 인터넷을 깔게 된다면, 이런 류의 정리작업을 훨씬 진도를 빨리 뺄 수 있을 것이다. 읽을 책들은 넘쳐나고 써야 할 글들도 너무 많은데, 이렇게 굼뜨게 정리하다가는 한 생애를 말아먹기 십상이겠다. 어쨌거나 지난번에 키에슬롭스키가 왜 다큐에서 극영화로 이행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면('진짜 눈물'에 대한 두려움이 그 이유였다. 말하자면, 그에게 드라마는 실제 현실에 대한 방독면 같은 것), 이번에 다룰 건 그의 (유심론적 신비주의가 아닌) '유물론'이다.

130쪽부터 보도록 한다. "진짜 눈물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금지는 구역에서 이미지들의 금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여기서 '이미지들의 금지'라고 한 것은 '우상 금지(Bilderverbot)'를 뜻한다(성경에서 흔히 '우상'이라 번역되므로 병기해주는 게 낫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 것'(출20: 4,5), '우상을 자기 앞에 두지 말 것'(겔14: 4), '우상을 멀리할 것'(요일5:21), '우상을 마음 속에 두지 말 것'(왕상21:20),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 것'(겔20:7), '이방 신상들을 버릴 것'(창35:2), '우상에게 절하지 말 것'(신5:9), '우상을 훼파할 것'(신12:3), '우상숭배를 피할 것'(고전10:14).

Schoenberg - Moses und Aron / Pittman-Jennings · Merritt · Boulez

지젝은 이러한 구약에서의 금지와 키에슬롭스키 영화의 상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제안한다. 이 대목의 번역은 부정확하고, 역주도 엉뚱하게 달려 있어서 교정하기로 한다. 먼저 본문: "이미지 제작의 금지에 관한 오페라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모세와 아론>을(혹은 그에 상당하는 무지카 픽타를 - 왜냐하면 쇤베르크의 노력은 바로 이미지즘적으로 묘사하는 틀밖으로 음악을 끌어내어 헤쳐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참조하는 것이 여기서 얼마간 도움이 될 것이다."

원문은 "A reference to Arnold Schoenberg's Moses und Aaron, the opera concerning the prohibition on making images (or its equivalent, musica ficta - since Schoenberg's effort is precisely to tear music out of the imagistic-depicting frame), might be some help here."(74쪽)

먼저 지적할 것은 '무지카 픽타'에 대응하는 게 '우상(이미지) 만들기(making images)'라는 점이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무지카 픽타'는 음악용어로 "10-16세기의 음악에 있어서 반 음계적 변화음"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가령 거친 화성을 피하기 위해 B-natural(제자리) 대신에 B-flat(내림)을 사용하는 것이라 한다.

음악에 문외한인 탓에 그렇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문맥상 곡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는 뜻이겠다. 그것이 '이미지 제작'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어떤 곡조로부터 자연스런 이미지-연상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란 뜻이 아닐까 한다. 즉, 일종의 '음악적 허구'를 만들어낸다는 것. 참고로 프랑스 철학자 라쿠-라바르트의 저서에 <무지카 픽타>가 있으며(아도르노의 책에 견주어진다) 바그너 연구서인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일역본은 <허구의 음악>으로 옮겼다.

이어서, 'imagistic-depicting frame'를 국역본은 '이미지즘적으로 묘사하는 틀'이라고 옮기고 이 복잡한 삽입구문에 "1912년경에 일어난 시의 풍조....라는 식의 '이미지즘'에 장황한 내각주를 붙였다. 오페라 얘기를 다루는 대목에서 (시에서의) 이미지즘 얘기는 뜬금없다. 내가 이해하기론, 쇤베르크가 음악을 그 이미지-연상적(기술적) 틀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다는 것 정도이다. 즉, 음악을 들을 때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그림들'(=허구들)을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음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령, "쇤베르크의 오페라에서 노래는 멜로디가 없는, 슈프레히게장(Sprechgesang)'에 더 가까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은 푸치니 같은 이의 멜로드라마적인 과잉들에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슈프레히게장'은 음악용어로 '이야기하는 노래'란 뜻이라고(이런 데는 역주가 붙어 있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푸치니의 멜로디 과잉과는 대조적으로 쇤베르크의 경우엔 노래에서 멜로디를 (거의) 제거해버리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한 결과 아도르노가 주목한 바대로 <모세와 아론>은 자기지시적(=자가당착적)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술작품 속에서 위대한 착상들에 직접적인 주제 표현을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그 착상들의 잔상을 묘사하는 것을 의미"(아도르노)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영역된) 문장은 이렇다: "To give great ideas immediate thematic expression in a work of art nowadays means depicting their after-image." 즉, '잔상'은 'after-image'를 옮긴 것이며 축어적으론 '이미지(우상)을 따른다'는 뜻도 내포한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에서 위대한 착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 그러한 잔상(이미지 효과)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하면, 이미지를 자신의 오페라에서 제거하고자 했던 쇤베르크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게 되는 것. 의미심장하게도 <모세와 아론>은 "오 말씀이여, 내게는 없는 당신의 말씀이여"라는 모세의 절규로 끝난다." 즉, 이미지의 결여는 말씀(혹은 '위대한 착상') 자체의 결여로 귀결된다! 

지젝의 결론: "What breaks down here is not Aaron's exuberant singng, but precisely its opposite, Moses' purity of Word. In a kind of hegelian 'negation of negation,' the negation of image on behalf of the Word leads to the self-negation of the Word itself."(74쪽) 원문을 먼저 제시하는 것은 국역본에서 첫문장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일종의 헤겔적인 '부정의 부정' 속에서, 말씀을 대신하는 이미지의 부정은 말씀 자체에 대한 자기-부정이 되어버린다."(131쪽) 그 첫문장을 포함하여 다시 옮기면, "여기서 쇠멸하는 것은 아론의 열광적인 노래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모세가 지키고자 하는 '말씀의 순수성'이다. '부정의 부정'이라는 일종의 헤겔식 논리가 적용되는 것인데, 말씀을 위해서 이미지(우상)을 부정하는 것은 말씀 자체에 대한 자기부정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렇다면, 키에슬롭스키의 경우는? "키에슬롭스키는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의 영역을, 타락시키는 시각성으로부터 철수시키라는 구약의 명령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Kieslowski seems to share the Old Testament injuction to withdraw the domain what really matters from degrading visibility.) 전형적인 직역투인데(이런 문장들만 연속된다면 '멀미' 때문에 책을 계속 읽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조금 풀어서 다시 옮기면, "정말로 중요한 가치영역을 우상(이미지)의 타락적인 가시성으로부터 떼어내라는 구약의 명령을  키에슬롭스키는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구약의 우상 숭배 금지를 거스르면서 '실제' 삶의 내밀한 순간들에 대한 묘사의 금지를 바로 허구, 즉 '허위' 이미지들로 보충한다. '실제' 섹스 또는 내밀한 감정적 순간들을 보여주어서는 안되지만 배우들은 그것을 꾸며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사실주의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의 '가면쓰기'는 단순히 은폐되어야만(가려져야만) 하는 것에 대한 존중의 표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면쓰기의 변증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가면(=게임)을 통해서만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억압된 태도들'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이 경우 진실은 허구의 가면(위장)을 통해서만 그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키에슬롭스키가 다큐에서 극영화로 옮겨가야 했던 또다른 이유와 만나게 된다. 그의 영화들에서 실제의 인물들은 "스스로를 연기하면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섬뜩한 중첩을 만들어" 내곤 하던 '궁지'에 직면하여 그는 극영화(fiction)로 이행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실제 삶'의 장면들을 영화화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에, 연기라는 그들의 방어적 가면 아래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직접 하나의 역할을 연기하게 만드는 것, 즉 허구로 옮겨가는 것이다. 허구는 역할들을 연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133쪽)

마지막 문장의 강조는 나의 것이며, 원문은 "Fiction is more real than the social reality of playing roles."(75쪽)이다. 거기에서 귀결되는 것이지만, "만일 키에슬롭스키의 다큐멘터리들에서 주인공이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의 후기 극영화들은 아름다운 여배우(비노슈, 야콥)의 눈부신 매혹적 연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런 게 '가면쓰기의 변증법'이다.

물론 이러한 키에슬롭스키적 선택과는 정반대되는 선택도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내밀함 속으로 포르노그라피적인 침입을 감행하는 것인데('몰래 카메라'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선택을 부추기는 것은 '모든 것을 말하라!'(혹은 '모든 것을 까발려라!')는 우리의 문화이다(그리하여 대통령의 페니스 모양까지도 면밀히 조사한다). "물론 역설적인 점은 담론의 이러한 전지구화가 바로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표현해주는 양식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담론'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치루는 대가는 담론이 가장 바보 같은 현실 앞에서도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개인의 무제한적인 공적 고백/공개는 개인성 자체의 증발을 낳는다.

"이러한 역설들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만날 수 있는 것은 특히 反키에슬롭스키적인 제스처로 보이는 것들에서이다. 섹스의 '하드코어'적 묘사를 내러티브와 결합하여 내러티브 영화의 근본적인 금지들을 중 하나를 어기려는 최근의 노력, 즉 실제로 연기되는 섹스 장면들을 내러티브 속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한 사례로 지젝이 다른 자리에서 거론하고 있는 영화들은 파트리스 셰로의 <정사>(2001)나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 같은 영화이다. 아래는 "발기한 페니스의 실제 삽입" 장면이 포함돼 있는 영화 <정사>의 한 장면.

 이럴 경우,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정사 장면의 프레임을 제공해주는 내러티브는 "우스울 만큼 비현실적이고 스테레오타입적"이게 된다. 마치 18세기의 코메디아 델라르테(이탈리아 가면극)처럼. 지젝이 언급한 바는 아니지만 아마도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틴토 브라스의 코믹에로물들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브라스 자신은 에로영화의 '히치콕'을 자임하는 듯하다). 아래는 그의 영화 <살롱 키티>(1972)의 한 장면.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또 다른(대안적) 현실들'이란 테마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간의 긴장에 의해, 그리고 그 변증법에 의해 촉진된다. 그렇기 때문에 "키에슬롭스키가 만든 극영화들의 내러티브 저변에 놓여 있는 시각적 모티브 및 기타 모티브들의 연결과 반향의 패턴은 유심론적 신비주의와는 아무관계도 없다. 반대로 그것은 유물론의 궁극적 증거이다. 극영화들에서조차 키에슬롭스키는 촬영된 모든 필름 조각들을 다큐멘터리적 재료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 결과 남아있는 것은 모두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단편들뿐이다. 즉 그의 최종 편집에는 무엇인가가 항상 빠져 있다."(135쪽) 

"따라서 키에슬롭스키가 反다큐멘터리적인 천상의 영성(靈性)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 우연한 일치, 예기치 못했던 신비로운 연결들, 즉 수없이 칭송된 그의 후기 장편영화들의 이 '신비로운' 효과에 대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영화를 만드는 마지막까지도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고집했다는 것에 근거한다.(...)"

"아마도 거기에 다큐멘터리 현실과 극영화 간의 변증법적 긴장이 주는 궁극적 교훈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 교훈이란, 만일 우리의 사회 현실 자체가 상징적 허구나 환상에 의해 유지된다면 영화예술이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은 내러티브 허구 속에 현실을 재창조하는 것, 허구를 현실로 이(오)해하도록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현실 자체의 허구적 측면을 분별하게 만드는 것, 즉 현실 자체를 하나의 허구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렇다면, 키에슬롭스키의 필모그라피는 (1단계)다큐멘터리, (2단계)극영화, (3단계)영화-제작의 단념으로 이행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제3의 단계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단계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만일 다큐멘터리로부터 극영화로의 이행이 '진짜 눈물의 공포'에서, '실제-삶'의 내밀한 경험들을 직접적으로 그리는 것의 외설성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되었다면, 극영화들마저 포기한 것은 허구들이 어떤 점에서는 현실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136쪽) 여기서 '취약하다'는 '상처받기 쉽다'(vulnerable)는 뜻이다.

"만일 다큐멘터리들이 주인공의 개인적인 현실(reality)에 침입하여 그 현실에 상처를 입힌다면 극영화는 꿈 자체(dreams themselves)에 침입하여, 즉 우리의 삶의 언명되지 않은(=은밀한) 핵심을 형성하는 은밀한(=비밀스런) 환상들에 침입하여 상처를 입"히는 것일 테니까.

요컨대, 키에슬롭스키는 '진짜 눈물의 공포' 때문에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옮겨갔지만, 거기서 또한 '진짜 눈물'보다도 더 리얼한 '가짜 눈물의 공포' 때문에 영화를 그만두게 되었던 것. 요컨대, 진정한 영화감독이란 '진짜 눈물'의 공포를 지나서 우리를 '가짜 눈물'의 섬뜩함으로 데려다주는 사람이다. 그 자신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에 영화라는 매체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는 지점으로 말이다. 바로 키에슬롭스키 그 사람처럼... 

06. 03. 21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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