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인문한국(HK)연구소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인문저널 '창'의 기획좌담에 참여했었는데 오늘 그 잡지가 배송돼 왔다(비매품이다). 좌담 주제가 ''헬조선'과 인문학의 현실'이었다. 사회자의 서두/마무리 발언과 함께 좌담에서 내가 거든 몇 마디를 옮겨놓는다.
인문저널 창(2016년) '헬조선'과 인문학의 현실
최진석 : 안녕하세요? 고봉준, 김희정, 손희정, 이현우 선생님. 인문저널 “창”의 창간호 특별대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대담의 주제는 “‘헬조선’과 인문학의 현실”입니다. 현재의 사회적 현실에서 인문학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진단해 보고 미래를 전망해 보자는 취지로 기획한 것인데, 너무 무겁진 않을지 긴장되기도 하네요. 아무쪼록 여러 선생님들의 진심어린 말씀을 기대해 봅니다.
아시다시피, ‘인문학의 위기’라는 논제는 이미 1990년대부터 제기되어 왔고, 2000년대에는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문·사·철의 전통적 분과들이 대학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며 ‘위기’가 운위되었고, 그때마다 위기에 대응하는 담론들이 등장해 왔죠.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유행인 지금도 그런 경향은 계속되고 있는데, ‘위기’는 이제 비단 인문학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란 생각을 해 봅니다. 여기 모인 분들은 아직 30-40대의 소장 인문학자들로서, 제도 안팎으로 활발히 활동중이신 분들인데, 그만큼 인문학과 현실에 대한 예리한 체감과 주장이 다양하게 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현실과 인문학을 함께 성찰의 무대에 올려놓기 전에, 먼저 공유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의 위기’에 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할까요?
이현우 : 90년대부터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조교를 하고 막 강의를 시작할 무렵이어서 대학 밖의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대략 2000년대 중반 정도부터에요. 대학교수들의 인문학 위기 선언이 2006년도에 나왔는데, 그 즈음 서평이나 칼럼을 쓰면서 이 문제를 다룰 기회가 있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국의 인문학 위기 담론이나 유행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하나는 클레멘트 코스로 잘 알려진 얼 쇼리스입니다. 그의 책 <빈자를 위한 부>(Riches for the poor)가 <희망의 인문학>이란 제목으로 소개되고 저자가 방한하여 강연도 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면서 그의 문제의식이 널리 전파되었죠. 소위 ‘노숙자 인문학’은 그의 클레멘트 코스를 모델로 한 것이지요. 또 한 가지의 출처는 스티브 잡스가 말한 인문학입니다. 세계적인 성공신화를 이룬 IT업계의 창업자가 인문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자 모두가 인문학에 주목하게 되었어요. 잡스가 말한 건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로서의 인문학이었는데 ‘자유교양’이라고도 번역되는 말이죠. 요컨대 ‘쇼리스의 인문학’과 ‘잡스의 인문학’이 들어오면서 대학에서도, 대학 바깥에서도 적극적으로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생겼고, 그와 동시에 대학 밖에서는 ‘노숙자 인문학’, 그리고 대학 안에서는 ‘CEO 인문학’ 강좌들이 생겨났습니다.
대학 내 인문학 위기와는 별개로 대학 바깥에서는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고 많이 얘기되는데, 좀 과장된 면도 있고 오해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이란 말 자체가 남용되면서 빚어지는 오해도 문제이고요. 통상적으로는 ‘인문교양’ 정도를 뜻하는데, 이것을 ‘인문학’으로 통칭하는 바람에 빚어지는 문제 말이죠. 대학 바깥에서 일반 대중이 논어 강의를 듣는다거나 서양미술사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보다는 인문교양을 쌓는다는 의미죠. 그러나 이에 대해 ‘대중 인문학’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면 당장 ‘수준’ 문제가 제기됩니다. 대중의 구미에 맞추는 얄팍한 인문학과 본래의 인문학을 대조하면서 전자를 폄하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죠. 이런 구도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인문학 유행의 두 가지 원천을 이야기했는데, 그러한 유행 현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이미 한풀 꺾인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던 중에 다시 헬조선에서 인문학과 문과 전공에 대한 사회적 홀대와 비하현상이 불거지면서 인문학이 다시 호명된 것이 아닌가 싶고.
이현우 : 약간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지금 주제가 인문학이 현실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가고 있는데, 사실 이런 물음 자체에 대한 반성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에는 인문학이 인격화되어 있어요. 인문학이 주어인데, 실상 인문학이 실천한다, 행동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기만 해요.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주체의 문제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2~30대 대다수의 청년들에게는 헬조선이라는 것은 상당히 체감적인 현실이겠지만, 또한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문학도 마찬가지죠. 인문학자들 전체가 그렇게 ‘헬조선’이라고 느끼는 것인가? 그건 아니죠. 대학 혹은 학계에는 헬조선의 수혜자도 많습니다. 내부적으로 계급화 내지 계층화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막연하게 “인문학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그러한 내부적인 문제가 안 보이게 가리는 것일 수 있어요.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다 다르죠. 인문학 전공 학생이 무엇을 할 것인지, 인문학 강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인문학 전임교수가 무엇을 할 것인지 같을 수 있나요? 할 수 있는 것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모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하게 ‘인문학’이라고 다 묶을 수는 없는 거죠. 또 시혜적 관점도 문제입니다. 인문학자로서 우리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대중을 위해서 뭔가 해주는 것 같은 구도 말이죠. ‘대중인문학’의 이미지 자체가 그렇게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줄까, 어떻게 인도할까, 그런 식이에요. 그런 구도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주체의 문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주체는 개인 연구자뿐만 아니라 HK사업단과 같은 공적 단체도 될 수 있습니다. 인문학 사업단이 헬조선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령 그런 질문을 해야 할 겁니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말고 아주 구체적인 차원으로 내려가서 인문학 사업단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이 우리가 인문학자로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주체로서, 혹은 다른 자격으로 하는 것인지 그런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죠.
이현우 : 대학 밖에서 인문학 전공자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했을 때 저는 좀 단순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 경우 대중강의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는데, 주로 하는 것이 책에 대한 강의예요. 책을 같이 읽으면서 거기서 무언가 재미를 찾고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이 현재 할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당장 그분들의 삶을 바꾼다거나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변화를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분들이 책을 계속 읽게끔 동기를 부여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게끔 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누적된다면 작게라도 어떤 변화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당장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직은 역부족이어서 그렇다는 생각을 합니다.
많이 알려진 대로, 우리의 성인 독서량이 OECD국가 중 최저 수준으로 나옵니다. 가장 책을 안 읽는 국민이라는 것인데 그것과 헬조선이 어떤 상관이 있을까 생각하게 돼요. 아직까지 인과적 관계가 규명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 읽는 것은 충분히 해왔기 때문에 조금 읽게 되면 무언가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는 가져봅니다. 거기에 인문학자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고요.
손희정 : 실제로는 헬조선과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연계되어 있으나 그 사이에 한 단계 매개를 넣으면 더 분명해 질 것 같아요. 깊이있게 성찰하지 않고 넓고 얇게만 아는 인문학, 즉 읽지 않았어도 읽은 척해야만 하는 사회적 분위기 같은 거요.
이현우 : 하지만 ‘읽은 척’하는 게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적어도 일종의 자극을 받고 동기부여는 되니까요. 제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태도 중 하나가 대중 인문학에 대해서 폄하하는 태도입니다. 얄팍하게 포장된 지식으로 대중을 길들여놓기 때문에 오히려 인문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갖게끔 한다는 시각 말이죠. 하지만 결과는 더 길게 두고 볼 일이라고 생각해요. 얄팍한 책이 계기가 되어서 더 깊이 있는 독서나 공부로 나아갈 수도 있고 거기서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건 예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라면 어떻게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게끔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태도가 필요하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수십 만명의 독자가 인문서에 관심을 갖는 이례적인 독서 붐이 일었지만, 학계의 반응은 주로 냉소적이었죠.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단찮은 책이며 그런 유행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식이었거든요. 물론 그렇게 되기가 쉬운 현상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아쉬웠던 건 우리가 한 손 거들어서 그것을 조금 더 좋은 쪽으로 이끌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은 없었다는 거지요.
최진석 : 대담을 시작한지 벌써 두 시간 정도 지났군요. 인문학의 위기에서부터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 만일 대응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대해 난상토론하듯 떠들었는데, 나중에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좀 난감하네요. 자, 우리는 어떤 응답들을 내놓았나요?(웃음). 즉각적인 답안을 바라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갑갑한 심정 너머로 무언가 시원함을 느끼셨다면, 우리가 인문학에 대해 여전히 무언가 기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대책없는 낙관주의는 경계해야겠으나, 지금 여기서 던져지고 공유된 문제의식들을 더 예리하게 다듬고, 현실 속에서 응답할 수 있는 지점들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용기있게 타진하고 실천하는 기회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아쉽지만, 우리의 토론은 여기서 일단 마감하겠습니다. 활자를 통해 이 대담을 읽게 될 독자들과의 소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지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6. 04.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