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의 서스펜스'는 프랑스의 영화이론가이자 시나리오작가에 감독 겸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파스칼 보니체르(보니체)의 '고전적인' 히치콕론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의 제1부 제1장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보니체르의 책으론 그밖에 <비가시 영역: 영화적 리얼리즘에 관하여>(정주, 2001)와 <영화와 회화>(동문선, 2003)가 더 번역돼 있지만, 전자는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이고 후자는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는 책이다(나는 정신건강을 위해서 국역본에 아직 손대고 있지 않다). 나는 영역본이 있나 찾아봤었지만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해서 아무리 저명한 이론가라고 해도 보니체르는 당분간 '그림의 떡'이다. 이 '히치콕 서스펜스'에 대한 나의 간단한 정리는 역시 재작년 6월초에 작성된 것이며, 몇 개의 이미지들을 첨가해 창고에 넣어둔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내가 주로 참조했던) 러시아어본에는 간략하게 요약만 돼 있고, 빠져 있다. 해서,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미심쩍은 부분들까지 다 카바하면서 읽지는 못했다(나중에 시간이 되면 영어본과 대조해서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보니체르는 단적으로 히치콕이 발명해낸 서스펜스를 작동시키는 대상이 ‘응시’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응시는 이 책 전편에 걸쳐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이기도 하다. 보니체르의 글이, 시기적으로도 앞서지만, 책의 머리에 놓여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32쪽. “마치 말라르메가 보들레르의 시를 ‘속이 비게 파냈다’고 주장했던 만큼이나 히치콕은 그리피스에게서 물려받은 영화적 추격을 ‘파냈던’ 것으로 보일 것이다.” 원문이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 ‘속이 비게 파냈다’라는 건 속된 말로 (어떤 가능성의) ‘끝장을 보다’란 뜻이겠다. ‘영화적 추격’은 물론 ‘영화에서의 추격장면’이다. 그러니까 히치콕이 이 영화적 ‘추격장면’ 찍기의 달인이란 얘기이다. 문제는 병렬적인 두 문장에서 ‘주장하다’와 ‘보일 것이다’란 두 술어가 잘 호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때문에, 번역문은 우리말 문장으로선 부자연스럽다. 문법적으로 ‘주장하다’에 호응하는 것은 ‘파내다’이지만, 이 경우는 의미상의 호응관계가 맞지 않게 된다. 매끄럽게 하려면, ‘주장했던’을 빼야 한다. 그래야, “마치 말라르메가 파낸 것만큼 히치콕도 파낸 것으로 보일 것이다”란 핵심-전언이 전달될 수 있다. 이런 문장들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번역의 통사론은 무너진다.

그리고 33쪽. 응시는 영화적 촬영술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것은 1895년 영화의 탄생 이후 스펙터클에 사로잡혀 있던 초기 영화들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었다. “불안과 응시의 편집은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던 촬영술적 에덴 동산의 결실들로 보인다.” 여기서 ‘결실들’은 성경에서의 선악과를 가리키므로 ‘열매들’이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이런 건 사소하지만, 하나 둘 쌓이게 되면, 미숙함의 상징이 된다. 아무튼 전환점은 1915-20년에 찾아오게 되는바, 그리피스에 의해서 비로소 클로즈업과 편집이 도입되며, 보니체르는 이것을 영화사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하면, 토키, 즉 유성영화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그는 주장하는데, 동의할 만하다.



히치콕이 등장하는 건 이러한 배경에서인바(그리피스라는 배경. 사진은 D.W. 그리피스), 그는 영화적 의미작용에서의 이러한 혁명으로부터 가장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낸 감독(filmmaker)이기 때문이다(물론 거기에 대응할 만한 영화사적 인물로 러시아에는 에이젠슈테인이 있다. 그러니까 히치콕과 에이젠슈테인은 그리피스의 두 적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후의 분석은 왜 보니체르의 일급의 영화이론가인가를 잘 보여준다.

영화상의 혁명 또한 “다른 모든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그리고 죽음의 무대화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는 통찰! “죽음, 살인, 범죄의 무게는 오직 응시의 근접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 바, “히치콕이 자신의 영화에서 해낸 모든 것은 무대화와 관련하여, 범죄가 폭로해낸 응시 기능의 최선의 가능한 사용법을 만들어낸 것이다.”(36쪽) 보니체르는 뤼미에르의 한 초기 단편 영화(라기보다는 스케치)를 히치콕이라면 어떻게 찍었을까를 상상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한다. 아래 사진은 뤼미에르 형제.


즉, 공원에서 한 병사가 유모차를 끌고가는 소녀(혹은 유모)를 유혹하는 뤼미에르의 스케치가 히치콕식의 극(fiction)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스케치 ‘앞에다’ 그저 하나의 범죄를 삽입하기만 하면 된다. 가령, 이 유모가 어떤 아이를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든가 하는 장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뤼미에르의 이 ‘한가한’ 스케치는, 그 자체로는 동일한 시퀀스라 하더라도, 돌연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로 탈바꿈하게 된다.

즉 “우리가 유모차 속에서 옹알이하는 아기를 볼 때, 병사가 유모를 유혹하려고 주위를 돌며 익살을 부리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유모가 바보같이 웃으며 엉덩이를 흔들 때 강렬한 공포감이 그 장면의 명백한 의미를 훼손시키고 그 모든 기호들을 왜곡시킨다.”(38쪽) 여기서 ‘명백한 의미’는 아마도 ‘manifest meaning’을 옮긴 듯한데, 보다 적절한 역어는 ‘명시적 의미’이며, 기호학에서는 외연적 의미(denotated meaning), 혹은 디노테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장면의 ‘지시적 의미’이며, 일차적인 의미작용의 결과이다(즉, 옹알거리는구나, 익살을 부리는구나, 흔들어대는구나).

그런데, 우리가 이 유모의 ‘전과’를 알고 있을 경우, 이 시퀀스의 이러한 ‘순진함’은 상실된다. 이 장면에 대한 ‘현실감(impression of reality)’은 이차적 수준, 즉 내포(connotation)의 수준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38쪽) 여기서 ‘내포’적 의미는 외연적 의미의 짝인바, 이차적 의미작용의 결과를 말한다. 즉, “이 아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란 명시적/외연적 의미가 “이 사랑스러운 아기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라는 내포적/함축적 의미로 전환되는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것은 유모의 ‘전과’를 알고 있는,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관객의 ‘응시’이다. 그런 앎이 여기서는 하나의 허구적인 드라마를 구성하는 오점(stain), 혹은 얼룩(blot)으로서 기능하며, 영화의 자연스런 질서를 탈구시킨다. 가장 히치콕다운 영화들은 그러한 오점들을 둘러싸고 조직된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응시를 유발하는 오점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구체적인 사례들은 39쪽 참조) 이 “오점을-만드는-대상이란 문자 그대로 말하면 자연을 거스르는 대상이다.”(41쪽)



40쪽에서 보니체르는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에서의 예를 들고 있다.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캐플런을 만나기로 했던 케리 그랜트가 자신을 타겟으로 공격하는 비행기와 대면하게 되는 장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나중에 더 가까이 다가와 점점 커지다가 이윽고 프레임 전체를 채우게 될 이 멀리 있는 작고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이형(anomaly)에 직면한 케리 그랜트를 남기고.”란 번역에서 ‘anomaly’는 ‘이형’(이건 생물학에서 쓰는 말이다)이 아니라 ‘이상한 물체’라고 번역하는 게 낫겠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건 파종용 비행기이다.

보니체르의 요점을 공식화하면, <히치콕=뤼미에르+오점>이 된다. 이 공식에서 오점은 응시를 불러오게 되는바, <히치콕=뤼메에르+응시>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 응시가 히치콕의 서스펜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히치콕의 서스펜스의 본질은 에로티시즘이며 히치콕의 편집은 에로틱한 편집이다.”(45쪽) 이후에 보니체르는 여러 쪽에 걸쳐서 히치콕 영화에서의 커플들을 분석해나가며, 심지어 히치콕 자신의 청혼 경험까지 들춰낸다.

그에게서 시간의 ‘주관적 연장’, “시간의 점성은 에로티시즘과 결부되어 있으며 사건을 유예시키고 필연적으로 교란하는 결정 불가능성 속에서 성애적이게 된 시간과 관련이 있다.”(51쪽)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서스펜스란 공중으로 던져진 동전이 떨어지기까지의 ‘성애적인 유예’라는 것. “히치콕의 터치는 기껏해야 패러디나 패스티시화할 수 있을 뿐이며, 필연적으로 모방불가능”(52쪽)한 이유가 히치콕의 이 ‘에로티시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상이 내가 읽은 '히치콕의 서스펜스'이다.

06.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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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3-12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치콕의 오점, 응시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왜 갑자기 에로티시즘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고리를 모르겠네요.

로쟈 2006-03-1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역본만을 참조해서 정리했던 글인데, 자세한 건 영어본과 대조해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