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 17일부터 열흘 동안 서울 낙원동 필름포럼(구 허리우드 극장)에서는 히치콕의 대표작 9편을 상영하는 ‘알프레드 히치콕 걸작선’을 연다고 한다. 상영작 9편은 <39계단>(1935), <레베카>(1940), <의혹>(1941), <오명>(1946), <이창>(1954), <다이얼 M을 돌려라>(1954),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프렌지>(1972) 등이다. 최근에 패트릭 맥길리건의 가장 방대한 분량의 히치콕 평전 <히치콕>(을유문화사, 2006)도 번역된 차에 개최되는 영화제라서 타이밍도 잘 맞는다.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에 대한 자세한 읽기를 시도한바 있는데, 상기된 김에 다시 정리해둔다. 일단은 책의 3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지젝의 <사이코> 읽기에 관해서.

지젝의 <사이코> 읽기. 일단 지젝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이 영화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첫번째는 욕조에서 살해당하는 메리언(자넷 리) 이야기이고(<사이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두번째는 그 이후의 이야기, 즉 노먼의 이야기이다(지젝은 메리언과 노먼이라는 두 이름 사이의 거울-관계를 지적하고도 있다). 그런데, 메리언의 살해 이후 “다이제시스적 공간을 지배하는 인물과의 동일화는 불가능해” 지는바, 그 이유는 무엇인가가 지젝이 던지는 첫번째 질문이다.



“메리언의 세계는 현대 미국의 일상생활의 세계인 반면 노먼의 세계는 그 야간의 이면”(330쪽)이다. “이 두 세계의 관계는 표면과 심층, 현실과 환상 등의 단순한 대립을 피해”가며, “그것에 알맞은 유일한 지형학은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지형학’이 ‘topology’의 번역이라면(그럴 거 같은데), 그건 ‘위상학’으로 번역돼야 한다. ‘뫼비우스의 띠’가 지형학에서 나올 거 같지는 않으므로. 이후 333쪽까지가 지젝의 논의 핵심을 구성한다. 즉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집약돼 있다. 그 아이디어란, 메리언의 세계로부터 노먼의 세계로의 이행을 “히스테리적인 욕망의 기입으로부터 정신병적 충동의 기입”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메리언과 노먼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의 두 ‘표면’에 붙인 ‘라캉적인 이름’이 각각 ‘아버지-의-이름’과 ‘어머니의 욕망’이다.

정리하자면, “메리언은 ‘아버지’의 기호 아래,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써 구성된 상징적 욕망의 기호 아래 서 있으며 노먼은 아직은 부성적 ‘법’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어머니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전-상징적 충동)에 걸려 있다. 히스테리적 여성(메리언)의 입장은 ‘아버지의 이름’에 말을 거는 반면 정신병 환자(노먼)는 어머니의 욕망에 달라붙어 있다. 요컨대 메리언에서 노먼으로의 이행은 ‘욕망’의 기입으로부터 ‘충동’의 기입으로의 ‘퇴행’을 축약한다.”(331-2쪽) 더 압축하면, ‘욕망으로부터 충동으로’가 되겠다(욕망과 충동의 차이에 대한 설명은 332쪽 참조). 여기서 충동의 세계는 상징적 욕망과는 대조적으로, ‘불가능한-실재’에 속하며, 따라서 동일화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정신병적 충동에 수감되어 있는 한, 욕망에의 접근이 그에게서 거부되는 한 노먼은 동일화를 교묘하게 피해 달아난다.” 이것이 지젝이 던진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제 남은 건 이러한 주장을 논증해나가는 것이다. 지젝은 먼저 <사이코>에서의 두 살인장면, 즉 “메리언의 샤워-살해와 아보가스트 형사의 계단-살육의 대조”를 통해서, 욕망과 충동의 대립을 입증하고자 한다. ‘아보가스트의 살인’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서, 그는 이 장면이 “기대된 것과 기대되지 않은 것의 정치한 변증법, 요컨대 (관객의) 욕망의 변증법”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가 <사이코>의 ‘뫼비우스의 띠’적 구조에 대한 내용이다.



이어지는 ‘뒤집힌 아리스토파네스’ 절부터는 욕망과 충동의 대립이라는 기본 테마의 변주이다. 제일 먼저, 지젝은 이 대립에 투입되어 있는 ‘역사적 긴장’을 지적한다(이 ‘긴장’을 러시아어본은 ‘충돌’ 혹은 ‘모순’으로 번역하고 있다). 어떤 긴장인가? “다시 말해 두 살인의 건축적 현장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첫번째 것은 익명적인 미국의 근대성을 축도하는 모텔에서 발생하는 반면, 두번째 것은 미국의 전통을 축도하는 고딕 주택에서 발생한다.” 이 대목의 번역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나라면, ‘살인의 건축적 현장’은 ‘살인 장소’로, ‘중립적’은 ‘중성적’으로, ‘고딕 주택’은 ‘고딕 저택’으로 옮기고 싶다. 실제로 이 저택은 미국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기찻길 옆집>, 1925, 왼쪽사진)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도 좀 된다).



이 두 공간을 왔다갔다 하는 노먼은 그래서 “전통과 근대 간의 일종의 불가능한 ‘매개자’로 이해”되며, 그의 ‘정신분열’은 상징적 의미 또한 갖게 된다(그런 의미에서 <사이코>는 모더니즘의 영화이다). 지젝의 지적대로, “포스트모던한 <사이코>에서라면 모텔 자체가 낡은 주택을 모방하여 재건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낡은 주택’은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고풍(古風)스런 저택’ 정도로 옮겨야 한다. ‘낡은 주택’을 모방한 모텔에 누가 묵겠는가?

“결과적으로 욕망과 충동의 바로 그 이중성은 근대 사회와 전통 사회의 리비도적 상관물로 이해될 수 있다. 전통 사회의 모체는 ‘충동’의, 동일성 주의에서의 순환운동의 모체인 반면, 근대사회에서는 선형적 진보가 반복적 순환을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는다. 이처럼 끝없는 진보를 촉진하는 욕망의 환유적 대상-원인을 구현하는 것은 다름아닌 돈이다.”(337쪽) 지젝의 핵심적인 주장이면서, 좋은 통찰이기에 그대로 옮겨보았다. “<사이코>는 따라서 두 이질적인 부분의 일종의 이종교배이다.”

이후에 지젝은 두 이야기가 각기 완결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데, 메리언의 살해장면으로 끝나는 첫번째 이야기처럼 이야기의 종결/완결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것은 “만연한 미국적 이데올로기와는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정말로 결의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이 단연코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339쪽) 즉, 메리언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이면이자 그 ‘실재’라고 할 만하다. 그러한 ‘실재’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즉 관객을) 직접 쳐다보는 노먼의 ‘응시’이다. 그것은 모든 동일화를 사전에 배제해버리는 ‘절대적 타자성’을 체현하고 있는 응시이다.



342쪽부터 지젝은 다시 이 ‘응시’에 대해서 자세하게 해명해간다. “굳어진 응시는 실재의 오점, 즉 상징적 현실의 틀로부터 ‘두드러지는’ 하나의 세부, 요컨대 ‘상징적인 것을 능가하는 실재적인 것의 트라우마적 잉여’를 고립시킨다.”(343쪽) 여기서 ‘굳어진 응시’라는 건 어떤 충격이나 놀람 때문에 굳어진 응시를 말한다. 그러한 응시는 충격/놀람을 산출한 대상, 아주 작은 세부를 고립시켜낸다(그러니까 그러한 세부를 ‘발견’한다). 그런데, ‘상징적인 것을 능가하는 실재적인 것’이란 표현은 약간 부적절하다. 우리말의 ‘능가’라는 건 어떤 ‘능력’과 상관적인 말인데, 그런 ‘능력’은 이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징적인 것’은 (역자에 따라 주관이 다를 수는 있지만) 보통 ‘상징계’라고 옮기며 ‘실재적인 것’은 ‘실재’라고 옮기는 게 관행이 돼가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다시 옮기면, “상징계를 침범해오는 실재의 트라우마적 잉여” 정도가 되겠다(‘침범’이란 역어를 고른 것은 잠시후에 설명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맞추어서, “상징적 현실의 틀로부터 ‘두드러지는’ 하나의 세부”라는 것도 “상징적 현실의 틀을 넘어서는 하나의 세부” 혹은 “상징적 현실의 틀에서 삐져나오는 하나의 세부” 정도로 옮기는 게 이해하기에 쉬워 보인다. 그러한 세부를 상징계로부터 분리시켜내는 응시 자체가 ‘대상a’이다.

344쪽의 ‘지배-기표(master-signifier)’도 요즘은 보통 ‘주인-기표’라고 옮긴다. 이 주인-기표는 정의상 ‘비어있으며’ “‘주인’은 단지 우연히 이 빈 장소를 점유하는 자이다.” 영화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에서 케리 그랜트가 잠시 점유하게 되는, 오인받게 되는 ‘조지 케플란’이 바로 그러한 기표이다. 이러한 ‘주인-기표’나 ‘대상 a’의 또 다른 양상으로 지젝은 히치콕 영화에서의 ‘프레임과 그 외부의 변증법’을 든다. 그 전형적인 예는 <사이코>의 샤워-살인이나 <새>에서의 새들의 공격이다.

이 살인이나 공격은 모두 “외부로부터, 더 정확히는 다이제시스적 현실과 우리의 ‘진짜 현실’의 중간에 있는 공간으로부터, 다이제시스적 현실에 침입하는 일종의 오점으로 경험된다.” 이 인용에서의 ‘침입’이 바로 앞에서의 ‘침범’과 같은 의미를 갖는 말이다. 실제로 <새>에서 “새들은 종종 이후의 쇼트에 포함되거나 심지어는 만화에서처럼 직접적으로 그려”졌다(이 문장에서 ‘이후의’는 오역일 것이다. ‘나중에’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까 공격해오는 새떼들의 쇼트를 따로 찍어서 ‘나중에’ 합성하거나, 아니면 촬영한 쇼트에 새떼를 직접 그려 넣었다는 얘기일 테니까).



일반적으로 “스크린 위에 기표가 이처럼 환영-처럼 출현하는 것은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서의 징후의 논리”를 따른다.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봉쇄된 것은 실재적인 것 속에서 귀환한다”는 정신병에 대한 라캉의 공식을 조금 바꾼 것이다(국역본에서처럼 ‘전도’시킨 건 아니다). 즉, “징후의 경우에 현실(=상징계)로부터 배제된 것은 스크린 위에 의미작용(‘의미화작용’)의 흔적으로서 다시 나타”난다(347쪽). 이것이 프로이트식의 ‘대표-표상(Vorstellungs-Reprasentanz)’이다(‘대표-표상’은 ‘대표적 표상’이란 뜻이 아니다. ‘대리-표상’이란 뜻으로 이해하면 쉽다. ‘대표-표상’이란 역어가 관행이 아니라면 ‘대리-표상’이라 옮기고 싶을 정도이다).

“이와는 반대로 <새>와 <사이코>의 장면들에서 오점의 침입은 정신병적 자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병적 자연’? 우리말로 이상한 건(오점들!), 물론 대부분이 오역이다. 아마도 ‘psychotic nature’를 옮겼을 거 같은데, ‘정신병적 성격’이라고 해야 말이 된다. 즉, “(<새>와 <사이코>에서는) 상징화되지 않은 것이 트라우마적 대상-오점으로 위장하여 귀환”한다.

그러니까, 일단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두 귀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1)실재의 오점의 귀환(이건 “말이 실패하는” 즉, 언표 불가능한 것의 귀환이다)과 (2)기표의 귀환(이건 재현적 현실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귀환이다). 이 두 귀환의 비대칭은 “현실과 실재의 분열에 의존한다.” 여기서 ‘현실’과 ‘실재’는 아마도 각각 ‘reality’(=상징계)와 ‘the Real’(=실재)의 번역일 것이다. 이때의 ‘현실’은 “상징적으로 구조화된 표상들의 장이며 ‘실재’의 상징적 ‘고상화’의 성과이다.”(348쪽) ‘성과’보다는 ‘결과’가 낫겠다. 즉 우리의 ‘현실’은 (길들여지지 않은) ‘실재’를 상징적으로 고상화함으로써 얻어진다.

비유컨대, ‘실재’가 ‘야수’라면, ‘현실’은 ‘가축’이다. 우리는 ‘야수’들과 같이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그걸 길들여야만 한다(해서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가축적’이다). 그런 길들임이 ‘승화’이다. “우리가 ‘승화’라고 부르는 것의 성공은 ‘기표의 결핍’을 ‘결핍의 기표’로 (…) 전도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 야수들에게 무슨 이름(=기표)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메리’라거나 ‘부시’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결핍의 기표’를 부여/할당함으로써, 그들을 상징계적 현실로 포섭하는 것이다. 즉 아무런 기표도 없는 ‘맹목적인 희열(brute enjoyment)’(이 대목에선 ‘야성적 향락’이라고 옮기고 싶다)을 ‘텅 빈 기표’로 대체하는 것이 관건이다(‘메리’나 ‘부시’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그저 아무 집 없는 강아지한테나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이다).

349쪽은 지젝의 장기가 발휘되는 대목이다. 그는 이처럼 ‘오점’으로부터 ‘대표-표상’으로의 이행/대체의 사례로 다신교로부터 유대교(‘유태교’?)로의 이행을 든다. 다신교적 신들은 ‘실재’에 속하며, 그들의 영역은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의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신들에게 접근할 유일한 길이 신성한 난교축제들의 엑스터시를 통해서인 이유이다.”(이 ‘난교축제들의 엑스터시’가 바로 ‘주이상스’인데, 이걸 ‘향유’라고 옮기는 건 그 엑스터시를 ‘고상화’하는 것이고, ‘가축화’하는 것이다. '향유'로 옮기는 게 적절한 레비나스의 '주이상스'처럼. 내가 라캉의 '주이상스'의 역어로 ‘향락’을 고집하는 이유이다. <히치콕>의 역자는 ‘희열’을 선호한다.)

 

 

 

 

반대로 유대교에서는 ‘신’의 영역에서, “향락(‘희열’)이 정화되어 있다.” 예배에서의 ‘경건한 향락’을 생각해 보라. 간혹 ‘벅찬 감동’이라고도 표현하는.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예배와는 또 다른) 한국식 부흥성회는 ‘유대교적’이라기보다는 ‘다신교적’이다. 거기엔 엑스터시(향락)가 정화되어 있다기보다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부흥성회는 예배라는 상징계의 틀을 넘어서는/초과하는 ‘실재’의 오점이라 할 만하다(할렐루야!).

다시 돌아와서, 요컨대, “(유대교에서) ‘신’은 순수한 상징으로서, 비어 있어야만 하며, 그 어떤 실제 주체도 그것을 채우도록 허락되지 않는 하나의 ‘이름’으로 바뀐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역자는 중대한 오역을 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적인 ‘이름’을 신적인 ‘사물’로 이런 식으로 대체하는 것은 금지의 자체-의-반영-을 수반한다.” 무엇이 잘못 됐는가? 바로 앞에서 ‘신’(=사물)에서 ‘이름’으로 이행/대체된다고 해놓고, 다음 문장에서는 그걸 거꾸로 말하고 있다. 이런 것이 오역의 ‘실재’ 혹은 파이-오역이다. 다시 옮기면, “다시 말해, 신적인 ‘사물’을 신적인 ‘이름’으로 이런 식으로 대체하는 것에는 자체-반영적인 금지가 수반된다.”

‘자체-반영적인 금지’가 무슨 뜻인가는 이어지는 두 문장에서 설명된다. 즉 다신교에서는 ‘이름’ 자체가 금지돼 있었는데, 유대교에서는 이름을 붙이는 게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어떤 실정적(‘실증적’) 내용을 채워넣는 것이 금지된다. 어떻든, 다신교에서의 ‘금지’가 유대교에도 계승되는 것인데, 이게 ‘자체-반영적인 금지’란 말이 뜻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역의 연속타. “히치콕 영화들에서 거대한 조각상들, 즉 화석화된 희열의 이러한 기념비들은 어떻게 오늘날 ‘이름’을 ‘사물’로 대체함이 그 격렬함(edge)을 상실해 있는가를, 어떻게 ‘신들’이 실재로 귀의하고 있는가를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350쪽)

반복하지만, ‘이름’을 ‘사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이름’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히치콕 영화에서의 거대한 조각상들은 다신교적인 형상인바, ‘신적-사물’의 ‘이름’으로의 대체가, 즉 다신교에서 유대교-일신교로의 이행이 그 예리함(edge)을, 즉 지배력을 오늘날 상실하고 있다는 걸, 즉 (다신교적) ‘신들’이 ‘실재’로 귀환하고(‘귀의’가 아니다)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이에 대한 각주39) 또한 오역인 것은 당연하다. “그것의 피상적인 지표는 아마도 소위 ‘신세대 의식’에도 아랑곳없는 유태-크리스챤적 태도의 퇴각일 것이다.”

역자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런 ‘피상적인’ 번역은 역자에 대한 신뢰를 잠식한다. 일단 ‘유태-크리스챤적 태도’는 ‘유대-기독교적 태도’라고 해두자. ‘신세대 의식’이란 ‘뉴에이적 의식’의 맥거핀이다. 이전에 다른 자리에서도 지적한바 있는데, 여기서의 ‘New Age’는 ‘신시대’도 아니고, ‘신세대’도 아니다. 우리말로는 그냥 ‘뉴에이지’라고 옮겨야 한다. 종교에서는 일종의 현대판 신비주의를 가리킨다(신비주의는 다신교적이다). 그리고 과학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이 프리초프 카프라를 원조격으로 하는 ‘신과학’이다. 즉 현대과학과 동양사상의 만남 어쩌고저쩌고 하는. “아랑곳없는”도 문맥상 적합하지 않다. 지젝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뉴에이지적 의식’ 즉 다신교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유대-기독교적 태도(=일신교)이기 때문이다. 즉, 유대교적 일신교가 현대사회에선 무너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신들’의 귀환!).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도는 <다신교→일신교→다신교>이다. 의역하면, “그 피상적인 지표는 아마도 ‘뉴에이적 의식’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주춤거리는 유대-기독교적 태도일 것이다.”

350쪽부터는 ‘내러티브의 종결과 그 소용돌이’란 절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소용돌이’는 'metamorphosis’의 번역 같은데, 그럴 경우 적절한 역어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절을 읽어나가면 알 수 있다. 일단 ‘내러티브의 종결과 그 변형’이라고 해두겠다. 거기에 감독 히치콕의 ‘환상’이 직접 언급돼 있다. 영화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즉 대뇌에 전기자극을 줌으로써 무매개적으로 관객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는 것이 그의 환상이다. 그는 영화라는 번거로운 작업을 통해서 그런 ‘대중의 감정 조작’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면, 영화는 그런 전기자극에 대응하는 번거로운 매개(체)이자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매개란 “다름 아닌 기표, 즉 상징적 질서”이며, “심리기제 내에서의 자신의 대표(=표상) 없이도 기능할 수 있을 이러한 충동의 꿈은 우리가 히치콕의 세계의 정신병적 중핵이라고 명명하고픈 어떤 것이다.”(351쪽) 참고로, 정신병적 세계란, 그러한 단속순환적이며 자기만족적인 충동의 세계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징적 질서 안에 머무는 한 관객과 히치콕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알레고리적이다.” 그리고 “이 알레고리적 영역은, 내러티브 공간을 ‘구부러뜨리는’ 요소를 수단으로 하여 다이제시스적 현실 자체에 각인되는(=기입되는) 한에서만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내러티브 종결’의 문제가 제기된다. “내러티브 종결은 대개 텍스트에 이데올로기를 각인시키는 것을 가리킨다.”(351쪽) 즉 내러티브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으로서의 종결은 그 내러티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과 발생할 수 없는 것을 윤곽짓는다.

352쪽 이하 ‘내러티브 종결’의 문제를 다룬 대목은 문학연구자의 입장에서도 흥미롭다. 지젝의 논의를 따라가보자. “‘왜 대단원이 다를 수 없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은, 비록 그것이 종결의 자명한 성격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나, 겉보기보다는 훨씬 전복적이지 못하다. 그 질문은 그 자체를 자기의 대립물로 (잘못)이해하는 것을 내재적 조건으로 하는 ‘내러티브 종결’에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작부터가 좀 막힌다. 먼저, ‘간결하게 정리하다’란 말은 문맥과 맞지 않는다. 그 질문은 종결의 자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 의문이 보기만큼 전복적이지는 않다는 게 이 문장의 줄거리이다.

다시 옮기면, “‘왜 대단원(=종결)이 다를 수는 없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은, 비록 종결의 자명성을 낯설게 만들지만, 겉보기보다는 훨씬 덜 전복적이다. 그 질문은 ‘내러티브 종결’에만 관련되는바, 그 종결의 내적 조건은 그것이 그 자체(=종결)를 종결이 아닌 것으로 (잘못)알고 있다는 데 있다.” 여전히 좀 모호한가? 지젝이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이런 종결이 아닐 수도 있다는 환상, 종결이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는 환상이다. 즉, 여기에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종결이 아니라 ‘개방’의 환영, 즉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일어날 수 있었으리라는 환영, 어떻게 세계의 바로 그 텍스처가 사건들의 다른 경로를 사전에 배제하는가를 무시하는 환영이다.”(352쪽)

여기서도 ‘환영’ 대신에 ‘환상’이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이데올로기는 환영이 아니라 환상이니까). 그리고 ‘개방의 환영’은 ‘개방성의 환상’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니까 종결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게 아니라, 다른 종결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환상)이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은 ‘세계의 텍스처’가 사건들의 다른 경로, 즉 다른 방식의 종결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텍스처’도 ‘세계의 텍스트적 구성’쯤으로 옮기고 싶다. ‘텍스처’란 말은 (‘텍스트’와는 달리) 아직은 우리말 ‘번역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하자면, “이데올로기 최고의 유혹은 근간을 이루는 구조적 필연성을 비가시적이게 만듦으로써 ‘개방된’ 듯한 환영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지만, 다시 옮기면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의 마력은 그 기저의 구조적 필연성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개방성’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그에 따라 “우리가 내러티브 공간 내에서 움직일 때 필연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이러한 공간이 ‘구부러지는’ 방식이다.”(352쪽) 이 ‘구부러짐’이 정신분석학에서의 ‘억압’에 대응할 것이다. 그리고, “‘억압’의 사실은 궁극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의 공간, 즉 주체의 의미의 체계가 언제나 트라우마적 공백들에 의해 ‘구부러져’ 있다는 사실, 이 세계가 그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해지지 않은 채로 있어야만 하는 것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353쪽)이다.

참고로, 이러한 ‘구부러짐’을 사고한다는 점에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혹은 환상론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를 연상시키며,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상응한다(상대성 이론의 기하학적 바탕은 리만기하학이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지젝은 뉴턴적 절대시공간의 세계에 견줄 수 있는 데리다식의 ‘차연’론을 암묵적으로 비판하게 된다. 핵심은 “모든 편지(letter)는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이다(라캉의 것이면서 지젝이 반복하고 있는 테제이다). 구부러짐, 곧 곡률이 주어지지 않는 차연적 시공간에서는 “모든 편지는 제대로 도착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비판한 것은 ‘도착에의 환상’, 커뮤니케이션의 환상이었다(그런 점에서 그 또한 ‘환상의 횡단’을 시도한다). 거꾸로 지젝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도착되지 않는다’는 환상이다. 모든 편지는 궁극적으로는 발신자인 주체 자신을 수신자로 하여 언제나 도착하며, 이미 도착해 있다. 즉, 지젝은 라캉을 경유하여 데리다란 (필수적인) 문턱을 넘어서고자 한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내러티브 종결은 환상의 논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환상-장면은 내러티브 공간을 구부리는 바로 그 해석할 수 없는 X를 상연”(354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X는 궁극적으로 주체의 출생 그리고/혹은 죽음이며 따라서 환상-대상은 주체를 그/그녀 자신의 잉태나 죽음의 목격자로 만드는 그 불가능한 응시”에 다름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환상은 (1) ‘주체의 잉태 장면’(부모의 성교)과 (2) ‘주체의 죽음 장면’의 변주이다(이하의 지젝의 ‘통찰’은 기존의 ‘중성적’ 서사학(Narratology)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줄 수 있는 주요한 암시들을 포함하고 있다. 로트만, 리쾨르 등과의 ‘접속’도 고려해 볼 만하다).

“내러티브 공간의 ‘굴곡’은 주체가 결코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살고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생은 다른 곳에!) “주체의 삶은 ‘아직은-아닌’의 양상 속에서 미끄러져 간다. 주체의 삶은 X, 즉 온전한 의미에서의 ‘사건’(그것이 ‘정글 속의 야수’의 도약이었기 때문에 헨리 제임스의 이름인)에 대한 기대 그리고/혹은 기억으로서 구조화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 말이다.” 괄호를 빼고 번역을 일부 수정했다. 괄호 안의 내용은 물론 ‘우리말’이 안되니까 오역이다. '헨리 제임스의 이름'은 '헨리 제임스가 이름붙인바'란 뜻이겠다.

 

 

 

 

요컨대, 우리의 삶은 X, 즉 진정한 삶(정말로 사는 삶)을 준비하는 데 소진된다. “하지만 우리가 마침내 이 X에 접근할 때 그것은 그 자신(=삶)의 대립물임이, 즉 죽음임이 드러난다. 진정한 탄생의 순간은 죽음과 일치한다.” 이에 대한 각주42)는 작년에 세상 뜬 스티븐 제이 굴드의 <판다의 엄지>(번역돼 있다)에 나오는 한 벌레 얘기이다(언젠가 얘기한 것 같은데, “굴드의 모든 책!”이다. 이 분야에서 그런 저자들은 여럿 된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다니얼 데넷 등등). 이 내용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무슨 내용인가? “어머니의 육체 내부에, 즉 그 자신의 탄생 전에 남성은 그의 ‘자매들’과 교접하여 수태시킨 다음 죽으며 죽은 채로 탄생한다. 다시 말해 그는 ‘살아있는 육체’를 건너뛰며 태아의 상태로부터 시체의 상태로 넘어간다. 시체로 태어난 태아라는 이 한계-경우는 기표의 ‘빗금친’ 주체의 지위에 대한 가장 가까운 생물학적 상관물이다.”

소개된 사례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오역이다. 무엇이 이상한가? 동물도, 하다못해 벌레도 인간과 다 똑같다는 역자의 신념이 반영된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맥에서 ‘어머니’나 ‘남성’ 등은 우리말의 관례가 아니다. ‘어미’, ‘수컷’ 등으로 번역돼야 한다(나머지도 거기에 준해서). 그리고 ‘한계-경우’는 ‘limit-case’를 옮긴 듯한데, ‘극단적인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limit’가 ‘극단’이나 ‘극한’이란 의미를 갖는 다른 곳에서도 자동적으로 ‘한계’라고 번역돼 있다).

정리하자면, “주체의 존재는 동시적인 견인과 반발의 지점, 그 과잉근접성이 주체의 소멸을 야기하는 지점인 트라우마적 X와의 관계 속에서 구조화되는, (무엇을) 향하는 존재이다. 죽음을-향하는-존재는 그러므로 그 내재적 구조에 있어서 오직 언어-의-존재와 함께만 가능하다. 구부러진 공간은 언제나 상징적 공간이다.”(355쪽) 첫문장을 다시 옮기면, “주체란 트라우마적 X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구조화되는 ‘지향적 존재’(being-towards)이다. 이 X와 한편으론 인력과 척력의 관계에 놓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X에 대한 과잉 근접은 주체의 소멸을 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향하는 존재’(being-towards-death)는 하이데거의 용어이다. 이 대목에선 지젝이 라캉에 몰입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그의 철학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내러티브 종결’은 그러므로 주체가 일련의 우연성들에 의미를 소급해서 부여하며 그/그녀의 상징적 운명을 가정하는, 즉 그/그녀의 장소를 상징적 내러티브의 텍스처 속에서 인식하는 수단인 ‘주체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나는 김에 한마디 덧붙이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위한 표기인 ‘he/she’를 (다른 번역서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매번 우리말로 ‘그/그녀’라고 옮겨주는 건 읽기에 번거롭다(마치 엑스트라가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거나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말은 대명사 표현을 선호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로 옮겨질 수 있는 대목에서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러시아어본에 근거해서) 다시 옮기면, “그러므로 ‘내러티브 종결’은 ‘주체화’의 다른 이름인바, 이 주체화를 통해서 주체는 일련의 우연들에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상징적 의미를 수용하고, 상징적 내러티브의 텍스트적 구성 속에서 자신의 자리(장소)를 인식하게 된다.”

자, 그렇다면, 이 ‘내러티브 종결’이 히치콕의 <사이코>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내러티브 공간의 일관성을 보장하는 이러한 규칙들을 직접 깨뜨리기보다는, 히치콕은 그 일관성의 그릇된 ‘개방성’의 유혹을 일소해버림으로써, 그러한 종결을 가시화함으로써 그 일관성을 전복한다. 그는 종결의 규칙들에 완전히 영합하는 듯 가장하지만(예컨대, <사이코>의 두 부분은 종결과 함께 끝난다), 종결의 표준적인 효과는 여전히 충족되지 않는다.”(그는 관습적인 종결을 따르지만 2% 부족하게 끝낸다는 것!) 왜냐고? “내러티브의 내적 논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스토리가 이미 끝나 있을 때 우연한 실재의 잉여(메리언의 무의미한 살해)가 부상하여 종결의 효과를 약화시키며, 또한 어머니의 정체성이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종적 설명은 그 대립물로 바뀌고 개인적 정체성의 개념 자체를 침식시키기 때문이다.”(356쪽)

최종적 설명이 그 대립물로 바뀐다는 말은, 그 설명(‘해명’)이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놓는다는 뜻이다(즉 그녀의 정체성이 이거다라고 밝혀놓으니까, 이번엔 ‘정체성’이란 것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 이때 히치콕이 사용하는 전략은 과잉 근접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낯익은 대상도 낯설게 보이는바(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 보면 자기 자신이 낯설어 보이듯이. 네가 나냐?), 그것이 독일어 ‘다스 운하림리헤(das Unheimliche)’에 해당하는 ‘섬뜩함’이다(<사이코>의 결말 장면!). “절대적 타자성이라는 금지된 영역에 우리가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 공간은 구부러”진다(357쪽). 그리고 “히치콕이 세계 전체는 카메라를 보는 ‘타자’의 응시로 축약되는 ‘절대적 타자성’과 관객의 시선 간의 이러한 공모에 기초해 있다.”

이 ‘절대적 타자성’이란 ‘주체화’ 즉 라캉이 일컬은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주체를 가리킨다. 이 주체는 상징적 계약(‘협정’)에 묶여있지 않기 때문에 ‘타자’의 응시와 동일한 주체이다. 지나가는 김에, 여기서 ‘타자’는 모두 대문자 Other를 번역한 것일 텐데(국역본에는 굵은 글씨로 표기돼 있다), 글자체만으로 소문자 타자(other)와 대문자 타자(Other)의 차이를 전달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그건 다른 번역본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아무런 주석도 없이. 나는 Other의 경우 ‘대타자’ 혹은 ‘큰타자’로 옮겨주는 것이 독자들을 더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절대적 타자성’은 “주체의 장소를 상징적 질서 내에 표시하면서 주체를 표상하는 기표가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 주체의 목구멍에 걸려서 상징적 질서로의 그/그녀의 통합을 방해하는 하나의 뼈이다.”(358쪽)



다시 반복: “(<사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노먼의 응시와 얼굴을 맞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때 직면하는 ‘비개인적’ 심연은 언어의 그물망에 아직은 포획되지 않은 주체의 바로 그 심연이다. 주체화에 저항하는 접근불가능한 ‘사물’, 모든 동일화의 이러한 실패의 지점은 궁극적으로 ‘주체 자신’인 것이다.”(359쪽) 그러니까 여기서의 대립구도는 ‘주체’ 대 ‘주체화’(상징계로 통합된 주체)이다. 359-361쪽에서 지젝은 이 대립구도에 근거해서 <살인!>에서의 성차(性差)와 연기의 문제를 읽어내며, 이를 <사이코>와 대비시킨다.



<살인!>은 주인공 페인은 남성이지만 남성을 ‘연기’함으로써, 성차에 대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킨다. 즉 “남자의 세계는 스스로를 수행적인 것의 세계로, 지배-기표의 세계로, ‘본래 행위를 구성하는 말’의 세계로, 즉 여성적 연극성을 극복한 것처럼 가장하고 그것을 평가절하하는 말의 세계로 제시하지만 이러한 극복은 본래가 최상의 연극적 제스처이다.” 가령, “현재 관건인 것은 물(物) 자체이지 수사학적인 싸구려 시시껄렁한 농담이 아니다.”라는, 수사학을 포기하고 폄하하는 듯한 남성적 담론이야말로, 고단수의 ‘수사학’이라는 것이다(‘과묵한 수사학’이 ‘수다스런 수사학’보다 한 수 위다!)

여기서 thing itself를 옮긴 걸로 보이는 ‘물 자체’는 적절하지 않다. ‘물 자체’라는 건 구어적인 일상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수사학이 할당된) 여자들에게 하는 얘기 스타일: “우린 사태의 본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야, 이건 공허한 수사학이 아니라구!”라고 할 때의 ‘사태의 본질’이나 ‘문제의 핵심’ 정도가 이 경우 thing itself에 대응한다. 요컨대, 남자가 여자보다 더 고단수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이건 연기가 아냐”라는 연기!).

그렇다면, 페인의 자살이 갖는 메시지: “거기에 페인의 자살의, 이러한 ‘시적이고 가부장적인 정의의 격발’의 트라우마적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를 드러냄으로써 페인은 존 경이 협잡꾼임을 폭로한다.”(360쪽) 그런데, 메시지가 잘못 됐다. ‘시적이고 가부장적인 정의의 격발’이라니? 가부장적인 것이 시적인가? 거듭 말하지만, 말이 안되는 건 거의 대부분이 오역이다. 그리고 말이 안되는 듯하면 사전을 다시 찾아봐야 한다. ‘가부장적’이란 건 ‘patriarchal’의 번역인 듯한데, 거기엔 ‘존경할 만한’이란 뜻이 있다(러시아어로는 ‘순박한’이란 뜻도 있다). 그러니까, “시적이며 존경할 만한 정의의 발작(‘격발’)” 정도의 뜻으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그 충격적인 진정성, 행위의 존엄성은 존 경의 행동을 단순한 수행으로, 그의 담론을 단순한 유사물(semblance)로 바꾸어놓는다.” 이 또한 유사-번역이다. ‘행동’을 ‘수행’으로 바꾸어놓는다? ‘수행’은 ‘performance’의 역어일 텐데, 여기선 ‘연기’란 뜻이다. 그리고 ‘그의 담론’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행동’에 대응하는 거니까). ‘유사물’이 아니라 ‘허위’ 혹은 ‘위선’이다(꾸며대는 것이니까). Semblance가 무슨 대단한 단어라도 되는 양 매번 ‘유사물’이라고 번역해줄 필요는 없다. 중요하지 않은 단어에 불필요하게 원어를 병기해 놓는 건 엑스트라들의 과장된 연기만큼이나(기형도의 표현에 따르면, ‘잘못 찍힌 방점’들 만큼이나) 보기에 흉하다. 다시 옮기면, “그 행위의 충격적인 진정성과 존엄성은 존 경의 행동을 연기로, 그의 말들을 순전히 위선적인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다음 문단: “<살인!>과 <사이코> 간의 변화된 역사적 성운의 결정적인 지표는 ‘주인’으로부터 그의 ‘진실’인 ‘히스테리환자’로의 전이이다.” 여기서도 ‘역사적 성운’이란 번역은 유감스럽다.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역사적 상황’으로 충분하다(하긴 ‘히치콕의 세계’(universe of Hitchcock?)를 ‘히치콕의 우주’로 번역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역자에게 감사할 일이긴 하다). 해서 “변화된 역사적 성운의 결정적인 지표”는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중요한(‘결정적인’) 지표”로 바꿔 옮기고 싶다. 이 ‘지표’에 대한 얘기가 361쪽까지이다. 361쪽의 ‘행위로의 빠스(passage a l’acte)’는 고육지책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번역이다. ‘빠스’가 무슨 말인지?(불어로는 ‘파사주’이고, 영어로는 ‘패스’ 혹은 ‘패시지’일텐데!) 요즘은 ‘행위로의 이행’이라고 보통 옮기고 있다.

362쪽부터는 ‘사물의 응시’ 절이다. 여기서 지젝은 ‘주체화를 넘어서는 주체’와 관련하여 형사 아보가스트의 살해장면, 즉 ‘아보가스트 쇼트’에 대해서 분석한다. 영화의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면서 읽으면 훨씬 이해가 빠를 듯하다. 이 분석의 결론: “아보가스트의 살해장면 전체의 내적 역동성은 히스테리에서 도착으로 가는 <사이코>의 궤도를 축약한다.”(364쪽) 여기서 ‘역동성’은 (쇼트의) ‘전개과정’으로 이해하는 게 편하다. 그럼, 히스테리는 뭐고 도착은 뭔가? “히스테리는 타자의 욕망에 대한 주체의 욕망의 동일화로 정의된다. 반면 도착은 대상-사물 자체의 ‘불가능한’ 응시와의 동일화를 포함한다.”

히치콕은 아보가스트 쇼트를 ‘신의 시점’으로 찍었는데(364쪽의 스틸사진), 그것은 감독이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지 않고도 관객들을 무지 속에 두려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지젝은 그 전제를 더 밀고 나간다. “만약 우리가 신의 시점을 취함으로써 무지함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어떤 근본적인 무지가, 분명히 상징적 기계(=인간)의 맹목적인 운행을 축도하게 되는 신 자신의 지위에 영속해야만(=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히치콕의) 신은 우리 살아있는 인간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신은 죽은 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366쪽) 상징이 사물들의 살해인 한에서(당신은 ‘사과’라는 상징-기호를 먹을 수 없다. 거기엔 ‘사과’가 부재하기 때문에, 즉 ‘죽어있기’ 때문에), ‘사물들의 질서’는 곧 ‘상징적 질서’이며, ‘아버지의 이름’으로서의 신(=상징적 권위)은 삶의 실체(life-substance)에 관해서, 희열(=향락)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즉 “상징적 질서(대타자)와 희열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가 없”다(367쪽). 각주60)에 “여성적 희열과 무지 간의 내밀한 연결에 대한 그 유명한 논문”에서, ‘논문’은 ‘테제’의 오역이다. 맥거핀들은 도처에 있다.



367쪽 하단에서 “<사이코>로 되돌아가보면, ‘오점’(어머니)은 따라서 눈먼 신의 길어진 손으로서, 세계에 대한 신의 무의미한 개입으로서 갑자기 떠오른다.”라는 건 무슨 뜻일까? ‘갑자기 떠오른다’는 ‘(갑작스레) 일격을 가한다’의 오역 같다. 아보가스트 쇼트 얘기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오점(어머니로 가정되는)’의 손은 마치 눈먼 신의 길어진 손이 이 세계에 무의미하게 개입하는 것처럼, 아보가스트를 난자한다(365쪽의 스틸사진).

368-9쪽에서 프레드 윌튼 <낯선 이가 전화할 때>란 영화 얘기를 잠깐 하고 나서 지젝은 <사이코>의 특징을 지목한다. “<사이코>의 결정적인 특징은 히치콕이 주체화로의 이러한 단계를 히치콕이 성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물의 ‘주관적인’ 응시 속을 던져질 때 그 사물은 비록 ‘주체가 되’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주체화하지는 (…) 않는다.”(369쪽) ‘성취하지 못한다’란 표현 때문에, 이 대목이 히치콕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점이, 즉 ‘주체화되지 않는 주체’를 다룬다는 점이, 그런 응시와의 동일시를 다룬다는 점이 히치콕의 ‘문제성’이며 거장다운 면모이기 때문이다.

372-5쪽에서도 아보가스트 쇼트에 대한 분석이다(지젝은 이 쇼트가 <사이코>의 정수일뿐만 아니라, 어쩌면 히치콕의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쇼트일 거라고 간주한다). 이 전체 신은 ‘신의 시점’이라는 객관적 쇼트와 그에 따르는 시점 쇼트(살해자의 시점)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의 의미: “이러한 중립적이고-자유로운 응시로부터 그것을 뒤따르는 ‘사물’ 자체의 응시로의 이러한 커트는 그러므로 그 순수성의 내재적인 전복이다. 즉 주체성으로의 퇴보가 아니라 주체성을 넘어선 주체의 차원으로의 진입이다.”(375쪽) ‘내재적인 전복’의 러시아어 번역은 ‘내파(內破)’이며, ‘퇴보’의 번역은 ‘합류’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이제 376쪽부터 마지막 절, ‘상호주관성의 붕괴’이다. 서두에서는 앞에서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번 읽어보면 된다. 요점은 ‘신의 시점’과 외설적 ‘사물’간의 공모관계가 단순한 상보관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일치라는 것.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들은 서로에 대한 이면처럼 보이지만, 서로 만나며 일치한다. 그러한 전제에서, 마지막 오해에 대한 해명: “<사이코>의 궁극적인 ‘비밀’, 노먼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이 축약하는 비밀은, 언어 등의 장벽 너머 인간의 불가해하고 형언할 수 없는 심층 위에 놓인 진부함의 새로운 판본에 해당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비밀은 이 ‘너머’가 본래 비어 있으며 그 어떤 실증적 내용도 결여한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는 어떠한 ‘영혼’의 심층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너머’는 응시 자체와 일치한다.”(378쪽)

그래서, 히치콕 영화들의 허위적인 ‘심층’에 대한 레이먼드 더냇의 아이러니적인 언급, “전함 뽀쫌낀 – 선체 없는 잠망경들의 선대(船隊)”는 틀린 말이 아니다. ‘뽀쫌낀’은 출시된 제목대로 ‘포템킨’이라고 하자. 아마도 이 비평가가 히치콕 영화에서의 심층(=심오한 메시지?)의 부재를 ‘<전함 포템킨>에서의 선체(=본체)는 없이 잠망경만 둥둥 떠있는 함대’ 같다고 비아냥거린 모양이다. 즉 ‘외관’만 있고, ‘실체’는 없지 않느냐는 것(혹은 있는 것 없이 폼만 잡는다는 것). 지젝은 뒤집어서 바로 그거! 라고 말한다. 즉, 외관이 바로 곧 실체라고. 해서 다음 문장, “이러한 묘사는 논박되기보다는 ‘사물 자체’로 치환되어야 한다.”는 역시 좀더 쉽게 번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술의 터무니없음을 반박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문제의 핵심’에 적용해야 한다.”(‘사물 자체(thing itself)’에 대한 의견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379쪽에서 지젝은 <사이코>를 근거로 하여,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현대철학자들의 공박(“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상호주관성의 일차성/우선성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을 방어해낸다: “암묵적인 대항-운동 속에서 <사이코>는 상호주관성에 선행하는 주체, 사물의 위상학적 역(逆)일 뿐인 순수한 응시의 심층 없는 공백의 지위를 지표한다.” 일단, ‘지표한다’는 ‘가리킨다’로 고쳐놓자. 그리고 ‘암묵적인 대항-운동’은 당연히 오역이거나 미숙한 번역이다(대항-운동?). “암묵적으로 (현대철학의 주장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즉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방향으로 간다는 뜻)” 정도의 뜻이다.

‘위상학적 역’은 ‘위상학적 이면’이다. 다시 옮기면, “암묵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사이코>는 상호주관성보다 선행하는 ‘주체의 지위’를 가리키며, ‘사물’의 위상학적 이면일 뿐인, 아무런 심층적 차원도 갖고 있지 않은 순수한 응시의 공백을 지시한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에서 “상호주관적 접근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중성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의 ‘중성화’는 ‘무력화’로 바뀌어야 한다.

요컨대, ‘라캉 못지 않게 데카르트적인’ 히치콕은 라캉과 쿵짝이 잘 맞는다. “그의 30년대 영화들로부터 <사이코>로의 히치콕의 행로는 그러므로 라캉의 행로와 평행을 달린다.” 그 얘기가 380쪽 절반까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데카르트적 면모가 히치콕으로 하여금 필름 누와르에서의 플래시백/보이스-오버에 거부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보이스-오버/플래시백의 ‘유언적 차원’을 빌어서 필름 누아르는 일관된 내러티브를 직조해내며, 이것은 “그것이 여전히 ‘타자’(상징적 질서)의 일관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382쪽) 따라서, 이 보이스-오버/플래시백과 ‘주관적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 “보이스-오버/플래시백과 주관적 카메라의 불연속성은 궁극적으로 상징적인 것(=상징계)과 실재적인 것(=실재) 간의 불연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연속성이 히치콕에게서보다 더 잘 언명되는 곳은 없다.”(384쪽)

“이러한 불연속성은 <사이코>에서 그 극단에 이른다. 결국 그 결과는 ‘진실-효과’를 초래하는 상호주관성의 공통 영역에 상이한 주관적 관점들을 위치시키는 것의 정반대가 된다.” 좀 쉽게 설명하면, A, B, C라는 상이한 주관적 관점이 있을 때, 이것들을 상호주관성의 공통영역에 나란히 놓으면, 즉 서로 입장 바꿔서 토론해 보라고 해 놓으면, 서로 치고 받고 하다가도 뭔가 합의가 도출된다. 이것이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행위’에서 산출되는 ‘진실-효과’이다(롤즈에 따르면 거기서 ‘정의’가 산출되기도 하고). 그런데, <사이코>의 경우엔 A(정신병 의사의 객관적, 공적 지식)와 B(정신병환자 노먼의 주관적 진실)가 결코 서로 합치/타협될 수 없는 상태로 남겨진다. 즉 여기서의 초점은 “히스테리적인 상호주관적 진실과 (노먼의) ‘어머니’의 최후의 독백 속에서 언표되는 정신병적 진실 간의 대립이다.” “후자가 결여하는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의 차원이며 노먼의 ‘진실’은 상호주관성의 장 속에 통합되지 않는다.”(385쪽) 즉 구제(=의미화) 불능이다!

해서, “<사이코>의 궁극적인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교훈은 그러므로 후기 자본주의에서 진리의 매개로서의 상호주관성이라는 장(場) 자체의 붕괴, 즉 전문지식과 정신병적인 ‘사적’ 진실이라는 양극단 속으로 그 상호주관성이 통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호주관적인 공통의 영역이 ‘전문지식’과 ‘사적 진실’이라는 양극으로 붕괴되었고, 이게 통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은 이 시대에,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무엇이며, 무얼 할 수 있는가? 지젝은 <양들의 침묵>에서의 한니발 렉터를 참조의 대상으로 불러낸다. 여기서 라캉적 (정신)분석가와 한니발 렉터의 관계는 칸트가 ‘역학적 숭고’라 부른바, ‘길들여지지 않는 대자연’과 ‘이성의 초감성적 이념(‘관념’)’ 사이의 관계에 대응한다.



하니발 렉터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희생자들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장의 일부를 먹기까지 한다.”(386쪽) 하지만, 그는 정신분석가의 행위의 진정한 차원을 포착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정신분석가도 똑같이 ‘먹지만’ 그가 먹는 건 우리 신체의 핵심으로서의 내장 따위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핵심, 대상a, ‘비밀스런 보물’로서의 ‘아갈마’이다. 그런 걸 먹어 치우는 걸 ‘환상의 횡단(la traverse du fantasme)’이라고 한다. ‘환영의 횡단’이라고 번역돼 있는데, 일반적으로 ‘환상의 횡단’이라고 옮긴다. 더불어 “우리의 근원의 환상을 겪음으로써”라고 설명돼 있는 건 좀 부족하다. ‘환상의 횡단’에 대한 설명인데, “우리의 원초적/근원적 환상의 극복”이라고 해야 한다. 즉, ‘횡단’이란 ‘극복’인데, ‘극복’이란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횡단’이란 용어를 쓰는 걸로 안다(‘횡단’은 회피나 거부가 아니라 대면과 직시를 뜻한다).

라캉은 대상a를 환상적인 ‘자아의 재료’라고 규정하는바, 그것은 ‘주체’라는 존재론적 공백에 한 ‘인물’의 존재론적 일관성과 충만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정신분석가가 먹어치우는 것은 바로 이 ‘재료’, ‘자아의 재료’이다. “너의 현존재를 먹어라!”라는 하이데거의 인유를 통해서 라캉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따라서 분석가의, 혹은 분석행위의 맥심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어쨌든 ‘먹어 치운다’는 점에서 한니발 렉터는 나름대로 매력을 갖고 있으며, 하지만 동시에 “라캉이 ‘주관적 궁핍’이라고 부르는 것의 절대한계에 도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그것은 우리가 분석가라는 관념에 관해 불길한 예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386쪽)

‘주관적 궁핍’은 ‘subjective destitution’의 번역 같은데, (객관적의 상대개념인) ‘주관적’보다는 ‘주체의’라고 하는 게 옳다(‘객관적 궁핍’의 상대어가 아니기 때문에). 즉, ‘주체의 궁핍’. 이건 우리의 ‘주체’가 텅 빈 형식임을 직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나는 말야, 이렇게 생각해.”라거나 “나는 이게 더 좋아.” 혹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할 때의 ‘나’라는 주체는 결코 무슨 ‘실체’가 아니라는 것.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걸 대면하고, 직시함으로써 ‘나’라는 환상을 횡단하는 것이 ‘주체의 궁핍’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흔히 쓰는 ‘궁핍’이란 역어도 적절하진 않다(‘궁핍’이란 단어에서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건 ‘가난’이다). 보다 정확한 건 ‘부재’이고 ‘공백’이기 때문이다. 지금 드는 생각으론 ‘주체의 공백’이 더 나은 번역 같다(‘destitution’은 무엇이 없거나 빠진 상태를 가리키며, ‘subjective’라고 수식어론 온 건 그 의미상 주어(‘무엇’)이다). 참고로, ‘주체의 결여’도 후보가 될 수 있지만, ‘주체성의 결여’란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부정적인 뉘앙스가 너무 강하다.

어쨌든 한니발 렉터는 그러한 ‘주체의 공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이 분석가라는 관념에 관해 ‘불길한’ 예감을 갖게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건 ‘omen’의 번역일까? 러시아어본만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렉터가 유사-분석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는 것은 그의 희생자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FBI 수사관인 클래리스 스탈링과의 관계에서이다. 즉, 그들의 관계는 (정신)분석적 상황을 흉내낸 것이다. ‘버팔로 빌’을 체포하도록 도와줄 테니까, 너의 근원적 환상(‘양들의 울음’)을 털어놓으라는 것. “렉터가 클래리스에게 제안했던 오해(quid pro que)는 그러므로 ‘만일 네가 나로 하여금 너의 현존재를 먹게 해준다면 나는 너를 돕겠다!’이다.”(387쪽) 여기서 ‘오해’는 말 그대로 ‘오해’이자 마지막으로 지적하는 오역이다. 라틴어 ‘quid pro que’는 내가 알기로 ‘무엇 대신에 무엇’이란 뜻인데, 그래서 오인/오해란 뜻도 갖지만, 여기서는 ‘거래’란 뜻이다(어떻게 ‘오해’를 제안할 수가 있는가?).



그런데, 이 ‘거래’의 제안은 정신분석가로서 렉터가 아직 이류라는 걸 입증한다. 정신분석에서는 분석가가 먹어주는 대가로 피분석자(=분석수행자)가 돈을 내기 때문이다(‘분석가’야말로 탁월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렉터가 일급이었다면, 스탈링의 근원적 환상을 ‘먹어 치우는’ 대가로 그녀를 도와줄 게 아니라, ‘먹어 치워주는’ 대가로 오히려 돈을 받았어야 했다. 담장에 페인트칠을 하게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먹은 톰 소여처럼(톰은 분석가적 재능이 있었던 셈이다!). 거기에 비하면, 내 돈 주고 책 사서 교정이나 하고 있는 건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 돈 주고 페인트칠 하다니!...

06. 03. 10 - 11.

P.S. 이 글은 당시의 현지사정상 국역본과 러시아어본만을 대조하며 읽은 결과이다. 지금은 영어본도 참조할 수 있지만, 이 글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보완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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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3-11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내용이지만 눈이 빠져라 읽었네요. subjectivity가 텅빈 실체라면 intersubjectivity 관계, 그 소통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유된 창문 너머로 나와 외부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내가 보는 사실과 너가 보는 사실이 공유 불능일때 불능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로쟈 2006-03-1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정리가 덜 된 글을 읽느라 고생하셨군요.^^ 선무당 수준으로 말하자면, 그 '불능'이 진리, 혹은 실재가 아닐까요?..

싸이런스 2006-03-12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년도 훨씬 지난 일인데... 알튀세르의 고독인가... 하는 책을 보다가,,, 절대고독의 수수께끼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저는 책 읽기를 때려쳤었는데요. 그 불능이 진리.. 실재라면 모든것을 후벼파고 남는 것이 나와 타자의 화해 불가능한 그 사이의 긴장이라면 그게 진리라면 타자와의 관계, 공동체의 삶, 그 사이에서의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너무 텅비어 있는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네요.

로쟈 2006-03-1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한트케의 대사대로라면, "나는 왜 나이고 너가 아닌가?"인데, 그 '조건' 자체에 허무가 내재한 건 아니겠죠. '신의 죽음'이 그렇듯이. 문제는 그러한 (견디기 어려운) 불가능성을 견딜 만한 어떤 것으로 대체하지 않는 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