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기사가 알파고에게 일승을 거두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장기'라는 게 불과 몇달일 수도 있다) 바둑 역시 체스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게 접수될 가능성이 높다. 바둑의 최고수는 인간이 아니라 알사범(알파고)이 될 거라는 얘기다. 인공지능이 대중적 관심사가 되면서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는데, 공통적인 건 앞으로 상당수의 직업이 인공지능이나 로봇에 의해 대체될 거라는 전망이다. 교육 현장에서 보자면 당장 아이들의 진로와 관련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단순하게는 창조적인 일일수록 로봇이나 인공지능과의 관계에서 비교우위를 유지할 거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발전속도로 볼 때 방심은 금물이다. 당장 좀더 '수학적인' 작곡 분야에서 컴퓨터가 인간 이상의 실력을 발휘할 날이 곧 오지 않을까. 문학은 어떨까. 인공지능이 쓴 시와 소설을 읽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우리 세대 안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몇 만권의 시집과 소설을 읽어치운 인공지능을 상상해보라!). 인공지능 대문호의 탄생? 인공지능 셰익스피어? 며칠 피곤한 와중에 이런 잡생각이 좀 들었다.

 

셰익스피어도 꼬투리가 된 건 요즘 강의를 하고 있어서인데(아마도 올해는 자주 그의 작품을 강의하게 될 듯싶다) 레퍼토리의 하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4주 강의라면 보통 4대 비극을 다루지만 5주 강의만 되어도 한 작품을 더 고를 경우 가장 평이하다 싶은, 그리고 가장 유명하다 싶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고르게 된다(판매량을 보니 <햄릿><맥베스><리어왕><로미오와 줄리엣><오셀로> 순이다, 알라딘에서는).

 

 

좀 특이하다 싶은 건 작품의 명성에 비해 생각만큼 번역본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것은 최종철판(민음사)이고, 김정환판(아침이슬)과 (최초의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자인) 김재남판(이건 몇 군데서 나왔는데, 해누리판이 최신판)을 곁들인다. 압도적으로 많이 읽힌다는 점에서 민음사판이 대표 판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막상 강의에서 다룰 때는 불만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역자가 운문 번역을 표방하면서 시 형식을 맞추는 데 너무 욕심을 내다 보니까 의미가 모호하거나 어색한 부분이 많아서다(게다가 역자의 한국어 감각이 상당히 독특하다).

 

 

때로는 좀 황당한 실수도 나온다.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의 1막 4장의 첫 대사는 로미오의 대사임에도 세계문학전집판에서는 벤볼리오의 대사로 처리되어 있다. 벤볼리오의 대사인 두번째 대사는 머큐쇼의 대사로 되어 있고. 이건 판본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착오다. 새로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4>(민음사, 2014)에는 바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근까지도 세계문학전집판에서는 수정이 안된 듯하다는 것이다(강의실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렇다). 내가 갖고 있는 건 16쇄(2013)다. 이런 착오가 역자의 부주의에 의한 것인지 편집교정 과정의 실수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또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붙은 하인들끼리의 시비는 캐풀렛의 조카 벤볼리오의 등장에..."(169쪽)라고 되어 있는 것도 좀 무심한 착오다. 로미오의 친구이기도 한 벤볼리오는 몬터규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두 집안이 원수 사이인 걸 생각하면 좀 심한 오류다.

 

번역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보통은 정답이 없는 해석상의 문제나 뉘앙스상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페이퍼의 제목으로도 삼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키스 장면을 보자. 둘의 첫 키스 장면이 1막 5장에 나오는데, 로미오가 짝사랑하는 여인 로잘린을 보기 위해 캐풀렛 가의 파티에 몰래 잠입해 들어갔다가 줄리엣에게 한눈에 반해서 수작을 거는 장면이기도 하다.

 

줄리엣: 성자상은 기도는 허락하나 움직이진 못해요.

로미오: 그렇다면 기도하는 동안에 움직이지 말아요.(그녀에게 키스한다) 이렇게 내 죄는 그대의 입술로 씻겼소.

줄리엣: 그렇다면 내 입술로 죄가 옮겨 왔군요.

로미오: 내 입술에서요? 오, 이 달콤한 범법 재촉! 내 죄를 돌려줘요. (그녀에게 다시 키스한다)

줄리엣: 키스를 배웠군요.

뭐가 문제인가? 줄리엣의 마지막 대사이다. "키스를 배웠군요."란 번역은 일단 주어가 모호하기에 불친절한 번역이다. 로미오가 연거푸 두 번 키스를 했기에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키스를 배웠다는 말인지, 키스를 능숙하게 하는 걸로 보아 로미오가 어디선가 키스를 배운 것 같다는 말인지 번역만으로는 알 수 없다. 원문은 'You kiss by the book'이다. 그러니 후자 쪽이고 사실 시제는 과거가 아닌 현재여야 맞다. 그런데 뜻은? 일단 전집판에서 역자는 "책에 적힌 키스네요."라고 수정해서 옮겼다. 말하자면 키스를 책에서 배운 대로 한다는 것이다. 키스 교본? 혹은 소설들?

 

한데 'by the book'이란 표현은 옥스포드판의 주석에 따를 때 'according to the rules'란 뜻이다. 그리고 그게 좀더 말이 된다. 줄리엣에게 키스하면서 로미오는 두번 다 어떤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속죄의 키스. 다른 한번은 그 죄를 다시 돌려받는 키스. 즉 키스하고 싶어서 키스한 게 아니고 특별한 이유에 따라 키스한 것처럼 둘러댄 것이다(이게 노련함인가?). 이것을 김정환판에서는 "입맞춤마다 이유가 있으시군요."라고 옮겼고, 김재남판은 "당신은 키스에도 이유를 붙이는군요."라고 옮겼다. 둘다 대동소이한데, 최종철판과는 다른 해석이다. 김재남판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줄리엣: 성자들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요. 비록 기도를 들어주는 일이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로미오: 그렇다면 내가 기도의 효험을 받는 동안 움직이지 마세요. 이렇게 당신의 입술로 내 입술에서 죄는 씻어지거든요.(키스한다.)

줄리엣: 그러면 나의 입술이 그 죄를 짊어지게 되요.

로미오: 내 입술에서 죄를 넘겨받는다? 오, 달콤한 질책이여! 나의 죄를 되돌려주세요.(키스한다.)

줄리엣: 당신은 키스에도 이유를 붙이는군요.

내가 읽기에 훨씬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대화도 좀더 자연스럽다(아무리 운율을 맞춘다지만 '범법 재촉!'이 뭔가?). 그리고 아무래도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한 키스는 책에서 배운 키스가 아니라 이유를 둘러댄 키스다. 두 주인공의 로맨틱한 키스를 기억하는 독자/관객이라면 최소한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사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나중에는 키스에도 인간은 필요가 없어질까? 아니면 키스할 때만 필요할까? 그것도 궁금해지는군...

 

16.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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