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재영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지젝의 많은 책들이 그간에 오역으로 훼손돼 있다는 건 더이상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닌데, 이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된 개정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류의 책이 대학교재로 지정돼 있다고 하니까 당혹스럽다. 역자서문에는 "여러 가지로 쉽게 생각했다가 번역의 어려움을 경험한 책"이라고 돼 있는데, 그 '어려움'을 왜 애꿎은 독자들까지 나눠가져야 하는지? "이번 번역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지젝의 종교에 대한 논의를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 번역본으로는 그 '앎'에 동참할 수 없으니 유감이다. 

복사해둔 영역본이 눈에 띄지 않아 예전에 몇 자 써둔 걸 바탕으로 당장은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시작부터 나오는 코미디 같은 오역이 '뉴 에이지(New Age)'를 '뉴 에이즈'(13쪽)로 옮긴 것이다(색인에 있는 '뉴 에이지' 항에 이 쪽수가 빠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알랭 바두'로 옮겼다. 다 그럴 수 있지만, 무지가 아니라면 역자가 최소한 부주의하거나 불성실하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냥 넘어갈 만한 페이지가 거의 없지만, 두어 대목만 보도록 한다(원서를 찾는 대로 마저 지적하겠다). 71쪽에서,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깡은 외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은 익살스럽게 꼬여 있는 끌로델Claudel의 쿠폰텐Coufontaine의 3부작을 언급하고 있다.” 원문은 "In his seminar on transference, Lacan refers to Claudel"s Coufontaine trilogy, in which Oedipal parricide is given a comical twist."(43)이다.

이 대목에서의 클로델은 아마도 작가인 폴 클로델일 것이다(조각가 카미유 크로델의 동생). 먼저, ‘라깡’이나 ‘끌로델’로 표기하고 있는 이 국역본이 ‘꾸퐁뗀’이라고 하지 않고 ‘쿠폰텐’이라 표기한 것부터가 서툴다. 그런데 결정적인 건, ‘Oedipal parricide’를 ‘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으로 번역한 것. 우리말에 ‘어버이’는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를 뜻한다. ‘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이라니? 그렇다면, 오이디푸스가 부모를 다 죽였단 말인가? 그럼 그는 누구와 동침을 했단 말인가?!

아주 사소한 사례인 듯싶지만, 역자가 정신분석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드러내준다. 하긴 이 문장에서 꼬여 있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문장 자체가 비문이다(‘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을 받는 ‘술어’가 없다).  다시 옮기면,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캉은 클로델의 <쿠퐁텐> 3부작을 언급하는바, 이 3부작에서 오이디푸스의 부친살해는 희극적으로 변형돼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스스로 예술작품의 숭고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기성의 콜라 병들의 줄 이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65쪽) 원문은 “No wonder, then, that in the work of Andy Warhol, the ready-made everyday object that found itself occupying the sublime Place of a work of art was none other than a row of Coke bottles.”(40)이다.

정말 의아하면서 신기한 것은 우리말 문장이 안 된다는 점이다!(그러니까 오역의 대부분은 대상언어에 대한 무지에서가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한다.) 여기서는 ‘아니었다’가 받는 주어가 빠져 있다. 그 주어가 “the ready-made everyday object”이고, “was none other than a row of Coke bottles”가 술어이다.

컴퓨터 작업 중 엉겨서 문장의 일부가 누락되지 않은 거라면, 이런 식의 비문은 (비록 흔하다 할지라도) 몰상식/몰염치의 산물이다. 성의 없는 번역서가 독자에 대한 무슨 ‘시혜’라도 되는 양 착각하면 안된다. 다시 옮기면,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예술작품의 숭고한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일상적인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다름 아닌 일렬로 늘어놓은 콜라병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번역은 놀랍다. 북한의 '김정일'을 지젝의 오기(아마도 'Kim Yong-il'로 표기한 듯)에 따라 '김영일'(59쪽)로 옮긴 것도 웃지 못할 코미디이다(색인에도 '김영일'이다). 김정일의 영어 표기는 'Kim Jong-il'(혹은 'Kim Jung-il')인데, 알다시피 'j'가 연자음일 경우 'y'와 호환된다. 지젝의 오기는 그래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리고 역자는 그걸 '충실하게' 옮긴 것이고. 역자가 지젝의 논의를 얼마나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더불어 역자의 다른 역서들에 대한 신뢰마저 다 무너뜨린다).

이 책의 표지에는 "종교의 본질은 우상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벗겨내는 데 있다."고 적혀 있다. 번역이라는 우상도 마찬가지겠다. 번역 비판의 본질은 이런 우상과 같은 번역을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벗겨내는 데 있다(그런 점에서 번역 비판은 '종교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우리 주위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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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르넬르 2010-01-1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나중에 읽으려고 했는데, 영문판을 봐야겠군요...그보다 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