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샵 참석차 2박 3일간 지방에 다녀왔다. KTX를 타고 대구에 내려가 팔공산에서 1박하고 경주 보문단지에서 2박을 한 후에 다시 KTX를 타고 올라왔다. 대구는 처음 내려가보는 것이었고, 경주는 11년만이었다. 그래봐야 별로 구경한 것이 없는지라 들러본 자취조차 벌써 지워졌겠다. 

 

직접 제 발로 걸어보지 않은 여정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보문단지의 경우도 4월의 벚꽃이 진해만큼 아름답다고 하는데, (물론 아직 이르긴 하지만) 그 눈부신 벚나무길을 걸어보지 않았으니 경주에 다녀왔다는 말도 삼가해야겠다. 그러니, 경주에 다녀왔지만 '생활'은 발견하지 못했다(다음엔 새마을호를 타봐야할까?). 그나마 우산을 챙겨가서 쫄딱 비를 맞지 않은 게 다행인 것인지?(어제 대구에는 비가 좀 내렸다.)

  

텍스트를 읽는 것 또한 그러하다. 직접 텍스트의 가로수길을 제 발로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저 KTX식 다이제스트로 대신한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읽었지만 읽은 것 같지 않은 책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에 포함되어야 한다. 나는 가급적 그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을 좀 줄여보고 싶다. 이런저런 텍스트들을 자세히 읽고자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텍스트의 발견'이 없다면, 읽기는 얼마나 단조롭고 무의미한가!).

그런 생각과 맞물려서 마침 생각이 나서 여기에 옮겨오는 건 고진의 텍스트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자세히 읽기이다. 2003년 1월에 쓴 것이니까 그 또한 벚꽃과는 인연이 없던 계절에 작성된 것이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먼지를 털어서 창고에 넣어둔다(나중에 좀 때깔을 내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읽기'에 부록으로 포함시킬 예정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과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텍스트는 세가지이다. 첫째는 우리말 번역서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 2002)에 실린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E1이라고 부르겠다)이고, 둘째는 박유하 교수의 번역으로 <세계의문학>(94년 겨울호?)에 실린 '언어와 정치'(E2라고 부르겠다)이며, 셋째는 박 교수의 글을 쿤데라(소조)님이 교정해서 올린 카페(비평고원) 자료실의 '내셔널리즘과 에끄리뛰르'(E3라고 부르겠다)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에 실린 비평문들 가운데 내가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이 바로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이다. 쿤데라님에 의하면, "이 글은 맨 처음 <비평공간> 92년 10월호에 발표되었다가, 93년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이란 책에 실리게 된다. 그러다 이 논문을 수정 보완한 <내셔널리즘과 에크리뛰르>이란 논문으로 95년, <인문학 담론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재발표된다. 이때 이 논문에 대한 데리다의 서설이 유명하다."(데리다의 텍스트는 http://www.pum.umontreal.ca/revues/surfaces/vol5/derrida.html을 참조할 수 있다). 

고진이 데리다에게서 많은 시사를 얻었다는 이 글에서 고진은 거꾸로 데리다의 몇몇 논점을 비판하고 있고, 데리다 또한 그 비판이 부적절함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기에 옆에서 지켜보기에 퍽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관전에 앞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은 문제의 텍스트를 확정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관람할 것인가를 확정하고, 자리 정리라도 해두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일이 필요한 것은 세 텍스트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오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에크리튀르'란 불어의 번역. 보통, 문자, 글말, 문어 등으로 번역되는데, E2에서 박교수는 '문장어'라는 말로도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적절한 번역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문장과 계열관계를 이루는 단어나 구, 문단 등을 떠올려 보라). 어쨌든 에크리튀르는 구어(입말)와 대비되어 쓰이고 있다. 고진의 첫 번째 논점은 음성중심주의가 서양의 경우에만 국한되지/한정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다(E1, 62쪽). 그런데, 이 논점은 좀 이상한 논점이다. 그것은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란 것이 서양 형이상학적 전통에 국한된다라는 전제에 대한 반박으로서 제기된 것일 텐데, 그러한 전제를 주장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신이 한번도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음을 자신의 반박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고진이 좀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데리다가 말하는 음성중심주의가 서양뿐만 아니라 (데리다가 미처 다루지 않은) 동양에서도 발견된다라고 해야 한다.

어쨌든 이 문제는 음성중심주의가 근대 내이션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고진의 두 번째 논점(사실 이것이 고진의 핵심적인 주장이자 우리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주제이다)과 함께 다음에 '메인-이벤트'를 다룰 때 다시 확인하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텍스트 비판'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E1과 E2/E3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문단의 배열은 사뭇 다르다(비교하는 작업마저 어지러울 지경이다). 고진 자신이 원텍스트를 수정한 듯한데, E2/E3가 <비평공간>(1992년 10월)에 발표된 걸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까 <유머로서의 유물론>(1993)에 실린 E1이 더 나중에 발표된 것이고, 따라서 수정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우리말 번역은 99년판을 옮긴 것이다(거기에 증보나 개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따라서 여기선 E1이 저자의 생각을 더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E1의 두 번째 대목(64쪽 이하)에서 고진은 데리다의 소쉬르 독해를 소개하고 그것의 불충분성 혹은 결함을 비판한다. E1의 역자는 differance(디페랑스)를 옮기지 않았고, E2에서는 그것을 '차연'이라, E3에서는 '차이'라 옮겼다. 물론 일반적인 역어는 '차연'이다. 고진의 논점은 데리다처럼 소쉬르를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문맥에서만 읽을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에서 배제한 것은, 그것이 음성보다 이차적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문자가, 배제될 수 없을 정도로 음성 언어에 침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E1, 65쪽)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에서 배제시킨 것은, 문자가 음성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문자에,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음성 언어가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E2, 108쪽/E3) 여기서 E1과 E2/E3의 내용이 상반되는데, 물론 E1이 논리적으로도, 그리고 문맥상으로도 맞는 말이다. E2의 경우 역자가 오역을 했거나, 아니면 그보다 가능성은 낮지만 고진 자신이 잘못 썼거나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제의 소쉬르 인용(내가 '문제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대목을 확인하기 위해서 반나절 이상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세 텍스트 모두 <언어학 서설>에서 인용한 걸로 돼 있는데, 이건 전부 오역이다. 왜냐하면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텍스트는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이기 때문이다. 그걸 일본에서는 <언어학 서설>로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말로 <언어학 서설>로 번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고진의 인용.

"언어와 문자. 이는 연대적인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입말만이 언어학의 대상인 것이다. 언어학의 시간 속으로의 분류는 오직 언어가 받아 씌어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제로 그것들은 문명의 어떤 단계와, 언어활동의 사용상 어떤 완성도의 단계를 각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말과 문자는 입말에 반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말과 입말의 혼동은 초기에 셀 수 없을 정도의, 유치한 잘못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E1)

이 대목에서 E2/E3는 '입말'을 '구어'로 '글말'을 '문장어'로 번역한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어(written language)/구어(spoken language)를 굳이 글말/입말로 번역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고('음성'이나 '문자' 같은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문어'를 '문장어'로 번역한 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문제의 인용을 우리말 <일반언어학 강의>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알다시피 <일반언어학 강의>는 소쉬르가 쓴 책이 아니라 그가 제네바 대학에서 세 차례 강의한 내용을 그의 제자들이 세 번째 강의를 중심으로 노트를 모아 편찬해낸 책이다. 그런데, E1에서 '<언어학 서설>1908-1909'라고 한 건, 1908-9년에 행해진 소쉬르의 두 번째 강의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말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 1990)과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의 핵심은 문어가 아닌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우리말 번역은 "언어적 물체는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후자 하나만으로써도 이 물체를 구성한다."(최승언 역, 35-6쪽)이다. 나는 밤중에 소쉬르 관련 책들을 쌓아놓고 뒤적이다가 이 대목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언어학의 대상'을 정말 황당하게도 '언어적 물체'라고 번역해놓고 있는 것이다! '숨어있는 오역찾기' 게임이 있다면 거의 골든벨 수준에 해당하는 오역이다.

90년 간행 이후에 여러 판을 찍은 책에서(요즘은 절판된 걸로 나오는데) 어떻게 이런 오역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차츰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2006년판이 12월에 새로 나왔다. 오역들이 수정됐는지는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요컨대, (나도 그랬지만) 우리말 번역 <일반언어학 강의>를 아무도 읽지 않은/않는 것이다! 지난주(2003년) 한겨레 책세상에선 김재기 교수가 <일반언어학 강의>를 권유하는 리뷰를 실은 바도 있지만, 이런 번역이라면 핵생들에게 권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물론 딱 이 부분만 어처구니없는 오역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 3학년만 돼도 이 정도의 오역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반언어학 강의>의 옛날 번역판을 도서관에서 찾았다. 오원교 역(형설출판사, 1973)에서 이와 관련된 대목은 "언어와 문자법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기호 체계다. 후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전자를 표기하는 일이다. 언어학의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말해진 낱말의 결합인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말해진 낱말만이 그것의 대상이다."(41쪽) 역시나 흡족한 번역은 아니지만, 최승언 역만큼의 오역은 아니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바스킨(W. Baskin)의 영역은 이렇다: "Language and writing are two distinct systems of signs; the second exists for the sole purpose of representing the first. The linguistic object is not both the written and the spoken forms of words; the spoken forms alone constitute the object."

나는 이어서 혹시 두 번째 강의에 대한 번역은 없을까 하고 찾아봤는데, 다행히 도서관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두 번째 강의, 1908-1909'에 관한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Eisuke Komatsu(예스케 고마츠?) 교토대 교수와 G. Wolf 교수가 편집한 불영 대역본이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강의의 발췌역이 작고한 김방한 교수의 <소쉬르>(민음사, 1998)에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해당 부분에 대한 김교수의 번역은 이렇다: "언어의 위치를 정하고 분류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을까? 시간 속에서 언어의 분류가 가능한 것은 언어가 쓰여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초기의 언어학이 범한 그 수많은 유치한 과오는 쓰여진 언어와 말하는 언어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는 언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206-7쪽)

이 인용부분은 불영대역본과 일치한다. 즉 고진이 인용한 부분과 비슷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의아하게도 똑같지는 않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언어와 문자. 이는 연대적인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것들은 문명의 어떤 단계와, 언어활동의 사용상 어떤 완성도의 단계를 각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말과 문자는 입말에 반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부분들은 내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글말과 문자의 입말에 대한 반작용 운운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왜 불(영)어 원전에도 없는 내용이 일역본에는 들어가 있을까?

고진이 인용한 <일반언어학 강의>에 대해서 나로선 그 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문제는 일단 미루어두기로 한다. 대신에 인용문을 쿤데라님이 다시 번역해 주셨는데, 조금 이해가 용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명료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쿤데라님의 번역: "언어와 문자. 이것은 흔히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때에 따라선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다. 통시적인 언어학적 분류는 언어가 쓰여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해선 안 된다. 실제로 문자에는 문명의 단계와, 언어활동에서 있어 사용상 완성도 단계가 각인되어 있으며, 문어와 문자는 구어에 대해 반작용한다. 하지만, 문어과 구어의 혼동은 초기에 수많은 유치한 잘못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처음에 언어라고 번역된 건 불어의 '랑그'(=언어)일 것이다. 알다시피 소쉬르는 언어활동으로서의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구분하고 랑그만을 언어학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랑그가 언어란 뜻이니까 언어가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말은 아주 상식적이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언어라고 할 때 그것을 '쓰여진 말'과 동일시하는 바, 소쉬르는 거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참고로 E2/E3의 경우 인용문의 '문장어' 옆의 원어 병기가 모두 잘못됐다. 'langue ecrite'를 E2는 'langue ercite'로 잘못 표기했고, E3는 'langue ereite'로 잘못 타이핑했다. 다시 읽어본 결과 E3는 E2의 '내이션'을 전부 '국민'으로 통일한 것과 각주가 미주로 돌려진 것 말고는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이후엔 E1과 E2만을 비교하도록 하겠다.)

요컨대 랑그(언어)는 다시 문어와 구어로 나뉘는 바,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고 소쉬르는 확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데리다는 소쉬르의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며, 고진은 음성(중심)주의는 그런 식의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문맥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문맥에서 이해할 때 보다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E1이나 E2 모두 영어로 'historical linguistics'에 해당하는 것을 '역사적 언어학'이라고 번역하는데, 내 생각엔 '역사언어학'이라고 옮겨야 한다('역사적 언어학'이란 말은 보지 못했다). 소쉬르가 공시언어학을 제창하면서 의식했던 것은 당시 언어학계를 풍미했던 '역사-비교 언어학'이고, 이러한 학풍(지금은 언어학의 한 분야가 됐지만)을 우리 언어학계에서는 관행적으로 '역사언어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것을 일본(학계)에서는 '역사적 언어학(歷史的 言語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말이 나온 김에 E1 번역에서 이런 관점에서 불만스런 부분 몇 곳을 지적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런 데이터 없이는 왜 민족지학자가 결코 재정(裁定)을 내릴 수 없었을까가 질문되고 있습니다."(E1, 68쪽)에서 '재정'이란 말은 (내 감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이거나 일본어이다. 그것을 E2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민족지학자는 왜 이러한 자료 없이는 결코, 판단을 내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의문시되고 있습니다."(120쪽)라고 하여 '재정'을 '판단'으로 옮겼는데, 우리말로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E1에서는 '재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이라고 각주를 달았는데, 그렇게 거창하게/거추장스럽게 처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E1은 "언어학자가 **어라고 동정(同定)하면"이라고 옮겼는데(이건 사실 실사는 놔두고 토씨만 옮기는 격이다), 이때의 '동정'은 한국어가 아니라 거의 100% 일본어이다. 그것은 마치 "언어학자가 **어라고 디파인(define)하면"이라고 옮기는 것과 같다(이런 게 독자를 우롱하는 일이란 걸 역자들은 알 필요가 있다). 다행히 E2에서는 "언어학자가 **어라고 규정하면"이라고 옮기고 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자. E1에서 "나치스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양기(揚棄) 출현으로 적중했던 것이다"(70쪽)라고 옮긴 부분. 제대로 교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인데, 원래대로라면 "나치스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양기(揚棄))의 출현으로 적중했던 것이다"일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양기'라는 일본어이다. 떨칠 양(揚)에다 버릴 기(棄)자를 쓴 걸로 미루어 짐작할 도리밖에 없는데, E2의 역자는 그것을 지양(止揚)이라고 제대로 옮겼다: "나치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지양)에서 적중한 것이다."(122쪽) 지양은 물론 헤겔의 개념인데, 그것을 일어로는 '양기'라고 옮기는 모양이다.

여하튼 이런 몇 가지 사례를 놓고 볼 때, E1의 역자의 일어실력이란 게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덧붙여 불만스러운 것은 각주 문제. E1의 경우 각주가 원주인지 역주인지가 밝혀져 있지 않고(모두 역주인가?), E2에는 붙어 있는 원주가 빠져 있다(고진이 뺀 것인가?).

다시 원래의 문맥으로 돌아와서, 고진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글은 소쉬르의 <제네바 대학 취임강연>이다. 이걸 E1의 역자는 '쥬네브 대학'이라고 옮겼다. 사실 국내의 소쉬르 학자들도 불어인 '쥬네브'(혹은 주네브)라고 옮기는 수가 많은데, (무)의식적으로 티내는 치레에 불과해 보인다. 프랑스 파리를 영어식으로 '패리스'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E1에는 내용이 빠져 있지만(66쪽의 각주로 처리돼 있다), 이 강의는 E2에 의하면 마에다 히데키(前田秀樹)가 번역/주석한 것이다(마에다의 저작은 <침묵하는 소쉬르>이다).

 

 

 

 

일단 감탄스러운 건,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일본의 소쉬르학 수준이고(이 취임강연을 도서관 등지에서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궁금한 건 고진의 소쉬르론이 얼만큼 독창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그가 일본의 소쉬르학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 내가 알기에, 그리고 내가 읽은 소쉬르 입문서 등에서 소쉬르 언어학에 관한 정치적 해석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대개는 기호학의 창시자로서의 소쉬르 조명으로 채워져 있다). 여담이지만, 최근엔 동경대 시리즈 <지의 논리>(경당, 1996)에서 소쉬르와 동시대 화가 파울 클레를 비교하는 글을 읽었는데, 역시나 계발적이었다(덕분에 클레의 책들을 사고 있다!). 일본 지식인들이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다 그런 베이스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진은 그 취임강연을 근거로 소쉬르의 음성주의를 마치 <라쇼몽>에서처럼 상식과는 다르게 재구성한다. 그 주요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다. "역사언어학에서는 문화=문명과 음성언어가 동일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거기에서는 외적인 것의 우연적인 소산(이것도 '산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이 마치 '내적'인 연속성인 것처럼 상정된다. 언어학은 언어 외적인 것, 또는 '외적 언어학'의 결과를 언어의 법칙으로 취급해 왔다... 따라서 소쉬르가 '내적 언어학'에 구애되는(E2는 '천착하는'으로 옮겼다) 것은 '외적'인 것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적'인 것의 소산을 내면화하고 있는 언어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쉬르가 언어학의 대상을 어디까지든 음성언어에 한정하는 것은, 그가 음성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언어학이 지닌 음성중심주의의 기만을 폭로하기 위해서이다."(E1, 66-67쪽/ E2, 110-1쪽)



소쉬르가 보기에 문자화된 음성("역사언어학자가 말하는 음성은 이미 문자이다"), 즉 에크리튀르의 외부성으로서의 음성은 "넓은 의미의 정치적 제관계"를 의미하며, 소쉬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정치성을 내면화시킴으로써 (마치 없는 것처럼) 소거해버리는/소멸시켜버리는 언어학이다. 그렇다면, 소쉬르를 음성(중성)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데리다의 태도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물론 데리다는 이에 대해 변호한다). 고진이 보기에 (흔히 내적 언어학이라 불리는) 소쉬르의 언어학이야말로 대단히 정치적이며("역사언어학에 대한 소쉬르의 비판에는, 분명히 역사언어학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한 비판이 있다." 70쪽), 소쉬르야말로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자인 것이다...

06.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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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6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농담도.^^

paby 2006-02-16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말"과 "입말"은 (한자어를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어", "문어"가 좋지 않은 번역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번역어들이 아닐까 싶군요. "구어"와 "문어"는 대부분의 경우 표현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음성언어냐 문자언어냐를 구별해서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요. 그래서 구어로 쓰여진 소설이 있을 수 있고, 문어로 이야기하는 (좀 이상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요. 역자는 아마도, "글말"과 "입말"은 잘 사용되지 않는 말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문장어"는 혹시 "문자어"의 오타가 아니었을까요?)

곰집 2006-02-16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일한 텍스트를 읽는 다양한 방법을 로쟈님을 통해 "실제로" 그 흐름을 확인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로쟈 2006-02-1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by님/ '동정'이나 '양기' 같은 일어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역자가 '입말'/'글말'에 대해서 그렇게 고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문장어'는 반복해서 쓰고 있는 걸로 보아 오타 같지는 않지만, 현재 텍스트를 갖고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습니다...

earthmt 2020-02-16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isuke Komatsu(예스케 고마츠?), 는 小松英輔(현행 일본어 표기법에 따르면, 고마쓰 에이스케)인 듯합니다.
http://webcatplus.nii.ac.jp/webcatplus/details/creator/25324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