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에서 펴내는 월간 소식지 미르(313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올해가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이어서 여러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는데, 국립극장에서 2월말에 NT Live(공연 실황을 녹화하여 상영하는 작품)로 <햄릿>과 <코리올라누스> 두 작품을 공연한다(http://www.ntok.go.kr/ 참조). 이에 맞춰 셰익스피어 비극의 현재성에 초점을 두고 쓴 글이다.  

 

 

 

미르(16년 2월호) 현재진행형 셰익스피어 패러다임

 

세계문학의 대명사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비극에 대해서 무얼 더 말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얼 더 보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간추려 말하는 것 정도겠다. 특별히 올해가 그의 서거 400주년이라는 사실에 기대어 말이다.

 

알려진 대로 세계문학사에서 셰익스피어의 자리는 세 정점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첫 번째 정점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두 번째 정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도스토옙스키)의 러시아소설이 그 세 번째 정점이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세계문학사의 3대 걸작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셰익스피어의 <햄릿>,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꼽았을 때 그린 구도가 바로 그에 상응한다.


비극 외에도 희극과 사극, 그리고 상당 분량의 소네트를 남겼지만 아무래도 셰익스피어 문학의 본령은 그의 비극이다. <햄릿>에서 시작해 <오셀로><리어왕><맥베스>에 이르는 4대 비극의 주인공들은 사실 셰익스피어란 창조자보다도 더 유명하다. 희극과 사극에서라면 그와 견줄 만한 작가가 세계문학사에 전혀 없지 않지만, 비극 작가로서 셰익스피어의 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흔히 ‘운명비극’이라고 불리는 그리스 비극에 견주어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성격비극’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닌 각 인물의 성격에 두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신탁(운명)에 맞서려는 인간의 오만한 시도가 결국은 파국에 이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신의 권능에 비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그가 아무리 우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한갓 어리석고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분수와 겸손을 가르친다.

 


한편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성격적 결함이나 헛된 욕망의 희생자로 그려진다. 주어진 운명에 더해서 그들의 성격이 불행을 자초한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부터가 대표적이다. 세계연극사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이 <햄릿>이라지만 햄릿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인물들과 견주어보아도 그렇다. <햄릿>에서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와 비교한다. 이 두 왕자는 부왕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고 부왕의 죽음에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 복수에 아무런 주저함도 내보이지 않는 포틴브라스와 비교하면 햄릿의 우유부단함은 두드러진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그는 고뇌한다. 바로 그런 선택지가 곧 햄릿이 성격을 가진 존재라는 걸 입증한다. 이때 성격이란 내면이다. 미지수이자 수수께끼다. 이런 내면과 함께 햄릿은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부왕의 유령이 나타나 복수를 명령함에도 그가 주저하는 것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존재여서다. 그는 한갓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존재다.

 


<맥베스>에서도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는 덩컨왕을 살해하고 왕이 됨으로써 예언을 실현하지만, 왕이 된 이후에는 뱅코우(뱅쿼)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맞서고자 한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그는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지만(운명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그는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결연한 죽음을 맞는다. 단순히 권력 찬탈자의 최후를 인과응보의 교훈으로 삼기에는 그의 비장함이 마음에 와 닿는다. 분수를 넘어선 인간의 파국을 보여주지만 <맥베스>는 더 이상 겸손을 설교하지 않는다.

 


4대 비극 가운데서는 <맥베스>가 마지막 작품이지만, 셰익스피어의 비극 전체 중에서는 <코리올라누스>가 마지막 작품에 해당한다.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정치극에서 셰익스피어는 반민중적이면서 동시에 반귀족인 주인공 코리올라누스를 새롭게 창조한다. T.S. 엘리엇이 <햄릿>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한 이 작품은 2011년에 랠프 파인즈(레이프 파인스)에 의해 현대적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이 영화 버전에서는 코리올라누스가 광적인 반민주주의자가 아닌 급진 좌파로 재해석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현재성이란 그러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무한히 양산해내는 데 근거한다. 


아주 간단히 말해보자. 햄릿과 맥베스와 코리올라누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동시대인이다. 더불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다. 그가 비평가 해롤드 블룸의 표현대로 ‘인간성’을 발명해냈다고 하면, 그리고 우리가 그 인간성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셰익스피어 패러다임’ 안에 있다. ‘서거 400주년’이란 말은 한갓 풍문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16. 01. 31.

 

NT Live <햄릿> 공연포스터

 

P.S. 이번 국립극장의 <햄릿>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을 맡은 <햄릿>이다(http://www.ntok.go.kr/user/jsp/ua/ua01_1db02v.jsp?menu_code=MA0130&page_nm=ua01_3db01l&page_alt=전체일정&pfmc_inf_idx=1880). 나로선 <이미테이션 게임>(2014)의 배우로 기억하는데, 영국에서는 국민배우로 각광받는 듯하다. 그가 연기하는 새로운 햄릿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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