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베른하르트 타우렉 지음, 변순용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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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베른하트르 타우렉은 독일 대학의 교수인데, 이 책과 함께 니체, 푸코, 셰익스피어 입문서와과 철학 입문서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역자도 이에 착안하여 레비나스에 관한 '적절한 입문서'로서 이 '불어로 저술하는 철학자에 대한 독어로 된 입문서'를 옮기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수고는 별로 빛이 나지 않는다. 역자의 말대로 "입문서라는 것은 입문서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더구나 번역마저 신뢰감을 주지 못할 경우에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연보에서부터 그가 태어난 나라 '리투아니아'를 독어식으로 '리타우엔(Litauen)'이라고 표기할 때(277쪽) 나는 이 번역서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데카르트적 명상>이라 옮겼을 때도 그러려니 했지만, 그마저도 <데카르트주의적 명상>과 혼용될 때는 좀 짜증스러웠다.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를 '플로틴(Plotin)'이라 옮길 때도 철학계에선 그렇게도 쓰나? 란 의구심을 가져지만, '로젠츠바이크'를 '로젠쯔바익(Rosenzweig)'으로 표기하는 특이한 취향을 지나서 (프랑스 시인도 아니고)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을 '쓸랑(Paul Celan)'(140쪽)이라고 옮길 때에는 당혹감을 넘어서 '낭패감'을 갖게 되었다(그나마 별 기대를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니 '데리다의 근본적인 반대리주의(反代理主義)'(128쪽)란 표현이 나오는 건('반표상주의'나 '반재현주의'가 아니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겠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빌자면, 독자가 역자에게서 '타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자 또한 독자에게는 '타자'라는 걸 확인하는 수밖에. 한데, 중요한 건 이 타자에 대한 '책임' 아닌가? 레비나스 철학 혹은 윤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인 그 책임!

역자가 레비나스를 접하게 된 계기 또한 그 책임의 문제였다고 하는바, "그의 책임론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책임"까지도 추궁한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그것은 "나의 모든 자유보다 선행하는 타자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다."(14쪽) 그러니 이 책 <레비나스>에서만큼은 역자의 책임은 '무한'이겠지만, 나는 역자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애당초 별로 재미없는 책을 쓴 저자에게도 책임의 일부는 돌려져야 할 것이기에(이 책과 비교한다면, 콜린 데이비스의 또다른 '입문서'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다).   

원전이 독어본인지라 미심쩍은 대목들을 대조해볼 수가 없었지만, 영어 연구서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대목은 예외였다. <해체론과 실용주의>란 책에 실린 로티의 말을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이 대목은 독어역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을 테니 중역이겠다).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가 하이데거의 존재보다 결코 도움된다고 보지 않는다 - 이 두 가지는 내게 단순하게, 좌익으로서, 그리고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189쪽) 

각주에 있는 원서의 쪽수를 찾아갔더니 이 대목은 "I don't find Levinas's Other any more useful than Heidegger's Being - both strike me as gawky, awkward, and unenlightening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41쪽)을 옮긴 것이다.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은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좌익으로서'란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신실용주의자' 로티다운 의견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 대목은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Other)'가 하이데거의 '존재(Being)'보다 뭐가 나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타자존재나 둘다 내게는 멍청하고 어색하며 몽매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자질구레하게 이런 대목들을 더 지적하는 것은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단순하게, 좌익으로서, 그리고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시급하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전히 '계몽'이며, '타자의 독서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만은 확인해두도록 하자. 역자가 부록으로 실은 논문들(68쪽으로 번역 본문 분량의 1/3이 넘는다! 이 분량은 책값과 무관한가?)에 쏟아부은 정성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정확한 번역과 교정에 할애했더라면 책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이런 책과는 달리 혹은 이런 책의 저편에서' 신뢰할 만한 모양새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역자로서도 변명의 여지는 있겠다. "그의 철학은 느껴야 한다. 그 느낌은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다."(15쪽)고 하니까. 해서 덧붙이자면, 레비나스 입문에 더 좋은 것은 이런 '입문서'들을 읽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렇게 '책' 따위를 놓고 투덜거리는 게 아니라, 선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레비나스의 얼굴을 보면서, '타자에 대한 책임'을 조용히 묵상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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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06-02-1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읽으면서 답답했던 생각이 납니다.^^

로쟈 2006-02-19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입문서로는 부적합해 보입니다. 레비나스 이해의 관건이 되는 하이데거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

사량 2006-02-2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파울 첼란의 경우, 이 사람이 훗날 파리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간주되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아요. 하이데거 전문가인 박찬국 교수의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동녘, 2004)의 앞부분에는 "프랑스의 시인 폴 셀랑(Paul Celan)"이라는 무시무시한-_- 말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6-02-2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무시무시한 말'이군요. 첼란이 불어로도 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한번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찾아보니까, 1951년에 프랑스로 귀화했군요. 한데, 프랑스어 시집은 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로 독어시집이고 루마니아어 시집이 한 권 있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