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독서동아리 활동(http://bookclub.kpipa.or.kr/)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나온 <2015 서평집>(2015)에 실은 서문을 옮겨놓는다.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는데 비매품이라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서문의 제목은 '눈뜬 자들의 책무'라고 붙였다.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리며 쓴 글이다.

 

 

눈뜬 자들의 책무

 

포르투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한 운전자가 시력을 잃게 되고, 그 ‘백색 실명’이 온 도시에 퍼져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현대의 우화로도 읽히는 이 소설에서 안과의사의 아내만이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고 눈먼 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발병 초기에 눈이 먼 사람들이 일단 수용소에 감금되지만 나중에는 수용소 안팎의 구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실명은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고 갇혀 있던 사람들도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안과의사의 아내는 일행과 함께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작가의 가족이었는데, 작가는 안과의사의 아내에게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들려달라고 합니다. 작가는 글을 쓰는 게 소명이자 의무이니까요.

 

 

눈이 먼 상태에서 작가는 종이를 여러 장 겹쳐놓고 볼펜을 꾹꾹 눌러서 씁니다. 그래야 손을 더듬어서 어디까지 썼는지 확인해가면서 계속 써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가에게 안과의사의 아내가 자기는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니까 작가는 매우 흥분합니다. 자신이 쓴 글을 누군가는 읽어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의사의 아내는 작가의 어깨에 팔을 얹습니다. 작가와 독자의 연대를 보여주는 장면인데, 의사의 아내에게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말라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의사의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서 책을 한 권 꺼내와 일행에게 읽어줍니다.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그래도 아직 볼 수 있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인류와 연결시켜주는 끈이 아직 끊어진 건 아니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우리를 인류와 연결시켜주는 끈, 그것이 책이 갖는 궁극의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책과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연결될뿐더러 과거의 사람들과도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런 연결을 통해서 인류가 되고 인간이 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서 작가는 눈뜬 사람, 두 눈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바로 독서라고 말하는 듯싶습니다. 독서동아리 회원들의 서평을 읽으면서 제가 떠올린 것이 바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은 소감이었습니다. 분량의 제한 때문에 선별해서 책으로 묶게 되었지만, 이 결과물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눈뜬 자로서의 소임을 함께한다는 데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직 혼자서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안과의사의 아내보다 사정이 나쁘진 않습니다. 함께 모여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또 그 소감을 나눌 수 있는 ‘동아리’가 있으니까요. 바라건대, 이러한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널리 확산되어 한국사회 전체가 비로소 ‘눈뜬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귀중한 첫 결과물을 엮을 수 있어서 반갑고 부듯합니다.

 

16.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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