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에 나온 책인데, 뒤늦게야 알게 된 작품이 있다. '백탑파'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김탁환의 <목격자들>(민음사, 2015)이다. '조운선 침몰 사건'이 부제. 부제에서 어림해볼 수 있지만 세월호 사건이 집필의 계기가 된 소설이다. 그렇다는 것은 세월호 고의침몰 의혹과 관련한 기사를 엊그제 검색해보던 중 작가의 인터뷰와 강연 기사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먼저 지난해 3월말 대전에서의 북콘서트를 취재한 대전일보의 기사(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1164076).

 

소설가 김탁환에게도 세월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안겼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 돌아오지 못할 자들을 향한 고통스런 절규가 그의 머릿속을 온종일 헤집고 다녔다. "매일 밤 바다에 빠지는 것 같았어요. 잘 수도 없고, 먹을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살도 10kg이 빠졌네요."

지난 26일 오후 계룡문고에서 열린 '목격자들' 출판기념 북 콘서트에 앞서 만난 김탁환의 목소리는 이렇게 담담했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한 작품이 끝나면 금세 털어내고 일상으로 복귀하던 그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은 듯 했다.

"아직 작품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통상 작품을 출간하고 나면 보름간 제주도에 머물며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재충전을 했는데, 이번에는 참 안되네요. 그래서 선택한것이 지방 투어 북콘서트예요. 혼자 슬픔을 감당하는 것보다 독자들을 만나 실컷 떠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슬픔보다 위로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해서요. 4월까지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김탁환은 지난달 초 세월호 참사를 연상케 하는 역사추리 소설 '백탑파(白塔派)'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목격자들'을 내놨다. '열하광인' 이후 8년만이다. "지난해부터 연애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4월에 갑가지 세월호가 침몰한겁니다. 남녀 주인공이 말랑말랑한 사랑을 해야 하는데, 한 문장도 쓸 수 없었어요. 선택은 단 두가지, 쓰거나. 안 쓰거나. 한달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러 버린 그 시간에 산울림 밴드의 김창완씨는 '노란 리본'이라는 곡을 만들고,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더군요. 본인이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이겨내고 있었던 거지요.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가만히 있을게 아니라 내가 제일 잘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위로하자고. 그렇게 탄생한것이 '조운선 침몰사건'이라는 부제를 단 '목격자'입니다. "

그는 이 작품을 쓰기 전 스스로에게 무엇을 쓸것인지 수십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압축된 것이 생명의문제, 인간 존엄의 문제, 고통에서 비극으로 나아가는 문제로 정리했고 그것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냈다.

'조운선 침몰사건'은 조선시대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침몰해 배와 세곡이 가라앉고 배에 탄 백성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김탁환은 이 사건을 단순사고로 보지 않고 합리적 추리를 통해 주인공들에게 과학 수사를 지시한다. '백탑파'에서 활약했던 명탐정 의금부 도사 '이명방'과 '김진'을 불러내 사건의 배후를 밝히고, 범인들을 색출한 뒤 해결책을 제시한다.

"작품 속에 제시한 해결책은 이랬어요. 조운선 사고 때 함께 희생된 기생과 뱃사람, 어부등을 기리는 비문을 세우고, 정조 임금은 유가족에게 위로의 글을 내리며 생계의 어려움을 보살피겠다고 약속을 한 거죠. 그리고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마을'을 지었지요. 소설속에서는 이렇게 해결했는데, 현실에선 어떻게 해결할지 정말 궁금합니다."

인터뷰 내내 담담함을 유지하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광주항쟁 희생자의 유가족을 만났는데, 유가족들이 그랬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고. 잊혀지는것이 아니니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요.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사건은 세월로 해결되지 않은 사건도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그런 경우겠지요. 덮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세월호 1주년을 앞두고 소설가와 시인, 만화가들이 1년동안 어떻게 견디고 살아왔는지 결과물을 내놓을 겁니다. 올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때까지 우리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니까요. "

그 역시 '작가의 말'을 통해 "이 많은 범죄, 이 지독한 악취, 이 뿌연 풍광을 외면하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겠습니다"라고 다짐한다. 독자에게도 구경꾼으로 남지 말고 '역사의 목격자'로 남자고, 그리고 잊지 말자고 말한다.(대전일보)

간단히 말하면 <목격자들>은 "조선시대 조세를 실은 세운선이 침몰해 배와 세곡이 가라앉고 배에 탄 백성들이 희생된 사건"을 다룬 소설인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강연에서 이 작품의 창작과정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25/2015042500429.html).  

 

2014년에 제가 가진 문제 의식은, 이번 주가 공교롭게도 일주기인데, 세월호 사건이었습니다. 세 가지 문제 의식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생명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가장 존귀하다고들 생각하는데 국가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명이 없어지는 경우입니다. 전쟁이나 돌림병 같은 것에 의해서 말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 존엄성의 문제입니다. 죽은 사람의 존엄성은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우리는 생중계로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함께 봤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사람도 내상을 입은 겁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이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이라는 게 계속해서 너무 고통스러우면 안 보게 됩니다. 슬픔이든 그리움이든 고통스러워서 안 보게 되니까 외면을 합니다. 그걸 극복하고 어떤 다른 인간으로 자기를 바꾸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세월호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하게 된 겁니다.

제가 찾아보니까 1780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봄에 다섯 군데에서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조운선이라는, 세금으로 내던 쌀을 나르던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동법이라고 해서 세금을 쌀로 냈습니다. 쌀을 소 달구지로 옮기면 너무 힘드니까 배로 옮겼습니다. 한 척당 쌀이 천 석씩 들어갔습니다. 한 척이 가라앉으면 쌀 천 석이 사라지고, 열 척이 가라앉으면 만 석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 재정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 해에 보니까 봄에 다섯 군데에서 배가 빠진 겁니다. 정조 초기인데 정조가 이를 조사하라고 합니다. 그런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조사하는지를 찾아보는데 잘 안 나옵니다. 그리고 11년 뒤, 1791년에도 법성창이라는 곳에서 또 배가 빠졌습니다. 왜 빠졌나 조사했는데 이게 재미있습니다. 하나는 과적 때문이었습니다. 천 석을 실어야 하는데 1500석씩 막 실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죽었어야 하는데 선원들이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다 살아 나왔습니다. (지금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조운선 침몰 사례를 다 모아봤습니다. 사실 이제 조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바로 장편소설을 쓸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십 년 지나면 세월호 관련 장편소설이 나올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럴 때 장편 작가들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질문거리를 찾으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제가 뒤로 쭉 빠져봤는데 1780년대로 갔습니다. 조운선 침몰 과정을 쓰자고 했는데 그 중 밀양에 있는 후조창을 출발해서 영암 앞바다에서 빠진 그 사건을 다루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1780년 4월 5일 영암 앞바다 조운선 침몰을 ‘그날의 하루’로 잡고, 그게 어떻게 빠졌는지 조사하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게 작년 5월입니다. 12월까지 썼습니다.

 

 

주로 두 군데 답사를 갔습니다. (지도를 가리키며) 이쪽이 밀양이고 여기가 후조창입니다. 밀양이 큰 고을이니까 경상도에서 쌀을 다 거두면 창고에 먼저 모읍니다. 후조창이라는 이 곳에 쌀을 모으면 몇 만 석이 모입니다. 여기에서 마산 앞바다로 내려옵니다. 이게 올라가다 보면 강화도이고, 더 올라가면 광흥창입니다. 광흥창은 쌀을 다 풀어놓는 곳입니다. 그런데 배가 진도를 지나 올라가다가 침몰했습니다.

 

배를 실을 때에 여러 부조리가 일어납니다. 가장 유명한 부정부패가 ‘화수’입니다. 500석만 쌀을 싣고 500석은 물을 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0석이 되게 만들어서 싣습니다. 그게 ‘속대전’이라고 해서 법령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화수’를 저지르면 무조건 사형이라고 적어 놨습니다.

‘고패’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1000석을 실어야 하는데 500석만 싣고 일단 출발을 합니다. 광흥창에 이르면 500석이 부족하게 되니까 혼이 나잖아요. 그러니 중간쯤 가다가 일부러 배를 침몰시킵니다. 고의로 빠뜨리는 거죠. 그렇게 사고가 나서 못 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다 보니, 이런 죄를 저지르면 사형이라고 법령까지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런 부분 답사를 하고, 구체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조선비즈)

요컨대 이유는 다르더라도 선박의 고의침몰이라는 것은 우리부터도 오랜 내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비추어 보면, 세월호 '고의침몰'도, 결과적으로는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지만, 애초에 '기획자들'은 타성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한두번 해온 '장사'가 아니기에). 간첩(단) 조작 사건처럼 국정원이 예사로 하는 일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손발이 잘 안 맞았고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러고는 조직적인 증거 조작과 은폐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형국인지도.

 

조선시대 조운선 침몰 사건은 정조대왕이 조사를 명했다지만(그 결과는 미지수라 하더라도. 당시의 관도 내통했던 것일까?), 우리는 그런 리더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가능한 일은 작가의 말대로 "이 많은 범죄, 이 지독한 악취, 이 뿌연 풍광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의 목격자'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획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는 것이다(조선시대에는 그런 죄를 저지르면 무조건 사형이었다. 우리는?)...

 

16. 0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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