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1924- )의 책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는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예술/미학 관련서로서 단연 손에 꼽을 만한 책이다(모스크바에서 이 책을 검색하고 잠시 놀라고 반가웠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구입을 망설이다가 얼마전 미술 전공자 몇 분과 독회를 꾸리게 되면서 이 책을 드디어 손에 들게 되었다. 마침 그해 여름에 나온 미국의 모더니즘 최고의 미술비평가로 꼽히는 클레멘트 그린버그(1909-1994)의 에세이집 <예술과 문화>(경성대출판부, 2004)도 번역/소개된 만큼 미학과 예술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들로선 한번쯤 시간을 내봄직하다.

참고로 평론가 그린버그의 짝패는 액션페인팅의 주창자 잭슨 폴록이며, 이 두 사람의 주거니받거니 덕에(거기에 CIA가 뒤를 봐줬다고도 하고) 2차 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건너가게 된다. 단토는 '그린버그 이후'의 대표적인 비평가이고자 한다(이미지들은 차례대로, 아서 단토와 'After the end of art' 원저, 그리고 그린버그와 'Art and Culture' 원저). 그의 이론적 영감의 원천은 앤디 워홀. 폴록과 워홀에 대해서는 각각 영화 <폴락>(2000)과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1999)를 참조할 수 있겠다. 나는 몇년 전에 <폴락>은 본 적이 있는데, 볼 때는 몰랐지만 거기 나오는 비평가가 혹 그린버그가 아닌가 싶다. 단토의 책 제4장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역사적 비전'에 할애돼 있다.

현재 컬럼비아대학 철학과의 명예교수로 소개돼 있는 단토는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과학철학과 분석철학에서 시작해 역사철학, 예술철학 등 다방면에 걸친 수십 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1984년부터 <네이션>지의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니까 20년 이상 현역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며, 비평서들도 꾸준히 묶어내고 있다. 최신간은 작년에 출간된 'Unnatural wonders'). 그 중 <사르트르의 철학>(민음사, 1985)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실상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후에 <철학자로서의 니체>(1965, 작년 200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가 그의 또다른 주저라는 걸 알게 됐고, 도서관에서 그의 역사철학서도 발견하면서 '스케일'에 놀랐다('Narrartion and Knowledge'가 그 책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 예술철학자나 미술비평가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고, 단토 자신도 그걸 더 원하는 듯하다. 그럴 경우 그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기억될 테제가 바로 '예술의 종말'론이다. <예술의 종말 이후> 한국어판에 붙인 서문의 끝자락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한 결정이 이 책의 테제가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러한 그의 기대가 백일몽만은 아닌 것이 독어권 학자인 미카엘 하우스캘러(혹은 '미하일 하우스켈러')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철학과현실사, 2004, 이 책의 다른 번역본이 <예술앞에 선 철학자>(이론과실천, 2003)이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미학이론가'들이 바로 플라톤부터 단토까지이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셈.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1974년생이라는 저자 하우스캘러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내 룬트샤우 신문에 기고했던 16명의 사상가들의 미학 사상을 요약한 글 모음"이라는데, 단토와 함께 거명되고 있는 20세기 후반의 미학이론가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1998)와 넬슨 굿맨(1906-1998) 정도이다(단토는 리오타르와 동갑내기이군). 그 정도면 단토의 지명도를 어림짐작해볼 수 있겠다. 한편, 단토와 교분을 나누었던 박이문 교수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1984) 등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비록 그 책에서 박이문의 경쟁상대는 단토가 아니라 '제도로서의 예술'을 주장했던 조지 디키(딕키)였지만. 알라딘에는 저자가 '조지디키'로 돼 있다. 현재로서 단토의 지명도는 디키를 넘어선 듯하다). 한편, 하우스캘러의 책은 너무 소략해서('책'이라기보다는 '팜플릿'이다) 말 그대로 '30분에 읽는 예술이론'이다.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라고는 하지만, 이때의 '예술'은 '미술'을 가리킨다(영어에서 'art'란 단어는 예술과 미술을 구분없이 지칭하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에서 간혹 애를 먹인다). 곰브리치(1909-2001)의 고전 'The Story of Art'가 <서양미술사>(예경, 1999)로 번역되는 것처럼(곰브리치는 그린버그와 동갑내기로군). 이 예술 혹은 미술의 종말은 사실 여러 차례 주장되었었다. 세잔 이후에 미술은 끝났다는 둥,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에 미술은 이미 종쳤다는 둥.

 

단토의 경우 이 '미술의 종말'은 1965년부터이다. 일단 역자해설을 참고하면,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인데(아래 이미지. 말 그대로 상품박스이다. 단 '미술관에 전시된'. 이게 '마트'에 있을 경우엔 별 문제가 없지만 '미술관'에 놓여 있을 때는 머리 아파지기 시작한다!), 그게 미술의 끝이자 역사의 끝이며, 이후는 '미술의 역사 이후의 시기(the Post-Hostorical Period of Art)'이다. 단토의 <브릴로 상자를 넘어서(Beyond the Brillo Box)>(1992)는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미술사는 이른바 이 '브릴로 상자'를 경계로 하여 '역사시대'에 '탈역사시대'로 구분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왜 그토록 충격적인 것인가, 혹은 충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미술작품과 미술작품이 아닌 것의 차이를 더이상 식별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개나 소나, 혹은 비누박스나 라면박스나 다 '예술'로 둔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적어도 외관상으로 똑같은 브릴로 비누상자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그렇다면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미술에 대한 정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술의 문제를 감각(손)의 문제가 아닌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단토]에게 워홀의 작품은 헤겔 이후 미학의 황무지에서 발견한 한 가닥 희망이었다. 그는 미술의 의미를 미술로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워홀의 작품에서 깨달은 바는 '어떤 것들이라도 작품이 될 수' 있으며, '미술이 무엇이냐는 점을' 발견하려면 '감각의 경험으로부터 사고로 방향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이 외관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 철학의 문제임을 알았다."(역자해설, 431쪽, 강조는 나의 것)

사정을 단토의 표현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작품의 외양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과 논리적으로 서로 맞아떨어지는 예술정의를 짜만들어야 했다. 어떤 것을 집어들고서 이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이제 논지를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역사는 종말에 도달하였다."(13쪽)

 

 

 

 

다시 말해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규정해줄 수 있는 어떤 고유한 '예술성'의 목록을 우리가 제시할 수 없을 때 더이상 (예전에 정의되던 바의) '예술'은 없다. 예술은 끝났다. 예술은 종쳤다. 그럼, 뭐가 남는가? 폐허만이 남는가? 그건 아니다. 여기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외침을 다시 반복하면 된다: '만세!'(딸아이의 표현으론 '앗싸!') 해서, 예술 이후의 시대는 "심원한 다원주의와 완전한 관용의 시대"(24쪽)이다. 더불어, 예술에 대한 모든 규정과 종속으로부터 해방된 시대이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17쪽)

이것이 헤겔리안으로 분류되는 단토의 '철학적 미술사'이다(비록 헤겔과의 차이도 그 자신은 분명히 하지만). 그리고, 그의 자평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의 종말이라고 하는 테제는 철학적 미술사라 불릴 만한 것에 대한 하나의 기여이며, 혼돈스럽게 보이는 모던 미술에서 어떤 이해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10쪽)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06. 01. 18.   

P.S. 앤디 워홀의 작업이 불러일으킨 충격으로부터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 테제는 제창되었지만 <예술의 종말 이후>의 서문에서 그가 상기시키고 있는 작업은 책의 권두화로도 쓰인 화가 데이비드 리드의 것이다. 당초 이 리드의 작업과 관련한 페이퍼를 의도했지만, 분량상 그 내용은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한다.

P.S. 2. 얼핏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연상시키지만, 마이크 비들로(Mike Bidlo)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아님 Not Andy Warhol (Brillo Box, 1969), 1991>이다. 일종의 '따라하기'이고, '한술 더뜨기'이고 패러디이다. 물론 비들로의 작업은 워홀의 작업을 전제로 한 것이며, 순서상 선행할 수 없다. 이것이 단토가 말하는 '역사적 불가능성'이고, 말하자면, 불가능성의 내러티브이다. 하여간에 이 정도면 갈데까지 간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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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의아니게(?) 속타게 해드리고 있군요. 단토의 책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여러 차례에 나누어 '브리핑'을 할 계획입니다(계획상으론 두달쯤 걸릴 거구요). 물론 서론에 대한 이 페이퍼는 오늘 끝내는 게 목표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