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띄운 글 '로망스와 포르노를 구별하는 법'을 '베이스캠프'용으로 다시 정리한다(주로 프랑스 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들에 대한 것이다). 관련 참고문헌들도 몇 권 소개하면서(내가 무슨 전문가인가?).

최근 미국의 포르노 영화 '목구멍 깊숙이'(1972)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다큐영화 '인사이드 딥 스로트'(2005)가 어제 개봉된 걸로 아는데, 이 참에 포르노그라피의 미학과 사회학/정치학을 두루 공부해본다면 좋겠지만 이목은 있고 시간은 없는 관계로 '복습' 정도 하는 걸로 참아두기로 한다. 다만, <목구멍 깊숙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어보기로 한다. '애프터 딥스로트' 정도의 제목이 될 것이다.  


 

 

 

 

영화 얘기가 나온 김에, 프랑스의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에 대해 한 마디(*'한마디' 치곤 너무 길어지지만). 모스크바에 처음 왔을 때, 한동안은 매주말마다 채널 ‘엔떼베’에서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들을 방영했다(한국에서는 그의 영화제도 개최된바 있다). 나는 그의 영화라면 <스위밍> 밖에 본 게 없었는데, 그걸 포함해 서너 편의 영화를 더 보면서, 이 감독 역시 ‘아버지’가 없는 세계, 혹은 여자들만 많았던 가정 출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그의 최근작은 <8명의 여인들>이다!). 그의 장기는 중년여성의 심리묘사로 보이는데, 그런 걸로 포섭되지 않는 ‘튀는’ (코미디)영화들도 없지 않았다. 이때 ‘튄다’는 것은 ‘아버지의 결여’가 낳는 징후이다. 하지만, 오종에 대해서는 아직 그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8명의 여인들>을 나는 아직 보지 않았다. 그건 귀국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겐 <로망스>로 잘 알려진 카트린 브레야(Catherine Breillat; 1948- )는 올해(2004년) 신작 <지옥의 해부(Anatomie de l’enfer)>(2004, 74분)를 내놓았는데, 러시아에서는 <포르노크라시>로 개봉되었고, 이미 비디오CD로도 나와 있다(*국내용 제목은 <지옥의 체험>인 듯하다). 영화는 브레야의 소설 <포르노크라시(Pornocratie)>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므로, ‘포르노크라시’란 제목이 억지는 아니며, 여기서도 그 제목을 쓰도록 하겠다.

Anatomy of Hell

원제의 ‘지옥’은 영화로 미루어보건대, 여성 성기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남녀관계의 은유이다. 이 영화는 지난주에 이곳의 한 TV채널에서 브레야의 <로망스>를 다시 보고 브레야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음반/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CD가 눈에 띄길래 산 것이다. <로망스>(한국에서의 <로망스>는 노출장면이 다 지워진 말 그대로 <로망스X>였지만)보다도 더 ‘엽기적인’ 노출 때문에 한국에서도 이 영화가 소개될 가능성은 전무해 보이지만(모스크바에서도 이번 6월에 한 극장에서 밤 10시 이후에만 한 차례씩 이틀 상영하고 말았다). 혹 조만간 성인영화관에서의 상영이 허용되더라도 흥행할 영화는 전혀 아니다. 보기에 아주 불편하므로.

‘노출’에 덧붙여. 얼마 전, 한국의 인터넷 뉴스에는 요즘 드라마에서의 ‘노출’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식의 ‘선정적인’ 뉴스가 떠서 클릭해보았다(당신이 이 글을 클릭하는 것처럼). 김미숙, 장나라가 드라마에 수영복을 입고 등장했다고 (혼자서) ‘흥분하고’, 한고은이 드라마에서 한쪽 가슴에 문신을 새겼다고 (혼자서) ‘분개한’ 기사였다(물론 이런 기사들의 노림수는 순전히 ‘클릭’에 있지만). 한국은 인터넷에서 음란(포르노) 사이트의 비율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일 텐데(그게 인터넷 강국의 지표이기도 하다), 아직도 그러한 ‘가장(假裝)’ 혹은 ‘연기’가 통용된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우스꽝스럽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정적인 건, ‘대상’이 아니라 그걸 바라다보는 ‘시선’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TV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덜 선정적’이지만, 즉 ‘건전’하지만(혹 아랍권이 우리보다 더 ‘건전’할는지?), 그걸 바라보는 국민적 ‘시선'과 '응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선정적’이고 ‘퇴폐적’이다(누드 프로젝트가 ‘돈’이 된다고 뛰어드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대상과 시선이 서로 보충하는 식으로 어느 나라건 ‘선정성의 총량’은 보존되는 것인지?

다시 브레야. 이곳의 공연전문잡지 <아피샤>(‘공연 프로그램’이란 뜻)의 소개에 따르면, <포르노크라시>는 <섹스는 코미디다>(러시아에는 <친밀한 장면들>이란 제목으로 출시, 국내에도 출시돼 있다.맨왼쪽 이미지, 두번째 이미지가 러시아판), <로망스>에 이은 완결편이다. 이걸 3부작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르상으론 (섹스에 대한) 코미디, 로망스, 포르노가 된다. 나는 그녀의 ‘코미디’는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나중에 러시아 TV에서 봤다. 일종의 메이킹 필름 형식의 영화이다), ‘로망스’와 ‘포르노’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한다.

 

 

 

 

일단, ‘로망스’와 ‘포르노’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안 벗고 나오고, 하나는 벗고 나온다는 것인가? 일반적인 분류에 따르면(알베로니를 따른 것인데), ‘포르노그라피’가 남성의 장르이고, 여중생들이 좋아하는 ‘하이틴 로맨스’가 여성의 장르이다(혹은 <도쿄 데카당스> 남성의 장르라면 <도쿄 타워>가 여성의 장르이다). ‘하이틴 로맨스’를 거의 읽어본 게 없어서 여기선 장르의 시학을 구성할 수 없지만, 내 의견으로 <로망스>는 셋이 나오고, <포르노>는 둘이 나온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영화 <로망스>에 나오는 셋은 누구인가? 여주인공과 그의 남자친구, 그리고 중년의 교감선생?(정확하게 ‘교감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상으론 그렇게 기억된다.) 아니다. 사실, 영화의 원제는 ‘로맨스는 없다!’ 내지는 ‘로맨스, 엿먹어라!’란 뜻의 <로망스X>이다(그러니 이 또한 교육용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영화 <로망스>는 ‘로맨스’인데, 그것은 ‘아이’라는 '제3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로망스’와 ‘포르노’를 가르는 기준이다. 거꾸로 말해서, 포르노의 필수조건은 ‘아이’의 부재이다(물론 형식적인 필수조건은 남녀의 섹스가 나온다는 거지만).

해서, 아무리 영화에서 남녀의 섹스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그 영화는 ‘포르노’가 될 수 없다. 반면에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로망스’가 아니될 수가 없다(패밀리 로망스! 참고로, 그 경계에 있는 영화가 스페인 영화 <패션 투르카>(1994)이다). 따라서, 로맨스적 상상력이란 로맨틱한 2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3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다(이 3자적 관계의 드라마 버전이 3각 관계인바, 3각 관계가 아니라면 드라마가 진행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거꾸로 2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은 언제나 포르노적 상상력을 함축한다. 거기엔 ‘경건한 포르노’와 ‘적나라한 포르노’가 있을 따름이다(포르노중독자들은 ‘소프트코어’와 ‘하드코어’로 구분하겠지만). ‘경건한 포르노’? 그건 보여지지 않는 포르노를 말한다. 즉 마이너스 포르노, 상상 속의 포르노이다. 예수 가라사대, 마음에 음심(淫心)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姦淫)한 것과 다름 없다고 했으니, 상상 속의 ‘경건한 포르노’도 포르노이다.

그런데, 언제 이 포르노로부터, 포르노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깨어나게 되는가? ‘아이’에 대한 상상이 덧붙여질 때이다. 그 ‘아이’가 ‘행복한 로망스’를 낳는지, ‘끔찍한 로망스’를 낳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지만, 하여간에 포르노 배우에게서 ‘질외 사정’이 절대 수칙인 것은, 2자적인 포르노적 상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로 이 제3자를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질내 사정’은 포르노적 판타지를 잠식하는 (실재적) ‘악몽’이기에...

브레야의 영화 때문에, ‘포르노’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됐지만, 내가 포르노 영화에 ‘입문’하게 된 건 ‘남들’ 보다 늦은 대학 1학년 때이다(포르노 사진(=빨간 책)이나 만화는, 요즘은 더 빨라졌겠지만, 그때도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접하게 됐다). 남들보다 늦었다고 한 건,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선 동료 고3 학생들이 단체로 포르노를 보다가 적발되어(나는 주로 공부만 했다), 입시공부에 바쁜 와중에 대거 반성문을 쓰는 사태가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같이 본 학생들의 이름을 적어내라는 지도과 교사들의 닦달에 리스트가 108명에 이르렀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들렸는데, 이후에 이 사건은 (포르노란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108인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사건의 핵심 33명이 견책을 받는 걸로 일단락되었는데, 하도 오래된 일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하여간에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였는데, 당시에는 대학주변이 여관마다, 그리고 일부 심야다방마다 포르노 ‘영업’을 했다. 포르노 비디오를 예사로 틀어주었던 것이다(낮에는 최루탄, 밤에는 포르노!). 그래서, 동문회 같은 모임을 갖게 되면, 먼저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몇 시간 운동권 노래를 ‘학습’하며 시국에 대해서 자못 비장한 각오들을 다지다가, 한두 차례 ‘오바이트’를 하고는 우리가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는 핑계로 여관에 단체 숙박을 했다. 그리고는, 여럿이 함께 자못 충혈된 눈으로 취기와 피곤을 무릅쓰고, 포르노 영화를 새벽까지 보다가(가끔은 아침에 한편 더 틀어달라고 전화를 걸었다가, 여관집 청년이나 주인 아줌마한테 핀잔을 듣기도 하고)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당시의 ‘일상’이었다(당시 포르노는 룸살롱의 대학생 버전인데, 포르노와 계급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얘기하겠다, 고 했지만, 나는 그냥 '전문가들'의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세상 밖으로>로 데뷔한 여균동 같은 80년대 ‘운동권’ 출신 감독이 <포르노맨> 같은 ‘한심한’ 영화를 만든 데에는 (개인적인 트라우마 외에도) 그런 대학가의 ‘일상’이 한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포르노’는 검열당해서 <맨?>(1995)이란 제목으로 개봉됐었다. 문제는 그가 포르노를 ‘리얼리즘’이 아닌 ‘판타지’로 접근하려 한 데 있다. 그러니까 <포르노맨>의 문제는 정작 거기에 ‘현실’에 대한, ‘일상’에 대한 아무런 ‘포르노’도, 혹은 ‘폭로’도 담겨 있지 않다는 데 있다. 80년대 중반 대학가 여관이나 심야다방의 포르노 ‘영업’만 영화로 재현해도 ‘포르노’와 ‘정치적 리얼리즘’, 모두 성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때문에 그도 저도 아닌 <포르노맨>은 결국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커녕 <파리애마>(1988)나 <서울에서의 마지막 탱고>(1985)보다도 못한 영화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관념적인’ 감독이 이후에 <죽이는 영화>로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미인> 같은 ‘더 한심한’ 영화를 찍은 걸 보면(플레이보이의 ‘판타지’ 시리즈가 차라리 더 정직하다), ‘가방끈’이 긴 것과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여감독은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같은 이론서들의 역자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는 ‘배우’로서 더 뛰어나다.

 

 

 

 

80년대 대학가의 ‘포르노적 일상’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지만, 가장 정치적이었던 년대가 가장 포르노적이기도 했다는 건 역설이 아니다. 포르노야말로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정치적 독재야말로 또 가장 포르노적이기 때문이다. 불임(不妊)의 정치가 포르노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또 포르노를 ‘대학생들’보다도 더 좋아하는 건 ‘군인들’(속칭 ‘군바리들’) 아닌가? 그런데, 우리 주변의 이 포르노적 일상이 언제 사라졌는가? 소위 ‘민주화’ 이후이다(민주화는 포르노의 적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포르노는 파시즘적이다, 내지는 파시즘과 공모적이다! 가령, 파졸리니의 몇몇 영화들). 그리하여 대략 1990년대를 경계로 하여, ‘(비공식적)포르노’와 ‘(공식적)애마부인’은 성인비디오(AV)로 통합된다. 이쯤에서 동시대 시인 권혁웅의 시 '애마부인 약사(略史)'를 참조해보는 것도 유익할 듯. 참고로, ‘애마부인’에서의 ‘애마’의 ‘공식적인’ 표기는 ‘愛馬’가 아니라, ‘愛麻’(?)이다. ‘愛馬’가 너무 음란하다고 해서 검열에서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음란한 정치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연기(演技)한다.

1대 
고개를 좌우로 꼬며 말을 달리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안소영(1982)에 관해선 이미 말한 바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 탄 꿈을 꾸는 것인지, 말을 모는 그녀가 침실 꿈을 꾸는 것인지를 중3이 다 말할 수야 없었지만, 동시상영관은 돌아온 외팔이와 안소영 때문에 후끈 달아올랐다

2대 
오수비(1983)는 바다로 갔다 그녀는 젖은 몸으로, 몰려오는 파도를 다리 사이로 받으며, 파도보다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靑馬)의 시구를 그때 배웠다 고1때 일이다

3대 
김부선이 말죽거리 떡볶이 집에서 권상우를 유혹할 때(2004) 나는 기절할 뻔했다 나도 권씨지만 그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씨름선수 장승화의 들배지기에 자지러지는 그녀(1985)를 본 고3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렇다

4대 
이후의 애마부인(1990∼ )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연소자가 아니었으니까, 도처에서 여자들이 말 타고 출몰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다만 김호진(1990)처럼 ROTC 애마보이가 되고 싶기는 했다 그 후로는 나도 애마도 주마간산이었다

9대 
진주희(1993)의 운명처럼 말이다 아, 어찌하여 애마의 도(道)는 일본으로 흘러갔는가? 애견부인(1990)은 또 뭐란 말인가? 드라큘라 애마(1994), 애마와 백수건달(1995), 애마와 변강쇠(1995)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끝없는 연애담과 지리멸렬 속으로 빠져들었다

외전(外傳) 
애마는 파리에도 가고(1988) 집시도 되었지만(1990) 정작 애마부인을 가르친 정인엽은 지금 삼겹살집 주인이다 애마 아래 남편, 애마 위에 애마보이, 그 위에 나…… 우리는 그렇게 불판 위에서, 납작하게, 지글거렸다 어마 뜨거라, 소리 지르며 한 시절을 지나왔다

'90년대의 성인비디오는 <애마부인>류의 극장용 에로영화가 ‘하드’해진 것이면서, 포르노가 몇 배 ‘소프트’해진 것이다. ‘하드’해졌다는 건 가슴 노출이 전면화되었다는 걸 뜻하고, ‘소프트’해졌다는 건 그럼에도, 남녀의 성기 노출은 금지되었다는 의미이다(브레이야의 영화들에서 성기 노출은 소프트코어를 넘어선다). 이 ‘하반신’ 노출 금지에 대한 보상욕구가 극대화된 것이 90년대 성인비디오 최대 히트작이라는 <젖소부인> 시리즈이다.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에로영화적 관점에서) 80년대는 ‘애마부인’의 시대였고, 90년대는 ‘젖소부인’의 시대였다(그럼 2000년 이후는? <미소녀 자유학원> 시리즈에서 보듯이, 팬티-페티쉬와 원조교제의 시대이다. ‘부인’들에서 ‘미소녀’로의 이행이 갖는 의미에 대한 분석은 각자 해보시길). 두 ‘시리즈’ 사이에 어떤 시대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수사학적 관점에서 ‘애마(愛馬)’는 ‘부인’의 환유(인접관계)이고, ‘젖소’는 ‘부인’의 은유(유사관계)이지만, 의미론적으론 ‘애마부인’이 시대의 은유인 반면에, ‘젖소부인’은 환유이다. 어째서 그런가?

‘애마부인’과 ‘젖소부인’ 모두 주연은 여성이지만(안소영과 진도희라는 두 페르소나. 물론 주연배우들로 치자면, 한 명의 ‘젖소부인’과는 달리 열 명이 넘는 ‘애마부인들’이 있지만. 이후에도 이름이 좀 남은 배우로는 김부선(<말죽거리잔혹사>에 나온), 유혜리, 진주희 등이 있다), ‘애마부인’이 욕망의 주체인 반면에, ‘젖소부인’은 욕망의 대상이다. ‘애마’는 물론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지만(‘젖소부인’의 이름은 ‘젖소’가 아니다), 그 이름 자체는 말(馬)에 대한 욕망(愛)이란 뜻 그대로 ‘애마부인’의 욕망의 대상을 가리킨다. 반면에 ‘젖소’라는 것 자체가 남근적 명명이며, 남성적 욕망의 투사이다. 이 욕망의 주체가 항상 결핍의 주체라면, 욕망의 대상, 즉 사물은 항상 충만해 있으며, 그 차이가 <애마부인>과 <젖소부인>에 대응한다.

<애마부인>에서 계속 반복되는 모티브는 자신의 ‘합법적인’ 남편에게서 충족하지 못하는 여성적 욕망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남자’이며, 따라서 그녀의 욕망은 ‘법적으론’ 금지된 욕망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애마부인>의 전형적인 씬은 그 금지된 욕망의 상상적 충족, 즉 판타지이다. 이 판타지의 정치적 버전은 무엇인가? 그 판타지의 주체는 ‘합법적’ 군부독재에 대한 욕구불만과 한편으론 그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투쟁)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중이 아니겠는가? 그 대중의 ‘응시’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애마부인>의 관객들이 상상적 동일시에는 이 정치적 동일시 또한 새겨져 있다. 그러니 그들이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을 한 켠에 느끼며 극장문을 나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애마부인’과 동일시하건(=결핍의 주체), 동일시하지 않건(=여성적 욕망에 대한 공포) 결과는 언제나 ‘결핍감’이다.

물론 그 ‘결핍감’이 체제전복적인 의지로까지 승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중의 ‘응시’가 결과적으론 체제유지에 봉사하는 것이 되겠지만, 언제나 체제(system)에는 오작동(malfunction)이란 게 있는 법이고, 혹 그 오작동과 무관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87년 4월의 정권의 ‘호헌선언’이 초래한 6월의 시민항쟁은, 체제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예기치 않은’ 오작동의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젖소부인>을 특징짓는 건 ‘포만감’이다. 그 포만감을 이 시리즈는 노골적이고 조야한 수준으로까지 전시한다(이 정도 사이즈에도 만족 못하겠느냐!). 때문에, 거기에선 은유의 성찰적 거리 혹은 (등장인물의 수준에서) 금지/위반의 긴장이 들어서는 대신에 환유적 욕망의 맹목성이 질주한다. 환유적 욕망? 라캉에 의하면 욕망 자체가 환유이긴 하지만, 하여간에 이 환유적 욕망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다시 지젝을 인용하면 “(성불능의) 부성적 인물(=남편)에 의해 트라우마를 입은 여주인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애마부인>은 모더니즘적이다. 반면에, <젖소부인>의 주체는 ‘소비사회’를 특징짓는, ‘병적인 나르시시스트’(<히치콕>, 18쪽)들의 응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애마부인>의 관객들이 대개 극장에서 ‘공동으로’ 영화를 보았다면(=욕망과 죄의식의 공동체), <젖소부인>의 관객들은 상당수가 밀폐된 비디오방에서 혼자인 경우가 많았을 것인바(=나르시시스트들), 여기서, 영화관/비디오방의 공간적 대립 또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에 상응한다. 참고로, <젖소부인>의 제작자는 이 영화의 극장용 판까지 기획했었는데, 아마도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리라(35밀리 ‘젖소부인’이라니!).

Romance

무슨 얘기가 이리로 흘러갔나? 브레야의 <로망스>가 왜 ‘로맨스’인가란 얘기를 하다가 ‘젖소부인’까지 들먹이게 됐군. <로망스>에는 하여간에 결말에서 ‘아이’라는 제3자가 등장하며, 따라서 이 영화는 일부 성기노출 장면에도 불구하고 ‘포르노’가 아니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남자친구(요즘은 보통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 무관심 속에 자신의 육체의 ‘용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문한다. ‘여성’은 여성 자신에게도 타자이기에(여성끼리의 동성애가 더 많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녀가 종국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정체성이다. 여기서도 그녀가 아이를 낳는 과정, 즉 엄마로서 ‘태어나는’ 과정과 ‘남자친구(=아버지)’의 ‘상징적’ 죽음은 겹쳐진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타란티노의 <킬빌>을 떠올린 건 그런 연관성 때문이다.

Anatomy of Hell

반면에, 신작 <포르노크라시>는 말 그대로 ‘포르노’인데, 그건 이 영화가 ‘고립된 섬’ 혹은 ‘기계들(automaton)’로서의 남성과 여성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여자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하려는 걸 한 남자가 목격하고 구해주게 된다. 그 대가로 여자는 남자에게 나흘 밤 동안 자신의 나체를 온전하게 전시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나체, 혹은 음부(‘숨겨진 보물’로서의 ‘아갈마’)를 내주는 것인데, 그 이후에도 남성은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 여자의 물음이면서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의 물음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남자가 어떤 여자와 하룻밤을 같이 자고도 여전히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것. 물론, 이런 물음 자체는 그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 혹은 절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영화의 결말은 그것을 입증한다. 남자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는 여자의 육체는 매혹이면서 동시에 지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포르노에 대한 지젝의 정의와 맞물린다. 지젝은 포르노를 아킬레스와 거북과의 경주에 견주는데, 아킬레스는 언제나 거북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 결코 나란히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보다 더 빨리 가거나 더 늦게 간다(때문에 성관계는 없다! 둘이 만나질 않으니까). 여성의 육체 앞에서 남성은 거북을 따라잡으려는 아킬레스처럼 조바심 친다. 하지만, 그가 막상 그 육체를 소유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 육체는 욕망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다. 그래서 언제나 매혹이고, 지옥인 것이지 그 중간은 없는 셈이다. 바로 포르노의 세계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것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아갈마에의 매혹!), 곧 지겨워지며 자신이 진창에 처박힌 것 같은 오욕감을 맛보게 한다(바타이유의 포르노그라피들은 그 ‘한계체험’을 다룬다). 왜냐하면, ‘매혹’이 어느새 ‘지옥’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디바’ 여배우들의 결혼이 자주 실패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2자적 세계, 혹은 포르노적 세계이다.

참고로,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은 대표적인 포르노 작가이다. <거짓말>의 원작인 <내가 거짓말을 해봐>뿐만 아니라(얼만전에 나온 그의 <전집>에는 빠져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포르노적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삼국지> 빼고). 물론 그의 작품들이 ‘포르노’라고 해서,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니다(나는 판금된 그의 책을 여러 권 제본해서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그건, 아이(제3자)를 갖지 않는 부부들을 전부 ‘위법’으로 구속하겠다는 발상과 마찬가지로 ‘오버’이고 정신 나간 짓이다. 아이를 갖건 말건,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물론 국가는 필요 때문에, 출산을 장려하거나 제한하기도 한다. 그건 또 국가의 일이다).

작가 장정일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서라도 스스로는 아버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들에서 ‘아이들’이 부재한 것은 그러한 ‘결심’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가족소설’이라는 근대소설의 ‘적통’에서 벗어나 ‘일탈적’인 소설들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2자적 관계를 근간으로 한 글쓰기, 그건 곧 포르노적 상상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에 정치적 포르노 영화가 존재한다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장정일의 원작을 장선우가 영화화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거짓말> 같은 영화들에서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이 내가 보기엔 장선우가 제일 잘 찍을 수 있는 영화들이다(그의 영화들은 ‘화엄경’이란 판타지를 들먹일 때마다 죽을 쑨다). 그러니까 ‘퇴폐적인’ 영화들이 그의 적성에는 맞아 보인다. ‘나쁜 영화’의 길로 끝까지 가지 않고, 자꾸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세상을 구제하려는 그의 선(善)에의 의지 때문에, 관객들이 매번 낭패를 보는 건 물론이고, 한국영화는 얼마나 큰 손실을 보고 있는 것인지!

다시, 브레이야. <포르노크라시>는 다른 ‘포르노’들과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빈약한데(<거짓말>의 내러티브도 얼마나 단순한가!), 그건 제3자가 이야기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로맨스’와의 결정적인 차이이면서,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포르노와 내러티브(이걸 ‘로맨스’나 ‘멜로드라마’로 바꿔불러도 된다)는 상호배제적이기 때문이다. 포르노에서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라기보다는 섹스를 위한 ‘구실’에 불과하며, 내러티브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포르노가 들어가선 안된다.



 

 

 

지젝은 <삐딱하게 보기>의 한 장에서('포르노그라피, 노스텔지어, 몽타주')에서 ‘노스텔지어적인 멜로드라마’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예를 드는데, 초반에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감미로운 키스를 나눈 후에 그들이 벌이는 정사(情事)가 말 그대로 적나라하게 포르노로 보여진다면, 이 영화에서 더 이상의 ‘멜로드라마’는 없으며, 더 이상의 ‘내러티브’도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 물론 선택할 수 있다면, 남성들은 ‘포르노’를 여성들은 ‘멜로드라마’를 더 선호할 것이다(나는 ‘남자’, ‘여자’란 말 대신에 일부러 ‘남성들’, ‘여성들’이라고 썼는데, 그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이다. 남자도 멜로드라마를 좋아할 수 있고, 여자도 포르노를 즐길 수 있다).



<포르노크라시>의 내러티브 또한,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한 초반 설정 외에는 나흘 밤의 나열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이 장면들에선 아무런 제3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포르노’이며 브레야의 상상력은 포르노가 ‘지배’(=포르노크라시)한다. 영화에는 좀 유치한 장면도 들어가 있는데, 벽에 걸린 십자가의 예수를 보여준 다음에 이어서 여주인공의 생리 피를 보여주는 식의 장면이 그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생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일 텐데, 두 남녀가 생리대에 묻은 피를 물에 타서 성수(聖水)처럼 같이 마시는 장면만큼이나 억지스럽다. 브레이야는 그런 ‘숭고한 희생’의 상징은 가져오면서 왜 그리스도의 ‘사랑’은 빼놓았을까? 왜 그녀는 남녀관계에서 ‘지옥’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것일까? ‘타인은 지옥’이란 건 사르트르의 맥심이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닌데 말이다. 56세의 카트린 브레야는 아직 너무 젊은 것 같다.

결론적으로 <포르노크라시>는 <로망스>와 병렬적인 자리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면, ‘퇴행적인’ 작품이다. 브레이야는 아마도 이 주제로는 더 찍을 영화도 없을 것이다(‘지옥’까지 갔으면 끝 아닌가?). 혹 <포르노크라시>가 ‘반면교사’적인 의도에서 찍은 영화라면 몰라도…

06. 01. 13.

 

 

 

 

P.S. 현재 출간된 포르노 관련서들 가운데 다섯 권 정도를 꼽아두도록 한다. 기본서는 단연 <프랑스 혁명과 가족로맨스>(새물결, 1999)의 저자이기도 한 역사학자 린 헌트의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책세상, 1996)이다. 최근 문화연구가 붐을 타고 있으므로 조만간 국내에서도 그럴 듯한 연구서가 나올 듯하다. 기다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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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앞으로 삼가하도록 하겠습니다(저도 그러고는 싶습니다!)...

로쟈 2006-01-13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일이 많을 때 딴짓도 많이 하지요.^^

헤르베르트 2006-01-1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애프터 목구멍 깊숙히'가 기대되네여. 딥쓰롯은 OST 또한 매우 좋은 명반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OST에 대해 끄적여보고 싶네여. 그나저나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들뢰즈는 영화배우 같이 생겼어여ㅎㅎ

palefire 2006-01-17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듯 잘 보고 갑니다. 생각하신 대로 브레이야는 <로망스> 이후 발전이 없는 감독입니다. <지옥의 해부>(국내에는 여성영화제에서 공개)는 그녀의 시선과 연출이 동어반복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듯해요. 결론은 로자님께서 파악하신 바로 그것인데 그걸 보여주고자 1시간도 더 되는 필름을 지루한 감정적 갈등과 육체적 관찰/마찰에 쏟아붓죠. 결론 하나를 증명하기 위해 이미지를 허비하는 건 참기 쉽지 않죠. 이게 지옥같고 권태롭다는 걸 그녀와 비슷한 방식으로 보여주다면 세드릭 칸의 <권태>가 차라리 낫고,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갈등과 선택의 모럴을 이미지와 서사의 전개와 짜임새 있게 연결시킨다면 에릭 로메르가 훨씬 나은 듯.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작년 베를린에서 미드나잇 상영으로 봤는데, 너무나 교과서적이고 연대기적이어서 생각보다는 밋밋했던 다큐였습니다. 건질 거라곤 <목구멍 깊숙히>의 클립들(생각보다 많지는 않음), 그리고 지금 쓰신 주제에서 랜드마크급 연구서인 [Hard Core]의 저자 Linda Williams가 출연해서 반가웠다는 것 정도네요.

로쟈 2006-01-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palefire님의 글(혹은 책)을 기다리는 게 더 낫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