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다솜이친구(180호)에 실은 '감각의 도서관' 꼭지를 옮겨놓는다. 1년간의 연재였기에 마지막 글이다. 2015년과 1915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를 비교해서 다루었다. 곧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로맹 롤랑이다. 알렉시예비치의 책은 더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다솜이친구(15년 12월호) 노벨문학상 100년의 시간

 

올해도 노벨문학상은 한국 작가를 비껴갔다. 프랑스에서는 공쿠르상, 영어권에서는 부커상 수상작이 더 주목받는다지만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으로서 노벨문학상이 갖는 상징적 권위는 우리에게 여전한 갈망을 낳는다. 1901년에 제정돼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가진 노벨문학상의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종종 확인해보는 것도 그런 갈망 때문일 것이다. 노벨문학상은 어떤 작가들에게 주어졌던가. 일례로 올해의 수상자와 정확히 100년 전인 1915년 수상자를 비교해보도록 하자.


2015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벨라루스의 여성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다. 지난해에도 유력한 수상 후보의 한 명이었기에 수상 자체가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순수한 의미의 작가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라는 점에서 수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스웨덴 한림원은 “다성 음악과도 같은 그의 저술들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기록한 기념비들”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국내에는 그 기념비들 가운데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두 권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1985년에 출간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알렉시예비치의 데뷔작이자 스스로는 ‘소설-코러스’라고 부른 장르의 출발점이 된 작품이다.


“알렉시예비치는 저널리즘의 형식을 초월해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했다”며 한림원 사무총장의 말대로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논픽션에 속하면서도 마치 소설처럼 읽히는 강렬한 매력을 품고 있어서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을 정도다.

 

말 그대로 알렉시예비치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은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낸다. 전쟁이라는 가혹한 현실과 맞부딪혀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던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 강력한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허구적 상상력을 압도하는 현실의 힘과 감동이 알렉시예비치의 문학을 구성한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은 문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1915년의 수상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프랑스의 문호 로맹 롤랑이다. 사실 노벨문학상은 초기에 톨스토이나 프루스트 같은 세계적인 문호들을 비껴감으로써 문학상의 권위를 스스로 저버린 면이 있었다. 첫 수상자였던 프랑스 시인 쉴리 프뤼돔만 하더라도 오늘날 그 이름을 기억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한국어로는 단 한권도 소개되지 않았다). 이후의 수상자들을 보더라도 세계적인 권위의 문학상이라기보다는 지역적으로 편향된 상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로맹 롤랑은 어느 정도 거장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작가였다.


우리에게 롤랑은 일찍부터 <장 크리스토프>와 여러 예술가 평전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바로 <장 크리스토프>가 롤랑의 대표작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작품이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재학생이던 시절에 이미 당대의 대문호 톨스토이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은 인연으로 문학에 입문한 롤랑은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일련의 전기를 집필한다. <베토벤의 생애><미켈란젤로의 생애><톨스토이의 생애> 등이 그러한 관심의 소산이었다.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상상적 인물의 방대한 전기를 완성하는데 <장 크리스토프>가 바로 그 작품이다.


독일 태생의 음악가 장 크리스토프의 일대기를 다룬 이 ‘대하소설’은 흔히 베토벤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모델은 작가 자신이었다. 롤랑은 베토벤의 전기에다 그 자신의 삶을 중첩시켜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위대한 예술혼의 생애를 그려낸다. 크리스토프는 술주정뱅이 음악가의 하녀 사이에서 출생하여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곡절 많은 삶을 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굴의 의지를 통해서 시련을 극복해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이름이 아닌 작품이 남겨지길 원한다”며 숨을 거둔다. 오늘날 롤랑의 이름은 잊힐지라도 <전쟁과 평화>에도 비견되는 그의 대작 <장 크리스토프>만은 더 오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15. 12. 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