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프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비록 모든 텍스트가 생산적 노동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모든 텍스트가 이러한 작업의 흔적을 동등하게 드러내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환영적인 구경거리에서는 예술의 질료들끼리의 이음매가 매끈하기 때문에 작업 흔적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실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캔버스 위의 붓 자국을 제거하여 작업 흔적을 없애 버리듯, 환영적 영화 감독들은 제작 과정의 흔적을 은폐시킨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들과 달리, 베르토프의 영화는 스스로 생산 과정을 표면에 드러낸다.  그것은, 발터 벤야민이 다른 맥락에서 말했듯이, 도공의 손자국이 도자기에 들어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로버트 스탬의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한나래, 1998) 중에서 혁명기 러시아의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1895-1954)에 관한 내용(128-131쪽) 발췌이다. 아마도 이전에 강의준비용으로 정리해두었던 듯한데, 파일들을 정리하는 김에 '창고'에 모아놓기로 한다.

 

베르토프는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에이젠슈테인과 함께 영화사의 두 가지 방향성을 대표했었는데, 여기서는 자세히 늘어놓을 수 없다. <영화운동의 역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화사들에서 베르토프에 관한 기본사항들은 참조할 수 있다. 들뢰즈는 <시네마: 운동-이미지>에서 베르토프에 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들뢰즈와 베르토프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뇌는 스크린이다: 들뢰즈와 영화철학>(이소출판사, 2003)에 번역된 논문들의 해설이 전문적이면서 수준이 높다. 러시아에서 나온 주목할 만한 연구서는 보지 못했으며, 영어권 서적으로는 블라다 페트릭(Vlada Petric)의 <영화에서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 in film : The man with the movie camera)>(캠브리지대 출판부, 1987)가 가장 훌륭한 개론서이다. 이론가로서의 베르토프는 현실에 대한 기록과 증언으로서의 영화의 기능을 강조한 '영화-눈(kino-glaz; film-eye)'론으로 유명한데, 감독으로서 베르토프의 대표작은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이다. 이하는 발췌정리.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복합적인 주제-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삶, 도시 생활 중의 하루, 영화의 완성과 상영- 는 사실이 영화의 중심 주제에 종속된다. 즉, 생산력의 연결망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영화의 메커니즘을 해부해 보이는 일이 이 영화의 중심 과제이다. 문학은 생산의 한 형태이고 문학 생산자들은 공장의 노동자와 다름없이 자신의 재료를 다루어야 한다는 러시아 형식주의 사회학자들의 주장을 영화에 적용시키면서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영화를 산업 생산의 한 분야로서 제시한다. 아네트 마이클슨은 이 영화가 영화제작 활동의 거의 모든 측면을 통상적인 노동의 종류와 조목조목 비교한다고 지적한다.

 

 

편집은 재봉과 비교되고, 필름 청소는 길거리 청소에 비교된다. 영화산업은 섬유 산업에 비유되는데, 마르크스는 후자가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모범적인 역할을 한다고 간주했다. 방적기가 자본주의 사회를 변형시켰듯이, 궁극적으로 영화도 사회주의 사회를 변모시킬 것이라는 암시가 이 영화 속에 담겨 있다.  작업 리듬과 움직임의 유사성은 이 두 가지 형태의 생산이 지닌 연대성을 보여준다. 회전하는 실패와 영사기 위에서 돌아가는 필름 릴은 편집에 의해 병치되어 보인다. 섬유 산업을 위해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수력 발전소가 카메라맨이 타는 차량의 동력 역시 제공함이 드러난다. 모든 면에 있어서, 영화는 사회적 생산이라는 집단적 삶의 일부로서 제시된다. 

 

베르토프에게 있어서 카메라 눈의 의무는 영화 속 혹은 실제 삶에서 발견되는 신비화를 해독하는 일이다.  베르토프는 ‘예술적 드라마’의 신비화를 특히 싫어했다.  이 영화 형식의 목적은 관객을 도취시키고, 무의식 속에 특정한 반동적 견해를 심어 놓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베르토프는 그러한 영화가 인민의 새로운 아편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스크린 속의 불멸의 왕과 여왕”을 타도하고 “평소의 일하는 모습을 찍은 보통 사람들”을 복권시키자고 주장했다.  그의 비난은 세 가지 종류의 비유, 즉 마술(“마법에 홀리게 하는 영화”), 마약(“영화 아편,” “영화관의 전기 아편”), 종교(“영화의 대제사장”)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들은 반환영주의 영화론자들의 논의에서도 자주 원용된다.  하지만 이 비유들은 그 시대의 역사적 현실에 구체적으로 기초한 것이다.  소외된 영화에 대항한 베르토프의 투쟁은 스탈린 이전 시기의 소비에트 혁명의 투쟁과 보조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활력이 넘쳤던 이 시기 타도 목표로 삼았던 세 가지 소외 형태는 농민 사이의 마법적 미신, 룸펜 사이의 마약 및 알코올 중독, 그리고 러시아 정교의 광범위한 영향력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영화 언어에 관한 영화인데, “대개의 영화에서는 숨기려 하는 영화적 수단들을 공개하고” “영화 기법의 문법을 지식처럼 전파하겠다고” 스스로 공언한다. 이 영화는 자기 재현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창작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를 생산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베르토프의 야심을 충족시킨다. 이 영화는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대신 영화 예술이 복잡한 의미 구축 행위임을 보여준다. 

 

 

많은 분석가들, 특히 아네트 마이클슨, 스티븐 그로프츠, 올리비아 로즈 등에 의해 정리된 베르토프의 자기 반영적 전략들은 다음과 같다.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 등의 도구를 끊임없이 표면에 드러낸다. 돌아다니는 촬영기사의 모습이 직접 영화 속에서 보인다. 렌즈/눈 그리고 셔터/눈꺼풀 간의 유사성을 시각적으로 계속 대비시킨다.  영화 촬영의 속임수를 노출시킨다.  영화적 움직임의 인공성을 강조한다. 평범하게 찍은 시퀀스 속에 애니메이션과 슬로 모션 기법으로 찍은 장면을 삽입시킨다. 이미지의 분할,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통해 환영을 깨뜨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관객의 지성에 호소한다. 요컨대 환영주의에 대한 공격이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처럼 창의적이고 비타협적으로 실행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06. 01. 11.

 

 

 

 

 

 

 

P.S. '영화의 혁명가 지가 베르토프'란 부제를 단 (이매진, 2006)가 드디어 우리말로도 출간됐다. "계속 공부하고 창조하는 영화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역자의 번역-노동의 산물이므로 믿을 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젠 베르토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게 더이상 쑥쓰럽지 않겠다... 

 

06. 0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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