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김기덕의 영화 <빈집>을 보고 쓴 소감을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환대의 윤리학과 유령의 존재론'이란 모스크바 통신에는 일기와 감상이 뒤섞여 있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감상'만을 따로 빼내오고자 하는 것이다. 약간의 첨삭을 가했는데, 나중에 오프라인용 글을 다시 쓰기 위한 '베이스캠프' 정도 되겠다...
낮에 <씨네21>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김기덕과 <빈집>에 관한 모든 것”이란 제목하에 정성일의 영화평과 김기덕과의 대담을 읽었는데(정성일은 아마도 임권택 이후에 김기덕과 가장 많은 시간의 대담을 나누고 있는 듯하다), 김기덕이 이 영화의 영어제목으로 고른 것이 <3번 아이언(3-iron)>이었다고. 그건 아마도 ‘빈집’을 이해하지 못할 미국 관객들에겐 적합한 제목인 듯싶다(그들은 이라고 옮길까?). 하지만, 당연히 이 영화에 더 적합한 제목은 ‘빈집’이며 러시아어 제목도 ‘푸스또이 돔’(=빈집)이다. 더불어 알게 된 건 두 주인공의 이름인데, 선화(이승연)과 태석(재희?). 여주인공의 이름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와 동일한데, 김기덕의 설명에 따르면 이름이 없던 주인공을 스태프들이 그냥 그렇게 부르길래 ‘선화’로 했다고(감독은 ‘善火’란 뜻도 된다고 덧붙였다). ‘태석’은 한 연출부원의 이름이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올해의 중요한 한국영화들, 그리고 내가 러시아에서 본 한국영화 3편, 즉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올드보이>, <빈집>은 모두 ‘2+1’, 즉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각기 다른 시각에서. 그 차이를 집약하고 있는 건 각 영화의 결말이다(결말이란 건 운동/혼돈이 제거된 가장 ‘안정된 상태’를 지시한다). <여자>에서는 세 사람이 각각 다 혼자가 된다(“우리는 저마다 다 혼자이다”). <올드보이>에서는 복수자인 유지태가 제거되고 오대수 부녀(연인)가 남는다(“가정을 이루는 건 두 사람이다”). <빈집>에서는 선화와 남편, 그리고 태석, 셋이 한집에 동거하면서 남는다(“가정을 이루는 건 세 사람이다”).
이러한 결말만을 놓고 보자면, 가장 상식적이면서 ‘영화적인’ 건 <올드보이>이다. 한 가정의 (질서를) 위협했던 ‘악’은 제거되고(물론 한 치의 혀를 대가로 지불한다), 가정은 보존된다(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인간 ‘관계’에 가장 회의적인 홍상수의 영화답게 <여자>는 모든 관계를 ‘미래’의 것으로 남겨놓는다. ‘현재’에 각자가 챙기는 몫은 자기 자신뿐이다. 따라서 <올드보이>가 관습적이라면(‘복수’야말로 가장 유구하면서도 관습적인 테마이다) <여자>는 모더니즘적이다. 거기에 비하면 가장 전복적인 건 <빈집>이다. 거기서 ‘안정된 가정’은 ‘세 사람’의 동거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빈집>의 줄거리를 자세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태석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그냥 한 ‘유령’ 같은 청년의 남의 ‘빈집살이’가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동인이다. 그는 나름의 노하우를 발휘해서는 남의 집에 들어가서 숙식을 해결한다. 하지만 무얼 훔치는 대신에 망가진 물건들을 고쳐주거나 빨래를 해준다. 즉 선의의 참견을 한다(김기덕의 고백에 따르면, 그가 ‘도둑’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 빈집에서 시켜볼 수 있는 게 빨래밖에는 없었다고). 그러다가 부유한 저택이지만 동시에 ‘빈집’ 같은 곳에서 남편에게 폭행당하며 죽어지내는 선화를 만난다. 여기서도 태석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이 집안일에 참견하는바, 그는 선화의 남편에게 골프공 세례를 퍼붓고는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선화를 데리고 2인조 빈집살이를 시작한다. 이후에 두 사람이 순례하는 빈집들은 현 한국사회의 축도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집이란 건 가족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배타적인 공간이다(우리집/너네집). 그런 자기만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한국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희생하며 간혹 목숨까지도 건다(한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집이고 집값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련한 집을 ‘행복한 집’(스위트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이란 주로 외부자/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비하는 것과 인테리어(interior)하는 것이다(집을 아예 ‘탑’으로 만들기도 하고 ‘궁전’으로 만들기도 한다. 타워 팰리스). 거기서 외부성의 배제는 행복의 조건으로 전제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폐쇄된 공간의 주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아마도 그들의 행복은 집 없는 ‘남의 불행’과의 대비 속에서만 얻어질 듯하다). 가령, 선화의 남편은 자신의 부(富)를 통해서 (아마도 모델이나 배우였을) 아내 선화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려고 하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건 영화 속에서 태석과 선화, 2인조 빈집살이 팀이 전전하는 집 대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빈집들은 행복이 비어있다는 의미에서도 ‘빈집’들이다. 유일한 예외는 한 한옥인데, 거기에서 비로소 (감독의 말을 빌면) ‘발 섹스’를 하면서 태석과 선화는 일체감을 느끼고 하나가 된다. 그 집은 다른 집들과 달리 폐쇄가옥이 아니라 개방가옥이었다.
이 점은 나중에 태석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선화가 ‘안식’을 위해서 다시 찾아갔을 때 이 낯선 이방인을 대하는 집주인 부부의 태도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다. 다만 쉬었다 가게 할 뿐이다. 즉, 그들은 외부인을 침입자로서 박대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환대’한다.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레비나스-데리다의 윤리적 요청이기도 한데, <빈집>은 그러한 ‘환대의 윤리학’, 혹은 윤리적 요청이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거기까지가 이 영화의 절반이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면 영화는 ‘잠언적인’ 차원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비록 태석이 ‘천사’로만 묘사되는 것은 아니며 ‘3번 아이언’의 모티브가 김기덕 영화다운 면모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고는 해도 말이다. 한 빈민 아파트에 들렀다가 태석과 선화는 (나중에 밝혀진바) 폐암으로 숨진 독거 노인을 발견하고는 염을 해서 매장해준다. 하지만, 뒤늦게 들이닥친 아들 가족에 의해 빈집살이가 발각된 두 사람은 경찰에 넘겨진다. 태석에게 ‘납치된’ 걸로 간주된 선화는 남편에게 보내지고 태석은 무단침입 등의 죄목으로 수감된다. 거기부터가 영화의 후반부인데, 이 후반부에서 주제화되는 것은 ‘유령의 존재론’이며, 이에 의해서 전반부의 환대의 윤리학은 보충되고, 이 영화의 힘은 배가된다.
이미 남의 빈집살이를 통해서 유령 같은 생활을 해왔지만, 태석은 감금된 독방에서 더욱 완벽한 유령-되기를 연마한다. 이 연마/수행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겨울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와 비교해 보더라도 <봄여름가을겨울>이 얼마나 관념적인가, 반대로 <빈집>이 얼마나 현실적이며 뛰어난가를 알 수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수행이 비변증법적인 ‘공부’인 반면에, <빈집>의 수행은 변증법적인 ‘학습’인 것('공부'와 '학습'의 차이는 다른 통신문에서 다루었다). 태석의 수행이 변증법적인 것은 간수한테 걸릴 때마다 매번 맞아가면서 학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석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며(시험해보면서/맞아가면서) 유령-되기를 터득해간다.
그 장면들에서 간수는 태석에게 그가 숨거나/없어지거나 하면 죽여버리겠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니까 사회로부터 격리돼 감금된 태석은 사회로부터 보여서는 안 되는, 즉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감옥 안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간수에게 반드시) 보여야 하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규정’ 자체가 이미 태석의 유령성을 강요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그는 사회에서 안 보이면서 보이는 존재여야 하며,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유령이기 이전에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미 유령인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둘은 등가이다. 즉, 사회적인 유령은 존재론적인 유령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영화 <빈집>은 그러한 메시지를 드라마화한 것이다(하지만, 이 영화를 그러한 드라마, 혹은 홍보문구에서처럼 ‘멜로드라마’로서만 제한/규정하는 것은 영화의 메시지를 부당하게 축소하는 것이다).
이 장면과 대조되는 것이 <올드보이>에서 세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는 (아마도) 유일한 장면인바, 거기서 오대수는 (나중에 딸로 밝혀지는) 미도와 관계를 갖고 나서 알몸으로 잠이 들고 유지태는 가스를 살포한 방에 방독면을 쓴 채로 등장해 두 사람 옆에 눕는다. 거기서 유령적인 존재의 역할을 하는 것은 복수자인 유지태인데, 이 <올드보이>의 ‘유령’이 <빈집>의 ‘유령’과 갖는 차이점은 유지태의 경우 태석과는 달리 사회학적 차원이 전적으로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그는 심리적 트라우마만을 가진 인물이다).
그걸 더 확장시켜 말하면, <올드보이>의 내러티브 공간은 어떠한 외부성도 갖고 있지 않다(그것은 폐쇄공간이다). 때문에, 관객은 영화 속의 어떤 인물과도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그것은 <빈집>의 인물들이 우리 주변, 혹은 우리 자신과 동일시되는 것과 대조된다. <올드보이>가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반면에(<올드보이>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한’ 영화이다), <빈집>이 윤리-철학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러한 바탕에서이다(<빈집>은 “당신의 집도 혹 빈집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불손한’ 영화이다).
남편이 출근한 뒤에 선화는 보이지 않는 유령 태수와 함께 하게 되고 둘이 같이 올라선 저울의 눈금이 0을 가리키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눈금에서 0은 시작점/영점이면서 동시에 완성을 의미한다, 가령 100).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는 마지막 자막과 함께.
이 영화를 같이 본 러시아 관객들은 40여명쯤 됐는데, 영화가 끝나자 박수를 쳐주었다. 나 또한 <빈집>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베니스에서 감독상을 받았지만, 나는 지난번 <사마리아> 수준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기대를 뛰어넘는 영화였다. 해서 말하건대, 이 영화는 김기덕의 최고작이다(<수취인 불명>을 나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본 평론가 정성일도 “감독님의 가장 좋은 영화”라는 평을 내린 걸 보면, 나의 단언은 허풍이나 과장이 아니다. *귀국 후에 <수취인 불명>을 비디오로 보았다. 나의 판단을 수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전까지 김기덕을 “가장 과대평가된 감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빈집> 이후는 “과대평가되어도 좋은 감독”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집>은 ‘김기덕 영화의 0도’이다.
영화가 끝나자 동행한 후배 역시 만족감을 표시했지만, 역시나 마지막 자막에 대해서는 좀 유치하다는 평을 했고, 나도 동감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라는 마지막 멘트는 이 깔끔한 영화에 남아있는 김기덕다운 군더더기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유령으로서의 태석은 꿈(환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다. 그러니까 ‘꿈’과 ‘현실’이라는 이항적 규정을 넘어서는 제3항이다. 이 제3항을 사회학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견인해냈다는 데 이 영화의 의의가 있다(환대의 윤리와 유령의 존재론을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빈집>은 데리다 철학의 탁월한 영화적 번안이기도 하다. 김기덕 자신은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걸 다시 이항적 논리로 환원시키는 것은 감독 자신이 무얼 찍은 것인지 잘 모른다는 얘기밖에 안된다(그건 물론 김기덕만의 불찰은 아니다. 창조자들은 종종 자신이 무얼 창조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종종 자신이 어떤 ‘괴물’을 낳아놓은 것인지 알지 못하며, 창조주는 대체 자신이 어떤 세상을 창조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전하지만, 그는 한쪽 눈을 감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해서 마지막 멘트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김기덕은 이승연이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 읽고서 태석이 선화의 환상이 아니냐고 말해서(즉 제대로 이해해서!) 바로 캐스팅했다고 하지만, 그게 말해주는 바는 이 감독과 여배우가 죽이 맞았다는 것이지, 그들이 이 영화와 태석이란 배역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얘기와는 무관하다. 한편으로 선화의 남편과 태석이란 두 남자가 <나쁜 남자>에서의 한기의 두 모습, 즉 두 분신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 듯한데, 나는 그러한 해석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일단 ‘나쁜’ 남편과 ‘착한’ 태석이란 이분법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뿐더러(태석에겐 ‘나쁜’ 면모도 있다. 그런 그의 이중성은 감독이 의도한 것이다), 계급적 간극이 이 둘 사이를 빗장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태석은 웬만한 차보다 비쌀 법한 외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아마도 그건 태석이 빈곤 때문에 어딜 털려고 빈집살이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듯하다. 하지만, 거기에 거꾸로 전제돼 있는 건 가난한 자들은 태석과 같은 ‘온순한’ 침입자가 되지 못할 거라는 주류적 고정관념이다. 김기덕은 그런 식으로 간혹 ‘중산층’ 의식을 드러낼 때가 있다. 맨 처음 빈집으로 등장하는 아파트가 감독 자신의 집이라고 하는데, 그는 어느새 그만한 평수의 ‘의식’을 공유하게 된 것인지?
몇 차례 지적한 바이지만, 김기덕 영화의 힘은 사회적 추방자들의 야생적 삶에 대한 묘사에서 나온다. 이건 현재로선 그만이, 혹은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이 찍는(다 찍었을 듯한데) <하류인생>도 같은 ‘소재’를 다룰 법하지만, “나쁜 놈들도 알고 보면, 다 본성은 착한 놈”이라는 식의 그의 ‘회고적 휴머니즘’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봉합’한다(그의 <노는 계집 창>이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보다 몇 십 년 뒤에 나왔으면서도 오히려 몇 십 년은 더 뒤떨어져 보이는 이유이다. 나는 임권택의 대표작은 <만나라>나 <서편제>가 아니라 <길소뜸>이나 (결말은 실망스럽지만) <티켓>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후자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그래서, 그는 ‘국민’감독인 것이지만, 거꾸로 (예상컨대) <하류인생>에는 ‘야생적 삶’이 담기지 않는 것이다(*귀국 후에 <하류인생>을 비디오로 봤는데, 나에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영화였다).
들뢰즈에 따르면, “(위대한 작가들이) 하는 것은 자신들의 표현수단이 다수언어에 대한 소수적 사용을 창출해내는 것이다.”(<비평과 진단>, 195쪽, 나는 가끔씩 이 책을 들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국역본을 다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하다. 다 읽을 수가 없는 책이기 때문에. 해서 허다한 ‘문학적’ 들뢰즈주의자들이 어디에서 자양분을 얻는지 궁금하다.) 즉, “그들은 단조(短調)가 영원히 불균형상태에 있는 역동적 결합들을 지칭하는 음악에서처럼 다수언어를 소수화한다. 그들은 이렇게 소수화한 덕분에 위대한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시 옮기면, “그들은 이 (다수의) 언어를 음악에서의 마이너(=단조)처럼 소수화한다. 음악에서 마이너는 끊임없는 불협화음 속에 존재하는 역동적인 결합을 가리킨다.”
<빈집>에서 태석은 ‘마이너’이며(남편에게 얻어맞은 선화 또한 ‘마이너’이다), 그의 침묵 혹은 묵언은 그 마이너의 언어, 소수화된 언어이다(듣기에,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티>는 이 마이너의 세계를 다수의 언어로 말했다). 김기덕이 훗날 (국민감독이 아니라) ‘위대한 감독’으로 기억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귀 기울임과 동시에 창출해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소수화된 언어이다(같은 묵언이지만, <봄여름가을겨울>에서의 묵언은 소수의 언어가 아니라 다수의 언어이다. 그건 절간의 ‘보편어’이기에. 해서 서로 놓여 있는 컨텍스트가 다른 두 영화의 침묵/묵언은 동일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즉 그 둘은 상동적(相同的)이 아니라 상사적(相似的)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봄여름가을겨울>은 가장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이며, 나는 그 영화를 지지하지 않는다).
정성일과의 인터뷰에서 김기덕은 자신의 차기작이 <나는 살인을 위해 태어났다>라고 밝혔는데, 주인공은 총이고, 여러 주인의 손을 전전하게 되는 이 자기의식적인 총은 (러시아제인지) 러시아어로(!) 말을 한다고 한다. 이전에 박중훈이 주연한 <총잡이>이란 영화는 있었지만, 총이 주연한 영화는 한국영화상 최초일 듯하다(세계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므로). 그 총에 대한 얘기가 다수의 언어로 풀어질지, 소수의 언어로 풀어질지는 얼마간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그런 착상이 어떻게 영화가 될지는 의문스럽지만, 김기덕은 매번 그런 걸 ‘멀쩡하게’ 영화로 만들어왔으니까, 좀 기다려보면 결과를 알 수 있게 될 터. 그건 김기덕의 열두 번째 영화가 될 것이다(*물론 이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열두번째 영화는 '총'이 아니라 '활'이었으니까)...
06. 01. 10.
P.S. 내가 <빈집>을 본 건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예술극장'에서였다. 눈짐작에는 아래 왼쪽 사진에서 왼편에 살짝 걸쳐 있는 건물이었던 듯(사진에선 집시 아이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아르바트 거리의 모습이다.
김기덕이 벌써부터 그런 ‘국민감독’의 길을 갈 채비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활>의 흥행성적으로 봐서 '국민감독'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물론 임권택 감독조차도 <천년학>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까 '국민감독'은 허울만 그럴 듯한 말인가 보다), 그의 ‘악어적 근성’이 퇴색/양보하게 될까봐 약간은 걱정된다(<봄여름가을겨울> 같은 영화가 이러한 근심을 낳는다). 나는 그가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소수자’(=마이너리티)의 감독으로 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역설적이지만, 그게 한국영화 전체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한 추방자/소수자들의 존재론적 지위가 <빈집>에서 규정되는바, 바로 ‘유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집>은 한국판 <디 아더스>이며, 하지만 그 철학적 함축에 있어서 <디 아더스>를 한참 뛰어넘는 영화이다(<디 아더스>는 궁극적으론 ‘타자의 발견’이 아닌 ‘자기발견’의 영화이니까). <빈집>의 ‘유령’ 태석 또한 그러한 추방자/소수자의 일원인바(그렇지 않다면,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재미’로 빈집살이를 하는 것이 된다), 굳이 그러한 신원을 모호하게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러한 점들이 내가 <빈집>에 대해서 갖는 약간의 불만이다.
어쨌든 간수의 충고대로 그림자마저 숨기는 법을 연마해서 완벽하게 유령적인 존재가 된 태석은 출감하자 이전에 들렀던 집 몇 곳을 돌아서(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의 유령-되기를 연습한 것이라고) 선화의 집을 찾아간다. 그의 출감 소식을 형사로부터 전해들은 선화의 남편은 잔뜩 벼르고 있지만, 유령이 된 태석을 볼 수 있는 건 선화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영화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는바, 그것은 선화가 남편과 포옹한 채로 태석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키스하는 장면이다(<빈집>의 포스터는 이 장면의 또 다른 변형이다). 선화가 남편과의 관계를 버틸 수 있는 건 태석이라는 ‘유령’을 매개로 해서이다. 그것이 함축하는바, 유령을 집안에 들여놓을 때, 유령적 존재로서의 외부자/침입자를 환대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그나마 견딜 만한 것이 되고 행복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