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연말연초 며칠간을 정현종 읽기에 할애하고 있다(덕분에 정현종에 관한 페이퍼를 몇 개 쓸지 모르겠다). 주로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출간되었던 <정현종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 1999)와 작년 그의 정년을 맞아 출간된 <영원한 시작>(민음사, 2005)에 실린 글들과 함께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 1991)에 실린 김현의 글들을 읽는 건데, 물론 그의 시집들을 읽는 것도 포함해서이다(강의의 가장 좋은 점은 책읽기에 대한 '강제적 의지'를 수반한다는 데 있다. 게으른 천성을 알기 때문에 나는 종종 자발적 등떠밀리기에 나서는데, 그걸 '적극적 수동성'이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수동적 적극성'이라 불어야 하나?).

 

어쩌다 보니 정현종의 시들을 많이 읽게 되었지만, 나는 역시나 1999년에 출간된 2권짜리 <정현종 시전집>은 안 갖고 있다. 그건 1972년에 나온 첫시집 <사물의 꿈>(1972)를 제외하고는 이후에 출간된 거의 모든 시집을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아직 '현역'인 그의 시작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에 '전집'이 갖는 의미가 불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가장 적절하지 못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시는 우리에게 오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시 속에서 살고 또 시는 우리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공기나 햇빛 또는 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지만 나무는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그 속에서 수많은 작은 태(胎)와 씨앗을 품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태이듯 시의 공간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태이며 씨앗입니다. 특히 시의 언어는 다른 종류의 언어에 비해 이러한 태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감동한다는 것, 시를 읽을 때 우리의 감정과 의식이 팽창한다는 것은(아이를 밴 배에 대한 연상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듯이) 시적 언어의 공간이 우리를 뱄다는 이야기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는 말에 다름아닙니다. 시는 새로운 존재의 모태입니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니 오늘날에는 더욱더, 사람의 새로운 탄생에 대한 요구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요구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세계가 살 만한 과정이며 살 만한 자리이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와 우리의 접촉양상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를 숨쉰다고. 우리는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쉽니다. 시를 숨쉰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그 말 이외의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는 말입니다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마치 무용가가 높이 뛰어올라 용약(踊躍)의 정점에 이를 때 중력으로부터 해방되듯이 시는 우리의 마음에 숨을 불어 넣어 정신으로 하여금 용약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무거움에서 해방합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해방이나 열림의 순간을 체험케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자유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숨이란 또 활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사실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은유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세계의 도처에서 죽음을 봅니다. 실제 죽음은 물론 산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도 미만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감수성이 충분히 신선하고 민감할 때 우리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는 이러한 신선함과 민감성을 회복시키는 숨결입니다. 시는 우리를 마비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또한 생명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쉰다고 말하는 것도 위와 같은 연유에서이며 그래서 시를 산다는 말도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숲이 산소의 원천이듯이, 시의 숨의 원천, 따라서 우리의 숨의 원천이 꿈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꿈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써왔습니다. 약 10년전 나는 <사물의 꿈>이라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에세이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나의 믿음은 사물이 꿈이 곧 나의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의 시적 대상들, 내가 노래하는 것들은 나를 통해서 그들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를 유추적 언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만, 내가 나이면서 동시에 나무일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와 나 아닌 것, 이것과 저것,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이면서 동시에 자기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입니다. 시를 가리켜 예술과 역사, 인간과 자연, 성(聖)과 속(俗)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하는 까닭도 그런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의 긴장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있어야 하는 것은 있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을 낳기 시작합니다.(...) 꿈은 그러니까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에 있는 어떤 공간이며, 시가 꿈의 소산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을 연결하는 운동이며 접합의 현장입니다.


결핍은 괴로움이고 충족은 기쁨입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가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뭔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인데, 이 결핍은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하고 노래 부르게 하며, 여기에 노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가난하더라도 꿈은 가난한 법이 없으며 그것이 노래인 한 그것은 슬픔의 꿈을 충족시키며 기쁨의 아늑함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든 창조행위가 그렇겠습니다만, 시를 쓰는 일은 어렵고 괴로운 일입니다. 이 괴로움은 사물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자 할 때 오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예컨대 우리가 자유를 그리워하고 평화를 그리워하고 사랑과 정의를 그리워할 때 그리고 시인이 그 그리움을 노래할 때 시인 자신이 다름아니라 자유요 사랑이요 평화이어야 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시는 모순과 갈등이 부딪쳐서 화해하는 현장이며 이것과 저것,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이 만나는 현장입니다. 부딪치면 아프고 화해하면 기쁩니다. 시인의 고통은 ‘이상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과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의 꿈의 실현을 유예하면서 미래화하지만 지복(至福)의 순간을 허락하는 시는 우리의 현재를 탈환하고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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