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는 1994년초에 나온 진이정(1959-1993)의 유고시집이다. 시인은 그 전해 가을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졌고, 나는 그해 가을에 그의 시집을 읽고 일기에 몇 마디 독후감을 남겼다. 지난주 책정리, 복사물 정리를 하다가(대부분 갖다버리기 위해) 이젠 파일도 남아있지 않은 그 독후감의 프린트를 발견했다. 글의 말미엔 94. 10. 20.이라고 씌어 있다. 그 독후감의 제목이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의 세계 혹은 허망한 나라'이다. 그 덕분에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10여년 전 기억의 저편이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겠다. 다시, 10년쯤 후에 돌이켜보기 위해서 이 또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즐거운 책읽기'로 분류하기엔 내용이 너무 우울하다).

진이정의 유고시집, 아니 그냥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읽는다. 도서관에서 비려온 책이라 오늘 반납해야 한다. 엄정화의 노래 '눈동자'를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유하의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3)에 삽입된 노래이고(*음악은 신해철이 맡았다), 그 영화를 소개하는, 아니 영화보다는 젊은 감독을 소개하는 무슨 '인간시대' 같은 프로에서 나는 진이정을 보았다(*진이정은 유하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다. 그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지난봄이던가 아니면 작년 어느때이다(*작년 어느때이고 사인이 폐결핵인지 영양실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는 뛰어난 시인은 아니다. 몇 사람이 그의 유고 특집까지 만들어 책을 냈지만 시에서만큼은 대단하지 않다. 가장 쉬운 말로 하면 절제되어 있지 않고, 가장 뻔한 말로 하면 시적 언어의 밀도(재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걸 요설적이라고도 하고 너무 풀어져 있다고도 한다. 건성으로 읽은 바에 기대면 기지촌에서의 어린시절과 불행한 가족사 따위에 그는 너무 억눌려 있다. 시적 소재로서 그가 다만 그러한 기억들을 가져온 것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상상력의 비약이랄까 자유 같은 것이 그에게는 위축돼 있다. 그래서 너무도 직설적으로 허무하다고 말한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아트만의 나날들') 그 '거꾸로 선 현실'이란 아마도 시일 것이며 그것은 그의 말대로 '허망한 나라'(!)이다. 그는 그 '허망한 나라'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연작 10편을 차례로 읽는다. 읽으면서 나의 눈길을 붙잡는 부분들만을 옮기겠다. 먼저,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 시의 세상이라는 걸 밝히고 있는 부분: "나는 운수를 믿는다 바다 없이 항해할 때처럼/ 눈물도 없이 운다 울었다/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 허나 고런 때래야,/ 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거꾸로 1')

시인은 제대로 된 세상에서는 팔아먹을 것이 없다. 팔아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걸 말한다. 이 결핍을 그는 꿈으로 보충하지 않는다. 결핍을 보충하는 꿈이란, 나도 언젠가는 남보란 듯이 폼잡고 살 때가 오리라는 믿음을 혹은 갈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꿈조차 포기한다. 그는 그 꿈을 거꾸로 세운다. 그리하여 그 꿈이 가리키는 방향은 이젠, 보다 나은 현실이 아니라 그저 시이다. 시일 따름이다. 그것은 겨우!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어서 꿈을 품팔이하려는 시인에게, 그러나 시는, 우리의 잘난 시는 얼마나 냉정한 것이랴!)

그의 인생: "미안해, 나는 성욕을 딱 잃고 말았다/ 왜 사람들은 날 걱정할까/ 순두부처럼 살고 싶었다/ (...)/ 몽정의 나날이여, 꿈의 정액이여: 어디 마땅한 질을 찾아가거라."('거꾸로 2') 거꾸로 선 세상의 시민이 되기로 작정한 시인에게 현실에서의 성욕이란 생존에의 욕구 만큼이나 부질없다. '순대 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현실이 싫고, '똥폼과 장난 속에서 교살되는' 현실의 예술'(=제대로 된 꿈)이 싫다. 그는 그런 일들에 속아서 결국 그의 인생이 '소위 보람있다는 일로 낭비되었다'는 걸 이제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다. 그는 그래서 투덜거린다: "진짜 연애, 진짜 아이, 진짜 인생에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구호식품에 의존해 있으므로, 시인이다."('거꾸로 4')

그는 환멸과 자조에 의지하여 삶을 버틴다. 아니 그런 삶을, 그러나 그는 진짜 시인의 삶이라고 우긴다. 자신의 무지와 무기력을 변명하면서: "나, 걸어가리라, 허망을 딛고, 낯선 인연을 따라서/ 백과사전도 없이, 나는 지식인 노릇을 한다/ 나를 가르친 건 휘중당의 담쟁이 덩쿨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참기만 해왔어/ 그게 인생이란다; 개 같은/ 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끼는 분들께,/ 나는 변하지 않으렵니다"('거꾸로 5') 그리고 그는 정말로 변하지 않았다! "엇박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의 인생. 그는 그저 대책 없는 횡설수설로 시간을 죽인다. 그리고 자주 운다: "눈물의 성분엔 미량이나마 진리가 들어 있는 듯해/ 울고 나면, 천국에 들어온 느낌"(그의 죽음이 몇 사람을 천국에 보냈는지?)

그의 종말: "음식이 들어가면, 내 몸이 화를 낸다/ 사실은 마음의 분노이리라". 의학적으로는 신경성 거식증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자해(自害)를 시인은 묵인한다. 이제 그의 인생이 바야흐로 종말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마음의 세 허씨("허전해, 허무해, 허망해")가 한몫 거든다(*5공때 잘나갔던 '쓰리 허'를 떠올리게 한다. '허전해, 허무해, 허망해'는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들이 만든 세상의 이면, 즉 '그늘'이기도 하다). 왜 세상이, 삶이 허전하고 허무하고 허망한가? 그것은 자존심의 근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것이 나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는데/ 이제는 믿을 게 없다"('거꾸로 9') 대개의 자존심이 그러하듯 시인의 자존심도 제법 유치한 것이지만, 그러나 인생이란 게 너무 자주 유치해지곤 하니까 시인을 탓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는 자진하여 윤회의 길을 떠났다: "날 말려줘, 날 때려줘, 날 눕혀줘"라고 시인은 애원했지만 아무도 귀답아 들어주지 않았다. 세상 또한 시에 못지 않게 냉정한 것이니까...

진이정의 시 읽기를 끝낸다. 59년생. 34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들은 건성으로나마 읽으며 뒤늦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지닌 여성 콤플렉스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정결 콤플렉스. 그의 시이에는 타락한 여성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나온다. '포르노의 진리' 앞에서 위축된 시인은 장가를 가라는 주위(특히 어머니)의 요구에 "저 이제 여자의 맛을 잃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도피'는 그 안에 뜨거운 갈망을 숨기고 있는 것이 예사이다. 그의 비논리적인/요설적인 연상들에 의거한 시들은 한편으로 이러한 갈망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이런 방향에서 그를 읽은 글이 있나 찾아봐야겠다.(*아래 사진은 플라스틱 포르노 전시회를 알리는 러시아의 광고 포스터)

기억에, 이후에 내가 그런 글을 더 찾아본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을 옮겨두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올해 부산일보의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이 진이정론이다. '실존적 헤르메스의 탄생: 경계의 시학 -진이정의 시세계'(박대현). "모리스 블랑쇼가 예술가를 일컬어 '죽음을 자기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라고 했을 때,예술가는 죽음을 '낯선' 것이 아닌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통해 삶을 사는 자로서의 질적 전환을 이룬 존재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블량쇼는 문학에서 죽음이란 주제의 문지기이다), 나의 독후감보다는 '본격적인' 이 평문의 결론만을 여기에 옮겨둔다. 혹 얻을 것 없는 나의 글에 허기진 독자들이 계실 듯하므로(괄호안의 숫자는 시집의 쪽수일 것이다).


진이정은 해탈욕망의 경계에서 다시 실존의 그리움을 뿌리치지 못하고,'옛 장의사 자리엔 무지개 룸살롱이 들어와 있'고,'잠자는 죽음의 코털을 건드린 줄도 모르는'(105) 자본주의 문명의 속악한 진창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진창이란 '짜장면 젓는 폼만 보아도 양갈보 똥갈보를 용케 구분하던 양민들'(115)과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이 살았으며,'외국군대에게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66)고 '민족반역자들이 출세하'(78)는,'개같은/ 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78)낄 수밖에 없는 '식민지' 현실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거지가 강남 중산층보단 행복'(44)할 만큼 비참한 현실이다.

죽음을 한껏 체험한 자에게 진창의 현실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죽음으로 인한 실존의식과 초월(해탈)의 욕망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착되는 것일까? 그러기엔 진이정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의 실존적 상상력 속에서 너무나 치열하게 살아 숨쉬고 있으며,그 자신을 생생한 현실의 환부 한가운데 서 있게 한다.

데뷔작 '일터에서 보낸 편지'(주:진이정은 '민중시대의 문학적 실천'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이 사실은 진이정이 해탈이라는 관념의 세계를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개혁과 구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과 맞물려 현실과 해탈이 뒤얽히는 실존적 상상력이라는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에서 알 수 있듯이, 진이정의 시세계는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하여 육체적인 유한성에서 비롯된 실존적 자각과 해탈의 관념까지 아우르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관념적으로 흘렀다는 비판적 논의보다는 보다 폭넓은 세계관으로 확대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와 죽음,그리고 근원에의 절망적인 탐구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세계는 관념성을 극복하고 시적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해탈의 상상력과 죽음의 감수성을 치열하게 보여준 진이정이지만,그가 지닌 시세계의 근저에는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자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단전호흡은 우리 사장님의/비술입니다/할딱거리면서/간신히 횡경막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는/저희들의 숨쉬기와는 질적으로 다르지요/지난번 조회시간에 사장님은/고맙게도 자신의 호흡법을/저희들에게 소개를 했는데요/(…중략…)/그 때부터 우린 감히 사장님과 마찬가지로/단전호흡을 시작했는데요/우리 공장에 있던 분진,카바이트,납,소음,악취가/어느새 기가 되어/이제 우리들의 단전 속으로 모두 들어와 있고/언젠가 심부름 가는 길에 보았던 사장님 댁의/안뜰같이/세상은 다시 청정해진 것처럼 우리들의 눈에는 비쳤답니다 안녕('일터에서 온 편지' 중,<실천문학>, 1987)

단전호흡을 매개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선명한 계급적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위 시에서 진이정이 등단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시적 세계관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나머지 데뷔작 '사슴목장에서 온 편지''무허가 시장''상도동 무당집에서'에서도 노동자가 시적 화자로 등장하거나 시의 제재로 쓰이고 있다. 죽음이 그의 육체에 스며들기 전,그는 민중 문학적 실천을 통해 사회변혁과 개조를 이루어 내고자 하는 민중시인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가 병들어 가면서,개조되어야 할 이 현실은 점점 추억의 공간으로 전화된다.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이 생생한 현실은 추억이 되고 마는 것이다. 폐질환으로 인해 죽음을 서서히 확신하던 그는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19)에서 '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20) '유년의 기지촌'(18)을 추억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현실이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생하게 되살아나며,더 나아가 '아아 이 몸은 그 진창의 아들일 터이니'(115)라고 절규한다.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해탈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했던 그가 다시 되돌아보는 이 현실의 추억은 그를 '감전'(57)되게 한다.

그의 추억은 너무 생생하다. 너무 생생해서 '악몽이다'. '크레용의 햇님이 고향을 북북 문대'(17)던 진창 속의 연꽃 같은 어린 시절까지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추억실조'(16)에 걸려 있다고 엄살을 떠는 걸까? 그의 추억은 그의 사회과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한 '진창',죽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추억 다오/나는 추억 거지/나는 추억 부랑자'(17)라고 절규한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고 말했던 기형도나 '나는 사라진다/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는 종시를 남겼던 박정만과는 달리,해탈의 관념에서 다시 현실의 '진창'으로 되돌아온 그는 '남자인 희망의 입 속으로 혀를 들이'밀고 '희망을 아직 그녀라고 부르'는 '희망의 호모'(51)가 되어 '슬픔의 화폐개혁'(36)을 꿈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지만,그의 죽음조차 그 꿈을 걷어 들일 수 없었다.

눈물도 없이 나는 운다 울었다/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허나 고런 때래야,/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 중)

이미 죽어버린 그는 '눈물도 없이' 운다. 살아생전 이미 죽음에 깊숙이 침잠해 버린 그의 어조는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해서 말하는 듯하다.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란 이미 죽어버린 그가 꿈꾸는 이 세상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가끔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가끔 나는 바로 선다') 그런 때라야,겨우 시가 되는 것! 죽음을 체험한 자만이 이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전언! 이 전언은 그의 다른 시구를 통해서도 암시되고 있다.

나는 건넌다,다리는 곧 없어질 터이다/사라진 다리로 돌아올 테다/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겠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8' 중)

삶 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계의 신이지만,이미 죽음을 체험한 '실존적' 헤르메스의 모습으로 그는 돌아온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이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진이정은 헤르메스를 닮았다. 하지만,그는 속악하고 추악한 이 현실을 이해할 수는 없으되 버릴 수 없는 실패한 헤르메스이며,삶의 경계를 넘어 '영원'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실존적 헤르메스다. 그는 실존의 피가 뜨겁게 살아 숨쉬는 현실의 우리에게,'살아있던' 그가 듣고 싶어 했던 '시인의 목소리',즉 '이미 저승에 가버린 시인들의 목소리'(51)를 이미 '죽어버린' 그가 들려준다. 그리고 '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며 비로소 삶과 죽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구토를 걱정할' 만큼 '시인의 기침은 너무 상투적이'고,'기계로 쓴 시를 읽는 사람들,뜬소문처럼 우주에 떠 있'(70)는 삭막한 시대이기에 '거꾸로 선 꿈' 속을 헤매는 그의 목소리는 우리의 귓전을 내내 울릴 것이다. 다만,유하의 말대로 '이 추억의 저녁을 지나,마침내 울음이 나를 버릴 때,/세상의 병을 다 앓고 난 마음이/내 안의 그대를 영영 데려'(유하 '상수리나무숲에서')간다면,우리는 더 이상 '다시 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19) 인생을 앓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죽은 시인의 전언은 무섭다. 진이정이 남긴 시편들은 무섭고 눈물겹다. 그의 죽음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오랜 공명을 가지고 폐부를 울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사소한 그림자 하나하나에도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잎이라고 눈이라고 풀씨라고'(14)라고 명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진이정의 시편들은 그가 가진 이 세계의 눈물겨운 사랑이 어떤 것이었나를 보여준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검은 강물에 서서히 가라앉는 자만이 토해 낼 수 있는 육성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진이정이 남긴 시편들이 (무섭지는 않지만) 눈물겹다는 데 동의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진이정과 비슷한 연배이면서 조금 먼저 보여준 이가 그보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뜬 기형도이다. 이젠 나보다 한참(?) '젊은' 시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0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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