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418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황광우의 <철학의 신전>(생각정원, 2015)을 다루고 있다. 지면 개편에 따라 시사IN에 싣는 서평은 이번 호가 마지막이다. 부담을 덜게 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마지막 서평이라고 우여곡절도 없지 않았는데, 내게는 최단 시간 동안 읽고 쓴 서평으로도 기억될 듯싶다.
시사IN(15. 09. 19) 두 그리스 거장의 이종격투기
서양 고전이라면 곧바로 떠올리게 되는 책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플라톤의 <국가>다. 인문교양의 척도로 이 두 권의 독서 여부를 곧잘 들먹인다. 하지만 좋은 원전 번역서들이 나와 있음에도 <일리아스>와 <국가>를 ‘독파’하는 것은 일반 독자들에게 여전히 부담스러운 숙제다. 분량도 방대한데다가 아무래도 고전을 둘러싼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좋은 번역과 함께 그 장벽을 조금 낮춰줄 수 있는 적절한 가이드가 필요한 이유다.
<철학 콘서트>의 저자 황광우의 <철학의 신전>은 일단 이런 용도의 가이드북으로 다가온다. ‘고전 읽는 교사들’과 ‘철학하는 엄마들’ 등의 공부 모임을 이끌면서 고전을 강의해온 저자가 바로 이 <일리아스>와 <국가> 두 권의 책을 오랫동안 같이 읽고 궁리한 바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이다. 각 고전에 대한 시범적 독서로도 의미가 있는데,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호메로스와 플라톤 사이에 한판 대결을 붙인다. ‘삶과 죽음, 영혼과 신을 둘러싼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대결’이란 부제에 충실하자면 이 책의 독서는 그 대결의 관전기가 되어야 할 듯하다.
이미 상식이 되어 있지만 먼저 시비를 건 쪽은 플라톤이었다. <국가>에서 그는 시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훌륭한 사람들마저도 망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예 <국가>의 마지막 10권에서는 시와 철학 사이의 오랜 불화를 상기시키면서 자신의 이상국가에서는 시인이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불화와 대결 구도를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사를 엮어온 두 새끼줄의 엉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지 시와 철학 사이의 시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두 세계관의 맞대결이었다.
과연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생각은 얼마만큼이나 서로 달랐던가. 일단 인간 존재에 대한 기본 이해에서부터 둘은 차이를 보인다. 신이 불멸의 존재인데 비해 인간은 필멸의 존재다. 필멸의 존재라는 것은 죽음이 인간의 운명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호메로스는 이런 운명에 냉담하다. 일례로 전장에 나서는 헥토르는 만류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느 누구도 내 운명을 거슬러 나를 하데스에 보내지 못할 거이오. 하지만 태어난 이상 인간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오.” 곧 죽음은 태어난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와 다른 사생관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죽음은 신들 곁으로 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플라톤에게 육체와 영혼을 상호 대립하는 개념으로, 육체는 사멸한다 할지라도 영혼은 해체되지 않고 불멸한다. 반면에 호메로스는 그런 영혼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예 ‘영혼’을 지칭하는 특별한 단어를 갖고 있지 않았고, 호메로스의 프시케는 죽는 순간 사람을 떠난다. 플라톤은 이승과 저승에서 혼의 동일성이 유지된다고 말하지만, 호메로스에게 저승은 영혼이 추방되는 곳으로 이승의 삶과는 무관하다.
신에 대한 생각도 전혀 달랐다. 플라톤에게 신은 아무런 흠결도 없으며 모든 좋은 것의 원인으로서 선을 본성으로 한다. 반면에 호메로스의 신들은 절대자도 초월자도 아니고 각자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세상사에 개입한다. 이렇듯 전혀 다른 관념을 플라톤과 호메로스가 대표할 때, 저자의 결론은 무엇인가. 그는 기독교로 전승된 플라톤주의에 맞서 호메로스의 정신을 회복하자고 제안한다. ‘호메로스의 아이’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철학자들, ‘자유로운 정신들’은 ‘늙은 신이 죽었다’는 소식에 새로운 아침놀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15. 0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