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은 거의 신뢰할 수 없는 번역이지만(나는 이전에 밝힌 바대로 '비평과 진료'란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들뢰즈의 대표적인 비평문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참조하지 않을 수도 없는 책이다(그의 마지막 책이기도 하다). 오독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나는 영역본(1997)과 러시아어본(2000), 그리고 (간혹) 불어본을 참조한다. 다른 비평문들을 다루기에 앞서 일단은 제1장인 '문학과 삶'을 읽고 정리해두는 것이 나의 오래된 '숙제'인데, 오늘은 워밍업으로 '머리말'을 읽어보기로 한다. 이 머리말은 네 개의 문단으로 구성돼 있는데, 먼저, 국역본의 첫 문단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텍스트들 중 일부는 미발표 원고이지만 나머지 다른 텍스트들은 이미 발표된 것들이다. 이 텍스트집은 몇몇 문제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다. 글쓰기의 문제: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것처럼 작가는 언어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어느 면에서는 낯선 언어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문법적이거나 통사적인 새로운 힘들을 내보인다. 작가는 언어를 그 관습의 밭고랑 밖으로 끌고가 언어를 정신없게 만든다. 하지만 글쓰기의 문제 역시 보기(voir)와 듣기(entendre)의 문제와 따로 떼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다른 언어가 언어 속에 만들어질 때, 언어 전체야말로 '반(反)통사적'이고 '반(反)문법적'인 한계에 가까워지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밖과 소통한다.(13쪽)
핵심은 인용된 프루스트의 말처럼, 작가는 언어 속에서 새로운 언어, 일종의 외국어(낯선 언어)를 창조/발명해낸다는 것. 이를 위해서 그들은 새로운 통사적, 문법적 힘(역량)들을 선보인다. 이때의 힘(power; puissance)은 어떤 잠재력이며 작가는 그러한 언어 속의 힘을 가시화/현실화한다는 것. 어떤 방식으로? 관습적인/일상적인 밭고랑 바깥으로 언어를 끄집어냄으로써, 언어로 하여금 정신없게, 정신 못차리게(delirious; delirer) 만듦으로써이다.
시대적인 문맥을 제외하면,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논길을 걷는 어른-화자'(=언어)를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만드는 것이다(작가는 '봄 신령'이 되겠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이때 글쓰기(writing)의 문제는 보기(seeing), 듣기(hearing)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즉, 문학은 뭔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듣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에서의 표현을 빌면, 그건 '푸른 웃음, 푸른 설음'을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푸른 웃음? 푸른 설음? 이러한 '시적 허용'은 비록 규범적인 통사나 문법의 테두리 안에 놓여 있지만, 의미론적으론 반-규범적이다. 언어 안에서 다른 언어(another language)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언어가 통째로 규범성의 한계 너머/바깥과 소통한다는 걸을 뜻한다. 그럼, 이 한계/바깥이란 무엇인가?
-한계는 언어의 밖에 있지 않다. 한계야말로 언어의 바깥인 것이다. 즉 한계는 비언어적 보기와 듣기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언어만이 보기와 듣기를 가능케 한다. 말들을 뛰어넘는 색과 소리의 효과처럼 글쓰기에 적합한 회화와 음악도 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바로 말들을 통해서, 말들 사이에서이다. '이면에 숨은 것'을 보거나 듣기 위해서는 '언어의 구멍을 파야 한다'고 사뮤엘 베케트는 말하곤 했다.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해서 말할 때는 귀가 뚫린 사람이라거나 눈이 밝은 사람, '잘못 보이고 잘못 평가된 사람', -색채주의자, -음악가라는 말을 곧잘 쓴다.(13-4쪽)
들뢰즈가 말하는 언어의 한계/경계는 언어의 바깥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그 한계/경계 자체가 바깥이다. 즉 그것은 언어가 아닌 '보는 것', '듣는 것'들로 구성되지만, 오직 언어만이 그러한 보기/듣기를 가능하게 한다. 요컨대, 언어이면서 언어가 아닌 것, 그게 언어의 한계이며, 문학은 언어를 그러한 한계로 밀어붙인다.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기진맥진한 상대방을 코너쪽으로 밀어붙이듯이 말이다. 이렇게 해서, 회화와 음악은 글쓰기의 특징이 된다. 즉, 회화적인 글쓰기, 음악적인 글쓰기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단어(말)들을 통해서이다. 베케트의 표현에 따르면, 이건 (규범적인) 언어의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언어 속에서 뭔가 다른 것이 보이고 들릴 테니까. 해서, 모든 작가는 '뭔가를 보는 사람'이고, '뭔가를 듣는 사람'이며, 칠쟁이이고 딴따라이다.
-이러한 보기와 듣기는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재창출되는 역사와 지리의 형상들을 형성한다. 세계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들을 이끌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역사와 지리를 만드는 것은 바로 착란과 열광이다. 그건 언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착란이 임상학적 상태까지 회복되면 말들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역사, 색, 노래를 잃어버린 밤 말고는 그 말들을 통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문학은 일종의 건강이다.(14쪽)
문학의 글쓰기가 내보이는 보기/듣기는 사적/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일종의 역사와 지리(혹은 지층)를 갖는다. 그러한 지리와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착란(delrium; delire)이다. 즉,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혼이다. 단어(말)들을 우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몰고가는 과정. 마치 야생마를 몰듯이. 이문세의 <야생마>가 여기에 걸맞을 듯하다.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린다/ 잊혀져 가는 맑은 꿈을 찾아서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싶어서/ 바람이 부는 대로 달려간다
아무도 내 마음 모를 때/ 때로는 슬프고 혼자서 가는 길이 너무나 외로워져도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린다 꿈속에 보던 날개를 찾아서
멀리 저멀리 타오르는 태양이 내젊은 가슴을 부르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싶어서 오늘도 쉬지 않고 달려간다
때로는 거친 바람과 소나기 맞으며
혼자서 가는 길이 너무나 외로워져도
가다가다가 쓰러진다고 해도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
누구보다도 멀리 가고 싶어서 오늘도 쉬지 않고 달려간다
문학은 그렇게 쉬지 않고, '말들'을 광야로 내몬다(이런 게 '탈영토화'일 것이다). 그러한 보기/듣기는 언어의 한계/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중요한 건 이러한 착란이 질병이 아니며 질병으로 간주되어 진료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그건 생의 환희를 노래하는 새들을 새장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착란으로서의 문학은 절대적으로 건강의 징표이기에. 이제 마지막 문단.
-이러한 문제들은 가야 할 길의 총체를 보여준다. 이 책에 소개한 텍스트들과 거기에 연구해 놓은 작가들은 이러한 길에 부합한다. 개중에는 짧은 텍스트들도 있고 훨씬 길다란 텍스트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교차하거나 동일한 장소를 다시금 거치거나, 서로 가까워지거나 떨어지면서 서로에게 어떤 시각(vue)을 준다. 어떤 텍스트들은 질병으로 닫힌 막다른 골목이다. 모든 작품은 여행이자 도정이다. 이것은 작품을 구성하고 작품의 풍경이나 조화를 이루는 길과 내적 역정에 의해서만 그런 외적 길에 이른다.(14쪽)
그러니까 들뢰즈가 모아놓은 텍스트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보여준다. 해서 모든 문학작품은 여정이며 여행이다(간혹 막힌 골목들이 되기도 하는). 이들은 서로서로에게 새로운 전망이 되어주기도 한다('가지 않은 길'이 되기도 하면서). 그런데, 이 길은 그것을 구성하는 내적 경로들(paths)과 궤도들(trajectories)에 의해서만 여행할 수 있다. 그러니까 들뢰즈가 이제부터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의 그러한 내적 경로/궤도들일 테다. 자, 준비됐나요? Are You Ready?..
05.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