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과정에 대한 윤리적 논란이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직접 참견할 형편은 아니기에, 나는 나대로 그냥 '니체와 여성'이란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권장할 만한 책들은 니체의 저작들 이외에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과 신경원 교수의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소나무, 2004), 그리고 데리다의 <에쁘롱>(동문선, 1998) 등이다. 이리가레(이리가라이)나 사라 코프만 등의 책들은 아직 번역돼 있지 않다.  영어권에서 이 주제에 관한 책들은 여럿 나와 있지만, 내가 맘에 들어하는 책은 켈리 올리버(Kelly Oliver)의 <니체를 여성화하기('Womanizing Nietzsche : philosophy's relation to the "feminine")>(Routledge, 1995)이다. 저자의 <크리스테바 읽기>(시와반시사, 1997)가 국내엔 소개돼 있다.

물론 이 책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시간을 내보려고는 하지만, 알다시피 시간은 여성만큼이나 붙잡기 어려우며 변덕스럽다), 여기서는 다만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의 한 장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192-208쪽)를 따라가보기로 한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문제의 윤곽을 잡아주고 있어서 유용하다. 일단 시작은 여성에 대한 니체의 '마초적' 언명들이 여성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전제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 "하지만 니체가 정말 마초였을까? 전통적 서구문화에 그토록 급진적인 비판을 가했던 그도 여성에 대해서는 전통적 견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노예이기를 거부하라고 외쳐댄 그가 여성에게만은 노예로 머물 것을 강요한 것일까?.. 혹시 니체가 여성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 우리가 니체의 '여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193-4쪽) 

이후에 검토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초반에 나오는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란 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지난 여름 모스크바 통신에서 자세하게 다룬바 있다(이 참에 다시 읽어봤는데, 읽어볼 만하다). 복습을 겸하여 다시 좀 따라가보기로 한다. 내가 그때 참조한 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전집13권, 책세상, 2003 개정1판)이다. 거기에서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109-112쪽)를 ‘그냥’ 옮겨놓고 읽어보는 방식이었다(여성에 대한 니체의 편견을 보여준다는 ‘악명 높은’ 장이기도 하다). 약간 발췌하겠다. 

-“차라투스트라여, 어찌하여 그대는 누가 볼세라 그토록 조심스레 어스름 속을 걷고 있는가? 그리고 외투 속에 무엇을 그리도 정성스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가 그대에게 선물한 보물이라도 되는가? 아니면 그대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도 되는가? 그대, 사악한 자의 벗이여, 그것도 아니라면 도둑의 길에 들어서기라도 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진실을 말하거니와, 형제여! 그것은 내게 선물로 주어진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그러니까 이 장의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가 조심스레 잘 싸고 감추고 있는 물건, 즉 ‘작은 진리’가 무엇이며, 그가 어떻게 선물 받았는지를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오늘 해질녘, 혼자서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어떤 늙은 여인이 다가와서는 내 영혼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여인들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여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늙은 여인에게 대답했다. “여인에 대해서라면 사내들에게나 이야기할 일이다.” “내게도 좀 이야기해달라. 너무 늙어 듣자마자 잊고 말 터이니.” 그 여인의 말이었다. 나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어느 모로 보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여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임신이 바로 그것이다. 여인에게 사내는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목적은 언제나 어린아이다. 그렇다면 사내에게 여인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내는 두 가지를 원한다. 모험과 놀이가 그것이다. 그래서 사내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놀잇감으로 여인을 원하는 것이다. 사내는 전투를 위해,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그러니까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라는 장제목은 여기에서 얻은 것이다. 이하는 나의 주석이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일삼았지만, 그의 사고는 상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이다(그는 ‘위버멘쉬’로의 ‘당위적’ 진화를 제창한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생물체로서의 여성(=암컷)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임신’이며(누구의 아이를? 얼마나?), 그것이 여성의 거의 모든 수수께끼를 해결해준다(그녀의 히스테리, 그녀의 자존심, 그녀의 어리석음, 그녀의 아줌마다움, 그녀의 행복 등등). 그런 여성에게서 사내(=남자)들이란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 즉, 정자의 제공자이면서 성실한 부양자(모든 여성이 바라는 ‘사내’란 밖에서는 ‘능력 있고’ 안에서는 ‘자상한’ 사내이다). 만약에 어떤 여성이 ‘임신’에 관심이 없었더라면(여성은 ‘임신 기계’가 아니다!), 비록 임신과 어린아이들이란 굴레로부터는 자유로웠겠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우리의 조상(=이브들)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 ‘수수께끼’로부터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럼 남자(=사내)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니체가, 아니 차라투스트라가 주장하는바, 남자가 원하는 건 모험(=위험)과 놀이(=게임)이다. 그런데, 여자야말로 그 둘의 결합체라는 것. 즉 위험한 놀잇감! 그때의 위험(=모험)이란 건, 다르게 말하면, ‘책임’이다. 남자에게 여자는 놀잇감이고 장난감이지만, 즉 유희에 대상이지만 까딱하면 다 뒤집어써야 하는 것. 왜 있지 않은가? 하룻밤 불장난의 대가라는! 진화생물학에서는 상식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남녀간의 성적 계약에 있어서, 쌍방의 초기 조건이 동일하지 않다. 두 사람이 관계를 갖고 아이(=2세)를 얻을 경우 쌍방이 얻을 수 있는 유전적 이익은 똑같이 1/2이지만, 초기 투자 지분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난자와 정자의 상대적 크기를 비교해 보면 된다.

 

 

 


흔히 정자경쟁에서(혹은 ‘정자전쟁’에서) 3억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수정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난자는 산술적으로 말해서 최소한 정자의 3억 배 이상에 해당하는 가치를 갖는 것이며, 이걸 경제학 버전으로 바꿔서 말하면, 여자는 남자보다 초기에 3억 배 이상의 투자를 한다는 것이 된다(정자는 수정시 세포핵만 제공하며 모든 영양분(=세포질)은 모두 난자로부터 공급된다). 게다가 아이가 태어나도 수유/양육 기간으로 최소한 2-3년은 아이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그러니 섣부른 임신은 여자의 인생을 때로 망치기에 충분하다).



 

 

 

경제학에서의 ‘숏다리 법칙’에 따르면 언제나 짧은 쪽이 유리하다('숏다리 법칙'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에서 얻어온 것이다). 즉 사업에서는 같은 이익을 얻을 경우 적게 투자한 쪽이 유리하다. 때문에, 관계(=수정)를 갖기 이전에는 투자자(=여성)에게 별이라도 따다 줄 것 같던 남자도, 그 이후에는 간혹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여성이 보다 신중한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성전략은 자신의 난자를 선뜻 내주기 전에 자신의 초기 투자 지분을 상쇄할 만한, 최대한의 정서적, 경제적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다(달랑 정자만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이 남자가 다른 데 또 한눈을 파느라 정서적, 경제적으로 부담을 무릅쓰느니 그냥 한 우물이나 파자고 눌러앉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사소한 일이다. 해서, 니체는 너무도 생물학적이다! 계속 읽어보자.

-“너무나도 달콤한 열매를 전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전사는 여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달콤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사내보다는 여인이 어린아이를 더 잘 이해한다. 그러나 사내와 여인 가운데 더 어린아이다운 것은 남자다. 진정한 사내 내면에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다. 그 아이는 놀이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여인들이여, 사내 안에 숨어 있는 어린아이를 찾아내도록 하라! 여인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계의 여러 덕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처럼 순수하고 섬세한 놀잇감이 되어야 한다.”(그러니까 남자는 어린아이이고, 여자는 그 놀잇감이다.)

-“별의 광채가 너희들의 사랑 속에서 빛나기를! ‘나 위버멘쉬를 낳고 싶다!’ 이것이 너희들의 희망이 되도록 하라. 너희들의 사랑 속에 용기가 깃들여 있기를! 너희들은 사랑으로 무장, 너희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고 있는 자에게 덤벼들어야 한다. 너희들의 사랑에 너희들의 명예가 깃들어 있기를! 그렇지 않을 경우 여인은 명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받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할 일이며, 사랑을 하는 일에서 결코 둘째가 되지 말 일이다. 이것이 너희들의 명예가 되도록 하라.”(*아이를 낳되, 니체가 요구하는 바는 위버멘쉬, 즉 초인을 낳는 것이다.)

-“사내여, 여인이 사랑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랑하는 여인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그에게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사내여, 여인이 미워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내는 그 영혼의 바탕에서 사악할(bose) 뿐이지만 여인은 바로 그 바탕에서 열악하기(schlecht) 때문이다. 여인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쇠붙이가 자석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나 너를 더없이 미워한다. 너는 잡아당기긴 하면서도 이미 잡은 것을 놓지 않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

 

 

 



남성은 사악하지만, 여성은 열악하다고 하는데, ‘열악하다’란 말은 보통 매우 빈궁한 처지를 일컫는 말이다(‘열악한 환경’에서 어쩌구저쩌구). 여기서 ‘사악한’과 대비되는 용어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여성은 바탕이 열악하니까 두려워해라?(그럴 경우, 보통은 안쓰러워 해야 정상이다.) 문맥상으로는 ‘사악한’보다 더 나쁜 말이 와야 하는데, 나는 ‘악질적’이나 ‘멍청한’ 중 어느 말이 거기에 더 합당한지 잘 모르겠다(*다른 번역서들을 보니까 '저열한'이라고 옮겨져 있다. 그게 타당하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에서는 주격 조사가 ‘는’에서 ‘가’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찾아보니까 그렇게 옮겨진 번역서들도 있다). 해서, “사내의 행복은 ‘내가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는 데 있다.” 이건 세상의 속설과도 일치하면서,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음미해볼 만한 문구이다.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의 비대칭성에 대한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비대칭성에 대한 최적의 문헌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에 실려 있다.

-“‘보라, 방금 세계는 완성되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순종할 때 여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여인은 순종해야 하며, 그 자신의 표면에 대해 어떤 깊이를 찾아내야 한다. 표면은 여인이 정서, 일종의 얕은 물위에서 요동치는 격한 살갗이다. 이와 달리 사내의 심정은 깊다. 그리하여 그의 강물은 지하의 동굴 속으로 좔좔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여인이 이러한 사내의 힘을 짐작은 하겠지만 이해는 못한다.”(러시아어에서는 ‘정서’와 ‘심정’을 모두 ‘영혼’ 혹은 ‘넋’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 경우 마지막 문장의 ‘사내의 힘’은 ‘그 영혼의 힘’이 된다. 어쨌든 여자의 정서, 혹은 영혼이 표면적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사소한 일들에도 어찌나 요동을 치는 것인지! 참고로, 다른 번역서들은 '마음'이라고 옮기며 나는 그게 더 마음에 든다.)

-이에 그 늙은 여인이 내게 대답했다. “좋은 말이다. 누구보다도 그런 말들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젊은 여인들을 위해서는. 기이한 노릇이다.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인데도 그의 이야기는 옳으니! 그것은,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 감사의 표시로 이 작은 진리를 받아라! 그 진리를 터득하고 있을 만큼은 나 늙어 있으니! 그것을 천으로 감싸라. 그리고 그 입을 막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작은 진리는 너무도 크게 소리치게 될 것이다.”(*이 대목엔 사소한 오역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아는 여자가 별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대신에 그는 여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다. 늙은 여인이 인정하는 바대로.)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건 그 다음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옳은 것은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반문이다(러시아어본의 주석에는 이 말이 누가복음 1장 37절을 패러프레이즈한 것이라고 돼 있다). 늙은 여인의 이 말은, 내가 읽기에는, 여인들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모든 말을 ‘심연처럼’ 집어삼키고 있다. 여인들에겐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규정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다 해도(=무어라고 규정하든 간에) 맞는 말이 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여성이라는 ‘바다’에서 고작 헤엄치고 있었던 게 된다. 즉 그는 여인들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닌’ 것이다. 이제 마지막 문장.

-“여인이여, 내게 그 작은 진리를 다오!”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 늙은 여인이 말했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

이 채찍에서 다시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으로 돌아간다. "채찍 이야기나 나왔으니 말인데, 니체와 여성, 채찍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서로 미묘한 감정을 지녔던 니체, 살로메, 레 세 사람이 찍은 것인데, 니체와 레는 마차 앞에 말처럼 서 있고, 살로메는 채찍을 들고 마부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니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출한 것일 텐데, 어떻든 채찍을 든 건 여성인 살로메고, 니체는 채찍을 맞을 말처럼 서 있다. 이건 또 뭔가? 그는 여성에게 휘둘러 달라고 채찍을 가져간 건가?"(195쪽)

이 물음에 대한 나의 견해는 지난 여름에 제시한 것과 같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는 늙은 여인의 말을 다시 음미해본다면, 먼저 흥미로운 건, 이게 차라투스트라(혹은 니체)의 말이 아니라, ‘늙은 여인’의 말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리’가 아니라 ‘작은 진리’라는 것이다. ‘작은 진리’라는 건 달리 말하면, 아직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진리이고, 부분적인 진리이며, ‘전부는 아닌’ 진리이다. 다시 이 단장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을 말하거니와, 형제여! 그것은 내게 선물로 주어진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 이때 그가 말하고 있는 ‘작은 진리’가 “여인들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가 하도 요란하게 떠들어대기(혹은 빽빽거리기) 때문에 그는 이 진리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바로 이후에 발표한 <선악의 저편>(1886) 서문에서 니체는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 텐가?”(책세상 번역은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다(독어로는 모르겠지만, 진리란 뜻의 러시아어 ‘이스찌나’의 문법적 성은 여성이다). 그러면서 철학의 모든 (남성적) 독단론은 “여전히 고상한 어린아이 장난이거나 신출내기의 미숙함에 불과하다고 단언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갖고 있는 (독단적) 진리는 어린아이의 진리이며, ‘작은 진리’이다. 그것은 고작 “여인들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충고(그것도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아니라, 늙은 여인이 일러준 진리이다. 즉 그것은 늙은 여인에게 부탁해서 합법적으로 ‘도둑질한’ 진리이다)를 마치 ‘보물’처럼 모시고 다니는 자의 진리이다. 그 작은 진리(=어린아이)는 대문자 진리(=여성) 앞에서 안절부절이며 속수무책이다.

니체가 “진리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물음은 동시에 “여성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이며, 그것은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프로이트의 물음과 정확히 겹친다. 니체의 연보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른 사망(목사였던 그의 아버지 칼 루드비히 니체는 맏아들 프리드리히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849년에 사망한다)에 따라 여자들로만 둘러싸인 가정에서 양육된다. “아버지의 부재와 여성들로 이루어진 가정, 이 가정에서의 할머니의 위압적인 중심 역할과 어머니의 불안정한 위치 및 이들의 갈등 관계,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의 심적 대체물로 나타난 니체 남매에 대한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 본능 등으로 인해 그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며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와 가부장적 권위, 남성상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560쪽) 그런 니체에게서 압도적인 자기규정은 ‘어린아이’이며,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어린 진리’ 즉 ‘작은 진리’이다. “우리 프리드리히가 이런 말을 다 하네!”

그런 의미에서, 여성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가 <프리드리히 니체, 바다의 연인>에서 니체에게 던지는 충고는 좀 잔인하다. “당신은 생산력이 하늘에서만 내려올 줄 알고 계속 위로만 올라간다. 정상인이여! 이것이야말로 주변 경관에 전혀 무관심한, 놀라울 정도로 순진한 모습이 아닌가!”(신경원,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 162-3쪽, <텍스트>(2004, 4월호), 43쪽에서 재인용) 산의 정산에서 심연(=바다)을 들여다보는 차라투스트라, 혹은 니체는 이제껏 여자들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육지에 발을 딛고서 산으로 올라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다.”(12쪽) 그러니 주변 경관(=바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이며, 필사적인 관심의 결과이다. 그런 그에게, 너는 ‘바다’를 잊고 있으니 다시 내려오라고?!

하지만, 니체가 정말로 바다를 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의 삶에 각인돼 있는 것인데! 때문에,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가길 두려워한, 여성의 육체를 심연에 매장해 둔 채 산의 정상으로만 오르려 한 우리의 초인은 조금 외롭지 않을까.”(<텍스트>, 43쪽)란 추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산으로 올라간 자의 책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온 자의 책이기 때문이다. 즉 ‘몰락’을 자청한 자의 책이며, 다시 어린아이가 된 자의 책이다(“차라투스트라가 변하여 어린아이가 되었구나.”).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정의하면서 그가 내세우는 것이 초인, 즉 위버멘쉬인바, 그는 무어라고 덧붙이는가? “보라,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이 위버멘쉬가 바로 너희들의 크나큰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다.”(19쪽) 어떤 경멸인가? 행복에 대한, 이성에 대한, 덕에 대한 정의에 대한, 그리고 연민에 대한 경멸이다. 그 모든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가 바로 위버멘쉬라는 것. 그리고 바다란, 여성이고 생명(의 고향)이지 않은가? 생명의 연쇄이지 않은가?..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와 함께 '니체와 여성'의 기본 문헌은 <즐거운 학문>(<즐거운 지식>)의 제2판 서문이다. 고병권의 인용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어쩌면 진리란 그녀의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이유를 가지고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하자면 바우보(Baubo)가 아닐까? 아, 그리스인들! 그들은 정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생각이 깊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피상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 보아야 할 점이 아닌가?"(199쪽)

이에 대한 해설을 따라가본다: "여성들은 표면이 심층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심층에 대한 열망이 표면의 다양성을 가리고 있음을 이해한다. 여성들은 표면에 얼마나 다양한 진리들이 반짝이고 있는지 이해한다. 아마도 여성들이 화장을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 표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표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만이 '화장발에 속았다'고 분개한다. 남성들은 무언가를 벗겨야 진실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의 기이한 욕망을 다스릴 줄 안다. 여성들은 저 깊은 심층까지도 껍질로 위장한 양파처럼 되는 것이다."(롤랑 바르트-라캉의 정의를 비틀면, 남성은 문체(style)를 갖고 있고, 여성은 문체 자체이다.)

 

 

 

 

그리고 바우보. "원래 바우보는 음란한 여신으로 여성의 생식기를 신격화한 것이다(*즉 버자이너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성 생식기에서 어떤 규정으로도 좁힐 수 없는 '거리'의 개념을 발견한다. 그들에 따르면 여성은 자궁과 같다. 그것은 모든 것들을 발생시키는 비어 있는 공간이고, 일종의 거리이다. 여성은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즉 공간 속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여성은 어떤 고유의 본질을 갖고 실존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이 찾는 진리가 없듯이 고유한 여성성도 없는 것이다."(200-1쪽) 정신분석학에서의 명제를 반복하자면, "여성은 없다!(There's no such a thing like Woman!)"

계속. "하지만 바우보는 달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자궁에서 강조될 것은 결핍이나 공허가 아니라 생산이나 창조이다. 자궁은 결핍의 공간이 아니라 넘침의 공간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궁이 임신기관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는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빈틈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막아도 태어나는 새로운 아기들 때문이다. 임신한 여성에게는 하나의 정체성이 부여될 수 없다. 진리가 바우보인 이유도 그것이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이다."(201쪽,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 저자는 니체에게서 '임신한 여성'의 중요성과 임신 테마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도 임신은 중요한 테마이다... 인간은 위버멘쉬를 낳을 수 있는가? 아마도 이 물음들은 이렇게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에겐 여성이 있는가? 너는 자궁을 갖고 있는가?(*요즘 어법에 따르면, "너는 난자를 갖고 있는가?") 너는 여성-되기를 할 수 있는가?" 정리하자면, 두 가지가 핵심이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1)임신과 관련해서 여성을 이해한다는 것과, (2)여성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 니체는 한 메모에서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고: "무엇이 내 삶을 유지시키는가? 그것은 임신이었다."(202쪽)



 

 

 

여기서 음미해볼 대목은 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로 ‘몰락하는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 책세상판의 번역을 여기에 옮기면,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1쪽)

우리들(=사람들)은 과거의 인간(=짐승)와 미래에 도래할 인간(=위버멘쉬) 사이를 연결하는 밧줄이고 교량이다.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과정일 뿐이고 몰락일 뿐이며,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처음에 지적한 바대로, 이것은 지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존재 규정이다. 보다 확증적인 건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116-9쪽)에서 읽을 수 있다(결혼과 출산을 앞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음미해 보아야 할 단장이다!).

-형제여, 여기 너만을 위한 물음 하나가 있다. 다림추를 내리듯 나 네 영혼 속에 그 물음을 내려본다. 네 영혼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아내기 위해다. 너는 젊다. 그리하여 아이를 원하고 혼인을 원한다. 그러나 묻노니, 너는 한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그런 자인가? 너는 무적의 강자, 자신을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네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그것은 나 네가 묻노라. 그것이 아니라면 네 안에 짐승이 있고 절박한 욕구라는 것이 있어 그 같은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로움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네 자신과의 불화 때문인가?(*너는 한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그런 자인가!?)

-나, 네가 거두어들인 승리와 네가 쟁취한 자유가 아이를 갈망하기를 바라노라. 너는 너의 승리와 해방을 기리기 위해 살아있는 기념비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의 너를 뛰어넘어 저 위에 네 자신을 세워야 한다. 그럴려면 너의 신체와 영혼이 먼저 반듯하게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 앞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위를 향해서도 생식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혼인이라는 동산이 너를 돕기를 바란다! 너는 더욱 고상한 신체를 창조해내야 한다. 최초의 운동,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를 창조해야 한다. 창조할 자를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다.(*네가 승리한 자라면, 너의 아이는 너의 승리를 기리는 ‘살아있는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으면 안된다! 역설적이지만, 생물학에서는 거꾸로 규정된다. 아이를 낳은 자가 승리한 자, 즉 성공한 자이다. 성공한 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혼인. 그것을 나는 당사자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라고 부른다(*이것이 결혼에 대한 니체의 정의이다). 이와 같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서 서로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을 나는 혼인이라고 부른다(*그러니까 혼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의지, 혹은 정념과 서로에 대한 존경이다. 나는 그걸 ‘사랑과 존경’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것이 네가 하는 혼인의 의미가 되고 진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많은 너무나도-많은-자들(=어중이떠중이들),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아, 그것을 나는 어떻게 부를까?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구차함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더러움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가엾은 자기만족이여! 이런 것 모두를 저들은 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고는 말한다. 저들의 혼인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라고. 좋다,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떠벌리고 있는 그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같은 천상의 그물에 걸려든 짐승들도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맺어준 것이 아닌데도 축복을 하겠다고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신 또한 먼 곳에 물러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이러한 혼인을 비웃지는 말라! 어버이로 인하여 통곡할 까닭을 갖고 있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 것인가!)

-여기 이 사내, 품위 있어 보였고 또 대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보자, 이 대지는 정신병원처럼 보이지 않던가. 그렇다. 성자와 거위의 결합, 나는 그때 이 대지가 경련을 일으켜 부르르 떨기를 바랬다. 그 성자는 원래 영웅과도 같이 당당하게 진리를 찾아 나섰었다. 그러나 결국은 화려하게 치장한 작은 거짓 하나를 노획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원래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신중했으며 선택에서도 까다로웠다. 그런 그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교제를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화장한 거위들을 주의해야 한다!)

-그는 원래 천사의 덕을 갖춘, 그런 계집종을 찾고 있었다(*간단히 말해서, ‘천사 같은 하녀’가 모든 남자의 이상형이다). 그러던 그가 졸지에 여자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예, 부르셨습니까요, 마님!”). 이제 그는 그것을 넘어서 천사가 되어야 한다(*이건 좀 이상한 번역이다. 내용은 “이제는 그가 천사가 되어야 한다.”이다. ‘천사 같은 머슴’으로서의 남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신중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같이 교활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없이 교활한 자조차도 아내를 사들일 때는 자루를 열어보지도 않는다.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 그것을 너희들은 연애라고 부른다. 그리고, 너희들은 혼인이라는 하나의 ‘긴 어리석음’으로써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에 종지부를 찍는다.(*제일 좋은 건 자루를 열어보고도 사지 않는 것이다.)

-여인을 향한 너희들의 사랑, 그리고 사내를 향한 여인의 사랑. 아, 이것이 고뇌하는, 감추어진 신들에 대한 연민이라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알아볼 뿐이다.(*‘신들의 교제’라면 좋겠지만, 혼인은 대개 ‘두 마리 짐승의 교미’로 마무리된다.) 너희들이 말하는 최상의 사랑이란 것도 하나의 황홀한 비유일 뿐이며 고뇌에 찬 열화일 뿐이다(러시아어 번역은 ‘병적인 격정’). 그것은 너희에게 좀더 높은 길을 비추어주도록 되어 있는 횃불이다(러시아어 번역은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니라) 횃불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언젠가는 너희들 자신을 뛰어넘어 너희들 이상의 것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 너희들은 사랑의 쓴잔을 마셔야 했던 것이다.(*언제나 쓴잔만 마시는 사람은 뭔가?)

-더없이 감미로운 사랑의 잔 속에도 쓴맛은 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랑은 위버멘쉬를 동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너 창조하는 자를 목타게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의 목마름, 위버멘쉬를 향한 화살과 동경. 말하라. 형제여. 이것이 바로 너로 하여금 혼인하도록 만드는 의지인가? 나 이와 같은 의지와 혼인을 신성시하노라.(*즉 혼인에의 의지는 위버멘쉬에 대한 동경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 텐가?”라고 니체는 물었다. 나는 그때의 진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성의 수수께끼로서의 임신과 출산이다. “창조의 근원적인 힘의 원형이며 그것 자체인 여성의 출산을 대치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위버멘쉬가 탄생했다”(<텍스트>, 43쪽)고 이리가레는 주장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위버멘쉬는 출산에 대립하거나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이리가레와 데리다의 니체론을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 않았지만), 그것에의 전면적인 투항이다(니체 철학은 ‘아줌마 철학’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의 철학은 또 얼마나 유미적인가! 덧붙여 말하자면, 윤리학에서의 ‘아줌마 철학자’에 레비나스가 있다. 그에게서 궁극적인 타자의 모델 또한 ‘신생아’이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로 큰소리친 걸로 돼 있는 니체이지만(그마저도 늙은 여인이 일러준 말이었다!), 오히려 길들여진 건 여인들이 아니라 니체이다(그는 채찍을 들고 가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를 길들여 주세요!”). 해서, 내 생각에 그가 말하는 위버멘쉬란 오직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남자들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Superman이나 Overman도 다 마찬가지이다. 삶이 다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는 동경과 모험 속에서 아직도 장난치면서 놀이하는 어린아이-남자들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Superwoman이나 Overwoman은 불필요한바, 이미 그들은 ‘거기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즉 Wo-man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Man과 Woman이 있는 게 아니라, Woman과 Woo-man(졸라대는 남자, 궁시렁대는 남자, 우둔한 남자)이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목적은 이미 언제나 어린아이였기 때문. 그 핏덩이, 혹은 살덩이!


 

 

 

서양철학의 전통은 그 피와 살로부터의 고상한 거리두기였다(소크라테스는 “삶은 질병”이라고 말했다). 삶에 대한 부정과 이데아에 대한 동경(이건 무성(無性)의 철학이자 동성애 철학이다)은 언제나 어린아이에 대한 억압, 어린아이로부터의 도피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니체는 이걸 거꾸로 세운다. 진리란 여성이고, 바다이고, 위버멘쉬의 창조라는 것. 그 위버멘쉬를 낳을 때까지 우리의 삶의 과정은, 몰락의 과정은 영원히 지속되고 반복될 것이다. 하여, 카뮈를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참으로 진지한 생-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임신(=출산)이다. (이 남자의) 아이를 (또) 낳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생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것들은 다 애들 장난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바, '바다의 연인'이자 아줌마 철학자 니체의 메시지이다.

고병권의 결론은 조금 다르다. "차라투스트라에서 여성성은 영원회귀와 같다. 그러나 '여성성'이라는 말조차 그리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의 여인은 생물학적 여성도 아니고, 특정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여성이 되는 것', '여성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가장 나쁜 것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불임증'에 걸린 인간이다."(208쪽, 강조는 나의 것)

 

"진리는 여성(바우보)이다"와 "진리가 바우보인 이유도 그것이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이다"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귀결은 "진리는 임신한 여성이다"이다(이것이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을 구분해줄 수 있는 준거이다). 나는 이러한 구체적/직설적 메시지와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라는 다소간 추상적/비유적 메시지 사이에는 얼마간의 간극이 있다고 보며, 이 간극은 우리가 여전히 '니체의 진리'에 밀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내게 더 매력적인/파괴적인 철학자는 '영원한 생성'을 말하는 철학자 니체가 아니라 '진리는 임신한 여성'이라고 말하는 아줌마 니체이다. 이 문제는 '영원회귀'와 관련하여 나중에 한번 다루도록 하겠다...

 

0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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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1-2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로쟈 님 스타일의 티저 광고군요.^>^

로쟈 2005-11-2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시간쯤 쓰던 페이퍼를 한번 날려버린 이후로는 수시로 저장하게 됩니다. 광고효과까지 겸한다면야.^^

2005-11-30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한 논문을 읽으니 당대 진보적인 여성들은 저마다 자신을 '초인'이라고 생각했기에 니체의 '마초적' 발언들에 괘의치 않았다더군요...

아리 2009-06-03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