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고전'으로 허먼 멜빌의 <피에르, 혹은 모호함>(시공사, 2015)을 고른다. <모비딕>(1851)을 발표한 이듬해에 펴낸 또다른 야심작으로 <모비딕>과 마찬가지로 당대 독자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했다. 예전에 <모비딕>을 강의하면서 그 전후의 작품이 궁금했는데, 이번에 번역돼 나와서 반갑다. 국내 초역.

 

경험에 입각한 해양 이야기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고딕 소설과 로맨스의 관습에 대한 재해석 위에 프로이트를 앞서 간 개인의 심리 분석이 더해진 <피에르, 혹은 모호함>은 당시 독자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어머니, 배다른 누이, 이상적인 여인, 연적과의 전통적인 관계 설정을 모두 흐트러트리고, 이들 관계에 비이상적인 친밀감과 성적 긴장감을 부여하여 모든 것을 소용돌이 안으로 끌어들이는 ‘피에르’의 광풍은 그의 운명이 그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함이었다. 하지만 이제 20세기의 독자들은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낸다. 20세기의 마지막 해, <퐁네프의 연인><나쁜 피>의 레오 카락스 감독은 이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겼고 이후 지금까지 연극, 뮤지컬 등으로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보르헤스의 적절한 평가대로 “삶의 불행과 고독을 관통하는 멜빌의 독특한 상상력”, 시대를 앞서간 시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필경사 바틀비>를 비롯해 멜빌의 중단편들이 계속 번역되는 틈에 <모비딕> 이외의 장편도 한두 편 더 소개된다면 멜빌의 전모에 좀더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멜빌의 모호함'을 좀 덜어볼 수 있을까...

 

15. 07. 31.

 

 

P.S. 참고로 레오 카락스가 <피에르, 혹은 모호함>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영화는 <폴라 X>(199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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