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준비로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론에 대한 책을 읽다가 잠시 '딴짓'을 한다('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해 몇 마디 광고한다는 명분으로!). 문학이론입문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이론입문>(창비사, 1989)에서 저자인 테리 이글턴은 20세기 문학이론의 기점을 빅토르 슈클로프스키의 에세이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로 잡는다(이글턴의 책은 인간사랑에서도 번역서가 뒤에 나왔지만 창비사판을 권한다). 가까이에 번역서가 눈에 띄지 않아 원서(1983) 서문의 첫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If one wanted to put a date on the beginnings of the transformation which has overtaken literary theory in this century, one could do worse than settle on 1917, the year in which the young Russian Formalist Victor Shklovsky published his pioneering essay 'Art as Device'."

'젊은 러시아 형식주의자(the young Russian Formalist)'라고 한 건 그때 슈클로프스키(1893-1984)의 나이가 24살이었기 때문이다(그는 90세 이상 장수했는데, 그건 그의 '타협적인'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형식주의자들 가운데에서 1920년대 맑스주의자들의 공세에 가장 먼저 백기를 들고 투항한 이가 소위 형식주의의 '마니페스토'를 쓴 슈클로프스키였다). 여하튼 이 혁명적인 에세이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 해에 발표되었다는 건 우연의 일치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러시아 형식주의'는 '러시아 혁명'과 운명을 같이 한다? 실상 형식주의의 궤멸과 함께 소비에트 러시아는 레닌주의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로 넘어가게 된다. 아니 순서적으로는 거꾸로가 맞겠다. 스탈린 체제의 성립과 함께 '이론적 아방가르드'로서의 형식주의는 궤멸한다).

자신의 기념비적인 에세이에서 슈클로프스키가 '간판'처럼 내세운 명제는 예술이란 기법의 총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법들이 의도하는 효과가 '낯설게하기'이다. 그리하여 예술이란 다름아닌 '낯설게하기'이다. 가령, 화장을 거의 '떡칠'을 해서 애인이 못알아봤다면(보다 정확하게는 '힘들게 알아봤다면': '누구시더라?') 그 화장이 '예술'이다. 혹은 평소에 '떡칠'을 하고 다니다가 어느날 용감하게 노메이크업을 해서 다시금 애인이 못알아보게 만들었다면(보다 정확하게는 '힘들게 알아보도록 했다면': '당신이야?!') 그 맨얼굴이 또한 '예술'이다. 물론 전문적인 얘기로 하자면 끝이 없는 까닭에 대략 그렇다고만 해두자(나는 따로 책 한 권을 준비중이다).

'낯설게 하기'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예리한 분석, 그러니까 '낯설게 하기의 미학과 정치학'에 대해서는 이장욱의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2005)을 참조할 수 있으며(바흐친과 로트만에 대한 글들도 시려 있다), 국내 필자들에 의한 연구서 <러시아 형식주의>(한국외대출판부, 2001)에도 요점이 정리돼 있다. 참고로 브레히트 서사극에서의 '생소화 효과' 혹은 '소격 효과'라는 것은 이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또 에코의 <낯설게하기의 즐거움>(열린책들,  2003)은 (비록 원제는 아닌 듯하지만) 기법으로서의 '낯설게하기'가 얼마나 널리 쓰이고 있는가를 가늠하도록 해준다(에코는 로트만의 <문화기호학(Universe of the mind)> 영역본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하다).  

 

 

 

 

슈클로프스키의 이 유명한 에세이는 세 가지 우리말 번역본을 갖고 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토도로프가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론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문학의 이론>(1965)에서 김치수 교수가 9편의 글을 발췌/번역한 <러시아 형식주의>(이화여대출판부, 1981/1988)이다. 츠베탕 토도로프(1939- )에 대해서 개괄적인 내용은 존 레흐트의 '인명사전'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 1996/2003)를 참조할 수 있다(생년이 '1941년'으로 오기돼 있다). 저자 레흐트는 크리스테바 전문가.

크리스테바(1941- )와 마찬가지로 불가리아 출신의 걸출한 '사무라이' 토도로프는 1963년에 파리로 건너가 롤랑 바르트의 제자가 된다. 그가 방대한 분량(315쪽)의 <문학의 이론>(로만 야콥슨이 서문을 썼다)을 불어로 옮겨 출간한 것은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론의 소개라는 기본 취지 외에도 프랑스 지식사회에 대한 입문의식 성격을 갖고 있었으리라. 즉, 그 책의 화용론적 의미는 토도로프의 자기 존재증명이었던 것. 그의 나이 26살 때의 일이다. 

토도로프를 모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테바도 바흐친론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녀는 1967년, 26살에 '말, 대화, 그리고 소설'이라는 바흐친론을 당시 전위적인 잡지 <텔켈>에 게재함으로써 일약 주목받게 되며(그녀는 편집장이던 솔레르스와 결혼한다)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 불어판 역시 그녀의 주도로 1970년에 출간된다. 거기에 그녀가 쓴 저명한 서문이 '시학의 파괴'이다. 참고로, 크리스테바 선집이 작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됐으며, '말, 대화, 그리고 소설'의 우리말 번역은 <바흐친과 문학이론>(문학과지성사, 1995)에 수록돼 있다(물론 매우 어려운 논문이며, 국역본은 일부 오역을 포함하고 있다).

 

 

 

 

토도로프의 책들은 <구조시학>(문학과지성사, 1985)을 필두로 하여 여러 권이 출간돼 있고, (몇 권 나오다가 중단됐지만) 90년대 중반엔 한국문화사에서 토도로프 전집까지 기획했었다. <상징의 이론>(한국문화사, 1995), <덧없는 행복: 루소론/ 환상문학 서설>(한국문화사, 1996), <비평의 비평>(한국문화사, 1999) 등이 전집의 일환으로 나왔던 책들이다. 그 외에도 <산문의 시학> 번역서 2종(문예출판사, 1992; 예림기획, 2003), <담론의 장르>(예림기획, 2004) 등의 이론서와 <일상예찬>(뿌리와이파리, 2003)이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다. 절판된 책이지만, 바흐친 연구서 <바흐찐: 문학사회학과 대화이론>(까치, 1989)은 얇지만 매우 통찰력 있는 개론서이다. 토도로프의 책은 대부분 영역돼 있으며, 일어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할 듯하다(러시아어본은 본 적이 없다).

 

 

 

 

스승인 바르트가 구조주의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변신해가는 데 반해서 토도로프는 제라르 주네트와 함께 가장 철저하게 문학에서의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이론가로 남게 되는데(정신분석에 대한 그의 거부감은 좀 유별나다), 그의 그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환상문학 서설>이다. 문학에서의 환상성 혹은 환상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필독해봐야 할 책이다(주로 영역본으로 읽은 탓에 국역본의 상태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지만). <환상문학 서설>은 한 문학적 장르에 구조주의적 방법론이 어떻게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선구적으로 타진하고 있는 책이며 1970년에 나왔다. 로즈메리 잭슨의 <환상성>(문학동네, 2001)은 그러한 토도로프의 성취를 사회/정치적 맥락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으로 보완하고 있는 책이다. 두 사람에게서 모두 중요한 전거로 쓰이고 있는 작품은 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환상예술의 최고봉'으로 격찬한 작품.  

토도로프 얘기가 괜히 길어졌는데, 하여간에 토도로프가 러시아 형식주의를 최초로 서구에 소개했다는 말씀이고, 그런 사정은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어서 나온 것이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청하, 1986)인데, 이 책은 레몬과 레이스가 편집한 유명한 영어본 엔솔로지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Russian Formalist Criticism)>(1965)을 옮긴 것이다. 슈클로프스키의 글 2편과 토마세프스키, 에이헨바움의 글 각각 1편이 실려 있다. 검색하다 보니까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월인재, 1980/1995)도 눈에 띄는데(이런 건 '희귀본'이다!), 역자가 한기찬이라 돼 있는 걸로 보아 청하 번역본이 다시 출간됐던 듯하다(전문번역가인 한기찬씨는 청하의 번역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그의 손이 간 번역이다).  

참고로, 또다른 영어본 '형식주의'로는 <러시아 시학 선집(Readings in Russian)>(1971/2002)이 있는바, 더 많은 분야에 걸친 19편 대표적인 글들이 영역돼 있다(이 책은 마테이카와 포모르스카가 편집했는데, 포모르스카는 저명한 시학자이자 야콥슨의 아내이다). 현재는 절판됐지만 조주관 교수 편역의 <러시아 현대비평 이론>(민음사, 1993)은 러시아 원전을 번역한 것이되, 편제와 주석 등은 <러시아 시학 선집>을 참고한 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기법으로서의 예술'이 번역돼 있는바, 내가 말하는 세번째 번역이다.   

말이 너무 길어져서 형식주의 텍스트의 독어본, 러시아본 얘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형식주의 2차 문헌, 그러니까 형식주의 연구서나 참고문헌으로 가장 먼저 꼽아야 하는 책은 물론 빅토르 어얼리치의 <러시아 형식주의>(문학과지성사, 1983)이다. 형식주의의 역사(1부)와 이론(2부)를 다루고 있는데, 원저(1955 초판)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며, (러시아를 포함하여) 형식주의를 포괄적으로 다룬 최초의 연구서이다. 이에 견줄 만한 책으론 독일 학자 한젠 뢰베의 방대한 연구서 <러시아 형식주의>가 있으며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물론 분량상 이런 책이 국내에 번역/소개될 가능성은 당분간 제로다).

 

 

 

 

문예학자 페터 지마의 <문예미학>(을유문화사, 1993)에는 러시아 형식주의와 (야콥슨과 무카르좁스키가 주도한) 체코 구조주의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소개가 들어 있다(이미지가 없어서 <이데올로기와 이론>을 대신 띄워놓았다).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고전적인 것은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한겨레, 1989; 과학과사상, 1990)인데, 제5장이 '형식주의 시학파와 마르크스주의'이다("그들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고 믿는다."란 구절로 마무리된다). 트로츠키의 비판은 예리하지만 진행중이던 형식주의의 잠재적 역량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과소평가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형식주의/구조주의 비판서 <언어의 감옥>(까치, 1990)에서도 읽혀진다. 반면에 <형식주의와 마르크스주의>(현상과인식, 1983)의 저자 토니 베네트는 둘 사이에 생산적인 접점을 찾아보려고 한 경우이다.

슈클로프스키와 함께 형식주의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이론가로 에이헨바움과 티냐노프(트이냐노프)를 들 수 있으며, 흔히 형식주의 3기의 대표자로 불리는 티냐노프에 이르게 되면 형식주의는 자기 극복과 갱신의 생산적인 이론적 모태(매트릭스)를 발견하는 데까지 나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시도는 외압에 의해 좌절되며 형식주의의 유산은 제대로 관리/계승되지 못했다(아직 살아있는 이태리 사람 프랑코 모레티와 이미 죽은 러시아 사람 유리 로트만이 내가 보기엔 형식주의의 가장 걸출한 계승자이다).

이러한 사정은 영화론이라는 분야에 한정지어도 마찬가지이다. 형식주의 영화론 엔솔로지인 <영화의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1995/2001)에는 티냐노프와 에이헨바움, 야콥슨, 세 사람의 논문이 번역돼 있는데, 원본은 러시아어본이 아니라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이론(Russian Formalist Film Theory)>(1981)라는 영어본 엔솔로지이다(러시아에는 이런 류의 책이 아직 나와 있지도 않다). 내용은 들뢰즈의 영화론 이상으로 읽어나가기 어렵다. 반면에 같이 실린 로트만의 영화론 <영화기호학과 미학의 문제>은 읽기 편하며 내용도 간명하다. 로트만과 치비얀 공저의 <스크린과의 대화>(우물이 있는집, 2005)는 로트만 사후에 출간된 그 후속편이라 할 만하겠다(그러니까 세트로 읽는 게 좋겠다).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은 <영화기호학과 미학의 문제>와 같은 책이다. 

참고로, 러시아/형식주의 영화론의 계승자로 치비얀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는 미하일 얌폴스키이다(그의 영화론 한 권은 영역돼 있다). 티냐노프의 형식주의와 현상학, 그리고 들뢰즈를 이론적 지반으로 삼고 있는데, 작년에 그의 주저 <언어-신체-사건>이 출간됐다. 비록 로트만보다 더 멀리 가고 있지만 이 역시 조만간 국내에 번역/소개되지는 않을 듯하다...

05. 11. 10.    

P.S. 부랴부랴 끊는다. 젠장, '딴짓'은 아무때나 하면 안되겠다. 내일 강의는 누가 대신해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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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11-1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깊어만 가는군요. 요즘은 정신없이 바빠서 가을을 음미할 틈도 없네요. 러시아 형식주의는 저도 관심이 가는 주제입니다. 기대하겠사와요.
그나저나 로쟈님 요즘은 조금 여유가 있으신가봐요? 자주 올려주시는 좋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자주자주 브리핑 해주세요~~~히히

2005-11-10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자주'라니요? 안될 말씀입니다.^^ **님/ 저까지 걱정해드리진 않겠습니다. 잘 하시겠지요.^^

코끼리 2006-12-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월인재) 초판은 1980년입니다. 내용은 청하본과 같습니다. 로쟈님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

로쟈 2006-12-30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제가 월인재판은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