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달서문화재단에서 펴내는 잡지 '문화만개'(창간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단상을 적었다.

 

 

문화만개(15년 7월) 삶의 딜레마를 그린 존재론적 성찰

 

삶은 얼마만큼의 무게를 갖는가. 아니 다시 질문해보자. 삶은 얼마만큼의 무게를 갖는 것이 적당한가. 가벼운 삶과 무거운 삶,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체코 출신의 프랑스 작가, 아니 그 자신의 바람대로라면 그냥 ‘보헤미아의 작가’이자 ‘중부유럽의 작가’ 밀란 쿤데라가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그에게 이런 물음의 물꼬를 터준 이는 철학자 니체다. 다른 무엇보다도 ‘영원회귀’를 설파한 철학자 니체.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것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갖는 수수께끼를 숙고해보는 데서 시작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이기에 ‘신비로운 사상’이다. 그에 따라 많은 해석이 제출된 건 당연한데, 일부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생각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간주하면 곤란하다는 주장까지 편다. 니체는 중요한 철학자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원회귀 사상만큼은 그냥 농담으로 기각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는 말의 배경이다.


쿤데라는 이 문제적인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경합에 나선다. 그는 영원회귀가 주장하는 바를 뒤집어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만약 영원회귀가 없다면 인생은 말 그대로 단 한번뿐인 인생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한번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너무도 덧없어서 아무런 무게감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영원회귀는 바로 그런 대조효과를 유발한다. 영원회귀라면 ‘무거움’ 옆에서 일회적인 삶은 ‘가벼움’을 면치 못한다. 그것도 너무도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가벼움이다.    


그렇다면 한번뿐인 삶 대신에 영원회귀의 삶을 선택해야 할까. 하지만 이 또한 만만찮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회귀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토로했다. 어떤 장면에서인가. 차라투스트라가 달밤에 개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다가가 보니 젊은 양치기가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묵직한 검은 뱀을 입에 물고 있어서였는데, “물어뜯어라! 대가리를 물어뜯어라!”란 그의 충고를 듣고 양치기는 뱀을 물어뜯어서 뱉어버린다. 그러자 양치기는 더 이상 양치기가 아닌 ‘변화된 자’가 되어 웃음을 터뜨린다. 


차라투스트라가 본 이 환영에서 양치기의 목구멍을 문 뱀은 바로 영원회귀 사상을 뜻한다. 그것이 목구멍에 걸려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해서 곤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영원회귀 사상 때문에 한바탕 앓고 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걸 보면 젊은 양치기는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원회귀라는 위험한 사상을 수용·극복하고 나서야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자가 된다. 그는 영원회귀의 운명을 긍정하라고 가르친다. 자신의 인생이 반복되어도 좋다고 긍정하는 자, ‘다시 한 번!’이라고 말하는 자가 다름 아닌 초인이다. 니체에게서 영원회귀와 초인은 그렇게 만난다. 그것은 ‘운명애’를 매개로 해서다.


니체와 쿤데라는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조를 좀 더 오래 끌고 간다. 무거운 짐은 비록 우리를 짓누르면서 바닥에 깔아 눕히지만, 동시에 삶을 생생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지상으로 잡아당기는 중력이 우리에게 현실감을 부여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에 우리가 아무런 짐도 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쿤데라는 생각한다.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바로 그런 선택적 상황에 놓인 주인공 토마시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프라하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토마시는 아내와 이혼하면서 아들까지 떼어주고 부모와도 관계를 끊은 채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바람둥이다. 가벼운 삶의 표본이라고 할까. 그는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무거움을 피하기 위해 ‘에로틱한 우정’이라는 걸 고안해낸다. 사랑을 나누더라도 서로의 자유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 연달아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지만 3번 이상은 안 되며 수년 동안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지만 적어도 3주 이상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3의 법칙’을 수칙으로 삼는다.   


하지만 테레자를 만나면서 토마시는 고민에 빠진다. 보헤미아의 한 작은 마을에 진료차 내려갔던 그는 우연히 카페의 여종업원 테레자를 만나는데, 그로부터 열흘 후에 테레자가 프라하로 그를 찾아온다. 둘은 그날로 동침을 하지만 테레자가 독감을 앓게 된 탓에 바로 떠나지 못하고 그의 집에 일주일을 더 머물다가 내려간다. 테레자는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담겨 그의 인생에 도착한 듯했고, 그는 이것이 특별한 인연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여자든 간에 한 여자와는 살 수 없다고 믿어온 터이지만, 테레자가 떠난 뒤에는 아파트 창가에 서서 머리를 싸매게 된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라는 고민 때문이다.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은 두 가지 모두를 경험해보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정확한 비교가 가능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구라는 ‘무경험의 행성’에서 우리는 아무런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오른 배우 신세다.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비교할 만한 기준도 없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때 토마시가 되뇌는 독일 속담이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Einmal ist Keinmal)”이다. 한번 일어난 일은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한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도 된다. 우리 인생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토마시는 결국 테레자와의 동거를 선택한다. 그는 비록 다른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두 가지 열정이라고 생각하지만, 테레자와의 동거 이후에는 술의 도움 없이는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지 못하게 된다. 그런 토마시의 모습을 보고 연인 중의 한명인 사비나는 바람둥이 토마시의 그림자 위에 낭만적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 비친다고 말한다. 즉 바람둥이 돈 주앙인 토마시는 한편으로 테레자만을 생각하는 트리스탄이기도 하다. 비유컨대 돈 주앙이 가벼운 사랑의 대명사라면 중세 서사시의 주인공 트리스탄은 무거운 사랑, 운명적인 사랑의 화신이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프라하의 봄’의 여파로 스위스의 취리히로 건너가지만 테레자는 토마시의 바람기를 더는 참지 못하고 혼자서 프라하로 돌아간다. 이때 토마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테레자에게 돌아가야 할지 말지에 대해서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그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은 베토벤의 사중주 곡에 쓰인 가사 “에스 무스 자인(Es muss sein)”이다. “그래야만 한다”는 뜻의 이 가사는 ‘어려운 결단’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테레자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함으로써 그의 운명을 짊어지기로 한다.


이렇듯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진동하는 토마시의 삶은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와 “그래야만 한다” 사이에 걸쳐 있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오직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삶의 무거움은 부담스러워하면서 삶의 가벼움은 구제하고자 자주 서성이고 있는 듯싶기 때문이다.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소설적 성찰이면서 우리 존재의 딜레마에 대한 우아한 묘사다. 쿤데라와 함께 삶은 얼마만큼의 무게를 갖는 것이 적당할지 다시 생각해봐도 좋겠다.

 

15.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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