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402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공부의 배신>(다른, 2015)에 대한 서평이다.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에 비해서 번역본의 제목이 너무 좁게 붙여진 듯한 느낌이다. 엘리트 교육의 결과로 양산된 '똑똑한 양떼'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전반부보다 그 시스템을 비판하는 후반부 쪽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저자가 언급하는 책들 가운데 하버드대 학장을 지낸 해리 루이스의 <영혼 없는 똑똑함>도 소개되면 좋겠다 싶다.
시사IN(15. 05. 30) 엘리트 교육의 불편한 진실
통상 한국사회에서 자녀 교육의 대미는 명문대학 입학으로 장식된다. ‘좋은 대학’이라고 얼버무리기도 하지만 대학은 철저하게 서열화되어 있고, 자녀 교육의 성공 여부는 어느 대학에 들어갔는지로 판가름된다. 미국의 명문 예일 대학 교수를 지낸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공부의 배신>을 보면 미국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만 하면 과연 아무 문제가 없을까'라는 것이다. 여러 명문대학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근거로 그는 문제가 자못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똑똑한 양떼’란 원제가 겨냥하는 것은 미국 엘리트 교육의 실패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국가들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복기국가 모델을 만들 때 미국은 고등교육의 확장을 통해서 물질적 지원 대신에 기회를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기회의 제공은 대규모의 중산층과 새로운 상류층을 낳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의 대학 교육은 불평등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불평등한 시스템 자체가 되어버렸다. 높은 대학등록금도 문제지만 입시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비약적 증가로 가정의 경제적 배경이 곧 성적과 직결되게 되었다. 가령 하버드대학 학생의 40퍼센트는 연소득 상위 6퍼센트에 속하는 가정 출신이다. 저자가 보기에 “명문대는 불평등사회를 역전시키는 데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책적으로 불평등사회를 적극 조장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도 수월성 교육이란 명목으로 온갖 특목고가 난립하는 양상이지만 그런 엘리트 교육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폐쇄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인데, 어느 날 그가 집수리를 위해 배관공을 불렀다. 한데 배관공이 부엌에서 일할 준비를 하며 머뭇거리는 동안 저자는 그에게 변변하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교육 과정에서 배관공을 만날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가 받은 엘리트 교육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대신에 오히려 그런 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엘리트 교육이 '실력 사회'를 낳았지만 그 실력 사회의 이면은 진정한 리더십의 부재다. 저자가 현재 미국 지배세력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대목이다. 가령 1988년 이후 주요 대통령 후보자 10명 가운데 대다수가 하버드나 예일 등 명문 사립대학 출신이다. 1948-1984년 대통령 후보자 14명 가운데 단 3명만 명문 사립대에 다녔던 것과 비교되는 수치다. 이들 가운데 명문가 출신이 단 2명이었던 데 비해 그 이후로는 10명 중 6명이 ‘상속자’에 속한다.
그런 배경을 가진 기술관료의 전형으로 저자는 오바마 현 대통령을 지목한다. “오바마는 자신만의 비전이 있는 척하지만 그의 비전은 기술관료 그 자체다.” 오바마는 잘하지 못하는 과목의 수업은 듣지 않으려고 하는 학생처럼 힘겨운 정치적 싸움은 회피하려 한다고 저자는 비꼰다. 하지만 그것은 오바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똑똑하지만 그렇듯 순응적이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인재들만을 배출해내는 엘리트 교육 시스템의 문제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은 아예 회피하기에 실패할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엘리트 교육이었다.
예상할 수 있는 결론은 물론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최고의 무상 고등교육 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대학 지원자들에게 성취 목록과 함께 ‘실패 이력서’도 제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도 그럴 듯하게 들린다. “아이들이 배움에 대한 애정으로 공부하고 사람들이 일에 대한 애정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가 저자만의 이상향이 아니라면 우리도 충분히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15. 0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