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고전'으로 두 권을 고른다. 19세기 러시아 작가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의 <러시아의 밤>(을유문화사, 2015)과 필리핀 작가 호세 리살의 <나를 만지지 말라>(눌민, 2015)다.
이번에 초역된 <러시아의 밤>은 푸슈킨과 동시대 작가였던 오도예프스키(1803-1869)의 대표작이자 러시아 낭만주의문학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풍부한 이야기와 여러 철학적 담론들이 펼쳐지는 이 작품은 19세기판 천일야화라 할 수 있다. 비록 천 일에 못 미치는 아홉 번의 밤을 보내면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철학적이면서도 현학적인 대화와 서구 문명의 병폐를 꿰뚫는 작가의 시선은 천일야화에 버금가는 깊이를 담고 있다.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이 소개되는 액자식 구성으로 된 이 작품은 작가가 이야기 속 인물들과 적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자칫 무거워질 수도 있는 주제들을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와 함께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을 길고 긴 러시아의 밤을 닮은 철학의 밤으로 흥미진진하게 안내한다.
국내 소개된 19세기 러시아문학의 몇 가지 공백 가운데 하나가 메워져 반갑고 다행스럽다. 푸슈킨과 고골의 동시대 작가의 또 다른 상상력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역시나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호세 리살은 필리핀 근대문학의 아버지 격의 작가이고 <나를 만지지 마라>는 그의 대표작이다(흔히 <놀리>라고 약칭된다).
필리핀의 국민 영웅 호세 리살의 1887년 작품. 식민지 필리핀의 진정한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던 위선적인 스페인 신부들과 그에 붙어 민중을 억압하는 데에 앞장선 군인들과 관료들, 그 속에 고통으로 신음하던 민중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로 필리핀 민족주의 형성과 독립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소설이다. 당시 필리핀은 타이완과 보르네오 사이의 7000여 섬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러 부족에서 스페인 식민 지배의 고통을 함께 받는 필리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은 착취를 당하는 민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종교와 무력으로 이들을 억누르는 식민 세력을 극명하게 폭로하여 민족주의 독립 운동의 불을 당겼다.
개인적으로는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나남출판, 2003)에서 언급되고 있는 작품이라 궁금했었는데, 비로소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미리 읽고 적은 추천사는 이렇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 답하는 소설들이 있다. 미국의 노예해방을 앞당긴 스토우 부인의 <엉클 톰스 캐빈>과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를 이끈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등이 그렇다. 여기에 필리핀 문학의 아버지 호세 리살의 <나를 만지지 마라>를 당당하게 추가해야겠다. 아시아 최초의 민족주의 혁명을 일으킨 나라가 필리핀이고 그 배경에 이 소설이 있었다. 이 소설은 리살과 필리핀의 역사를 재발견하게 하며 문학의 위엄을 되새겨준다.
두 권의 초역 작품 덕분에 오월의 밤이 더 근사해졌다...
15. 0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