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생명에서 펴내는 월간 다솜이친구(172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번달 '감각의 도서관' 코너에서 다룬 책은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 2015)과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제이북스, 2014)이다. 두 책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이다.


다솜이친구(15년 4월호)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인의 자세
독서계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인문서는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 시리즈다. ‘한권으로 편안하게 즐기는 지식 여행서’를 표방하는 책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인문서에 대한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준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편’을 다룬 1권이 지난해 연말에 나온 데 이어서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편’을 다룬 2권이 바로 출간됐는데, ‘철학편’을 중심으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특징과 비결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현실 세계를 다룬 1권에 이어서 2권에서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다룬다고 말하면서 “이 책 전체는 진리에 대한 세 가지 견해로서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구조화했다”고 프롤로그에서 말한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절대주의란 불변의 단일한 진리를 상정하는 태도를 가리키며, 상대주의는 변화하고 운동하는 현상세계를 고려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반면에 회의주의는 보편적 진리나 그에 도달하는 방법을 거부하는 태도다. 서양철학사 전체가 이러한 세 가지 태도의 경합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가장 먼저 대두한 건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었다. 이들은 진리에 대해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는데,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함으로써 진리가 개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 프로타고라스가 대표적이다. 반면에 그러한 경향에 맞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한 플라톤은 영원한 이데아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절대주의 철학을 정초한다. 이후 절대주의는 서양철학 전통에서 주축이 되기에 화이트헤드는 “2000년의 서양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저자는 그렇게 시작된 절대주의 전통이 중세 교부철학과 실재론을 거쳐 근대 합리론으로 이어지며, 이와 대비하여 상대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중세 스콜라철학과 유명론을 거쳐 근대 경험론으로 이어진다고 정리한다. 이 두 경향의 종합은 칸트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헤겔과 마르크스가 뒤를 잇는다.
철학사의 주류가 대체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경합이었다면 회의주의는 비주류에 해당하는데, 소피스트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현대 실존주의로 계보가 이어진다고 저자는 본다. 철학사에 대한 이 정도의 개요를 갖고 있다면, 지적 대화에 충분한 바탕이 된다는 게 이 책의 관점이다. 다소 거칠고 도식적이지만 그런 만큼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 강점이다.
철학을 진지하게 전공하려는 게 아니라 지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 정도가 목적이라면 ‘넓고 얕은 지식’이 적격이다. 그런데 지적 대화는 간혹 예기치 않게 ‘좁고 깊은 지식’을 요구하기도 한다. ‘넓고 얕은 지식’이 ‘얄팍한 지식’으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서는 약간의 대비책이 필요하다.
가장 효과적인 건 몇 권의 핵심적인 고전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알고 정리해두는 것이다. 가령 플라톤이라면 <국가>의 개요가 무엇이고 ‘동굴의 비유’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두는 게 필요하다. 물론 방대한 분량 때문에 <국가>를 읽어내는 건 엄두를 내기 어렵겠지만 가장 많이 읽히는 또 다른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도는 직접 읽어보거나 추가적으로 아는 체를 해두는 게 좋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변명하는가. 아테네 시민들을 미혹한다고 고발당하여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당당한 태도로 자신이 무죄라는 걸 주장한다. 아니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이 한 일이 아폴론 신이 그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주장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이러한 사명을 중단시킬 수 없다고 강변한다. 유죄 판결을 내린 배심원단의 재판결과에 대해서도 의연하게 대응하면서 어느 쪽이 좋은 것(선)을 향해 가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라고 말한다.
<변명>의 핵심적인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검토 없이 사는 삶’은 흔히 ‘성찰하지 않는 삶’이라고도 옮겨진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란 오랜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으로도 읽을 수 있다. ‘넓고 얕은 지식’도 ‘성찰하는 삶’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면 충분히 ‘얄팍하지 않은 지식’으로 값할 수 있을 것이다.
15. 04.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