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점심에 '뉴스1'과 가졌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빈번하게는 아니지만, 종종 이런 인터뷰를 가졌기에 중복되는 내용도 있다. '코덱스'라고 얘기한 게 '코테스'로 와전됐기에 바로잡는다...
뉴스1(15. 02. 26) 로쟈 "책은 내 운명, 당사주도 흰 도포 입은 도인이 책읽는 그림"
미세먼지와 황사의 콤보 공격이 잦아진 25일 신촌의 한 중식당에서 '죄와 벌'의 살인범 이름인 '로쟈'를 필명으로 가진 인문학자이자 출판평론가 이현우씨를 만났다. 두터운 안경너머로 두 눈은 중요하다 싶은 이야기를 할 때 반짝거렸고 신변잡기를 얘기할 땐 조금 더 빛났다. 말투는 어눌한 듯하면서도 진지하고 끈덕졌다(?).
음악좋아하는 사람에게 판(CD) 자랑, 주당에게 주량 자랑 시키듯, 애서가에게 책 소장규모를 물었다.
"책이 매해 2000권씩 불어나 현재 소장한 책은 2만권 가량 될 듯 해요. 한달에 100권 정도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고 나도 100권 넘게 자비로 책을 사봅니다."
책값이 만만찮을텐데…"연간 수천만원을 책사는데 쓰죠."
정말 책을 좋아하나보다. 책을 사랑하는가, 어떤 이유로 사랑하는가 돌발질문에 로쟈는 이같이 대답했다.
"초등학교때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계몽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책꽂이에 쫙 꽂혀있는 것을 처음 보고 매혹된 것 같아요. 서점에 가본적도 없었고 나중엔 전집도 샀지만 당시 집에서 보던 책들은 낱권이었죠. 그런데 장정된 책들이 도열해 있는 것을 보고는 강한 인상을 받았고, 대단해 보인 거죠. 그후 제가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남편이 바람나 애를 끓이는 동네 아주머니와 당사주를 보러 갔는데 그 아줌마가 펼친 그림이 한 여자가 남자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그림이었대요. 어머니는 이거 용하구나 싶어 그 자리에서 내 사주도 봤는데 흰 도포를 입은 도인이 책읽는 그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는 책읽는 아들의 팔자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는지 내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고 했을때도 반대하지 않았죠."
당사주는 당나라 때 이허중이 설파한 사주풀이법으로 우리나라에선 빨강·파랑·노랑색으로 채색된 그림이 가미돼 자기의 길흉화복을 일반 서민들이 쉽게 그림으로 볼 수 있게 바뀌었다.
로쟈는 고전문학과 인문학 등을 주력으로 평론한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물었다. "인구 70억 시대의 현재는 초유의 일이기 때문에 고전이 이 시대의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고전은 인간 삶에서 변하지 않고 반복해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길을 제시해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신체적·정서적 변화는 수천년, 수만년동안 천천히 일어납니다. 그런 이유에서 문자가 발명된 지 5000년이 지난 현재는 동굴벽화 시대와 '동시대'고 고전은 동시대의 책입니다."
하지만 최근 수년동안 스마트폰이 인간의 정서도 변화시키고 있지 않나? 어려운 내용, 긴 문장을 읽기 어려워하게 됐고 스마트폰으로 웹툰이나 웹소설을 보고…포스트잇에 그린 그림을 책으로 낸 것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데?
"그것은 책의 형태를 빌린 책 비슷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최소한 한 세대(30년)는 지나야 스마트폰이 감성을 바꿨는지 얼추 알 수 있다고 봐요. 좀 더 기다려봐야하지만 저는 몇 십 년 정도로는 인간 정서가 바뀌지는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또 바뀌었다고 해도 문제죠."
어떤 게 문제가 되나? 이 대목에서 로쟈는 좀 더 진지해지고 눈빛이 몽롱해졌다.
"인간의 이미지, 삶의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제가 본 한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책을 읽는 그림이 있었는데 책을 펼쳐 들고 있는 그 자세는 바로 기도하는 자세였습니다."
두루말이가 아니었나? 책인가? 또 돌발질문. "코덱스 형태의 책이었죠. 페이지들이 모아져 지탱해주는 딱딱한 부분을 가진 책 형태로 사실상 책의 원형이 이것입니다. 이 당시에도 있었고 그 후부터 책에는 등뼈가 있게 됐습니다. 전자책은 등뼈가 없죠."
로쟈는 다시 엄숙한 분위기로 돌아가 말을 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책을 읽음으로써 이교도에서 종교적인 인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독서행위를 통해 우리는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전자책이, 모바일 기기를 통해 보는 유사책들이 이런 경험을 갖게 할수 있을지는 회의적입니다."
하지만 최근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서 보듯 쉽고 얕은 책이 유행이다. 깊이있는 인문학 책을 읽는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정보 뿐 아니라 사고하고 길을 찾는 훈련을 위한 것이다. '지대넓얕'은 이 과정이 생략된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인문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를 질문했다.
"이런 '미끼를 던지는 책'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 깊이있는 인문서를 안 읽고 얕은 책을 읽느냐고 묻지만 우리는 그런 책읽기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읽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대중인문학'에 대해 우려하고 '표피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정색을 한' 인문학을 꼭 읽을 필요는 없어요. '인문학'이라는 용어가 남용되는 데 사실상 '인문교양' 정도면 되는 것이며 기본적인 일반 시민의 교양의 일부로서 '지대넓얕' 같은 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책을 읽고 더 나아갈 사람은 나아가겠지요."
1990년대 한때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원서 강독이 유행이었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 아닌가. 대조적인 현상의 원인은 뭘까?
"당시 금지된 지식이 풀리면서 억눌렸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행위가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읽었을 뿐이며 어려운 서적에 대한 갈구가 일반적인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책을 안읽는다, 책의 위기다, 라는 말이 이미 오래전부터 나왔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물었다.
"우리나라가 한참 잘 나갈때는 출판규모가 세계7위였습니다. 현재도 다른 산업에 비해 작긴 하지만 다른 나라보다 규모가 작지는 않습니다. '책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장론자'들이 아닌가 합니다. '파이가 커져야 한다'는 식의 인식이 깔려 있는 거죠. 저는 책 평론가로, 출판산업부분은 제가 이야기할 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지금이 위기거나 문제상황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태가 유지되고 대신 내실을 충실하게 하면 나쁘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일주일에 200권 책을 출판평론가는 어떤 식으로 읽는지 궁금했다. 무슨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까? "책 표지, 목차 등 책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들쳐보고 만져보면서(!) 어떤 책인지 탐색합니다. 맘에 들면 읽기 시작하고 시간되면 다른 사람이 쓴 그 책의 리뷰도 읽습니다."
로쟈는 한 권만 고전을 읽을 수 있다면 무슨 책을 읽을까 하는 싱거운 질문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추천했다. 로쟈는 그 이유로 "읽은 사람이 별로 없고…제가 러시아 문학 전공이라…"하고 질문에 걸맞게 싱겁게 대답했다. 로쟈와의 만남은 중국 음식을 가운데 두고 좀더 신변잡기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 이어지다가, 이대 강의 약속 시간에 맞춰 그가 일어나면서 끝났다.(권영미 기자)
15. 0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