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NF 시리즈가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소설의 새로운 얼굴(New Face of Fiction)이란 뜻이었다. 출판사는 '현대문학의 새로운 얼굴'로 옮기고 있다. 새로운 얼굴이라고 하기엔 이미 나이가 꽤 든 작가이지만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의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시공사, 2014) 덕분에 알게 된 시리즈다. 노르웨이 작가 셰르스티 안네스다테르 스콤스볼의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시공사, 2014)도 바로 이 시리즈의 하나다.
사실 이 책이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이란 건 어제서야 알았다. 원고를 검토하다 읽어야 할 필요 때문에 손에 든 터였다. 일단 너무 장황한 작가의 이름을 그냥 성으로만 부르면 스콤스볼은 1979년생으로 2009년, 나이 서른에 발표한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 한데 25개국에 번역될 정도로 '대박'을 쳤다. 이 정도로 세계독자들에게 어필한 작품이라면 한국 독자들에게도 뭔가 통하는 게 있어야 맞을 것이다. 소개대로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말이다.
소설의 독특함은 첫 단락에서부터도 느껴진다. 한데 뭔가 뜻이 통하지 않는 번역이다. 주인공 '나'는 어떤 일에서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소개되고, 사례들이 나열된다. 남편 옙실론에게서 난초를 생일 선물로 받은 '나'는 좀 당혹스러워한다. 이어지는 문장.
나는 생일 선물로 난초를 원하지 않았다. 사실 꽃을 선물로 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금방 시들시들해져 죽을 것이 뻔하니까. 내가 진짜 원한 건 엡실론이 직장 일을 마무리하고 은퇴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겐 숨쉴 공간이 필요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엡실론은 이렇게 말했고, 나는 곧 그가 "같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대신 "발가벗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내가 물었다. "꼭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내가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 그 다음에 "그래서 나는 난초 대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 꽃망울이 터지면 분홍색 꽃잎이 사방에서 머리를 내밀겠지. "당신이 내게도 그렇게 대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엡실론이 중얼거렸다."라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남편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발가벗는 것을 원한다고 하니까 아내가 난초 대신 옷을 벗었다? 논리적으론 이어지는 것 같지만, (변태가 아닌 다음에야) 난초가 옷을 벗는다는 게 무슨 말인가? 다행히 영어본도 나와 있기에 찾아봤다. 남편 엡실론이 앞에서 한 말을 이렇게 옮겼다.
"But I need a refuge from all the..." -for a second I thought he was going to say "togetherness," but instead he said "nakedness."
인터넷에는 다른 영어번역도 떠 있는데, 거기에선 'togetherness'를 'twosomeness'라고 옮겼다. '같이 있는 것' 내지는 '둘이 있는 것'. 문제는 영어본에서 이 단어가 a refuge from의 목적어라는 데 있다. 한국어판에 따르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같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줄 알았더니 "모든 것에서 벗어나 발가벗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인데, 실상은 정반대다. "같이 있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라고 말할 줄 알았더니 "발가벗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라고 말했다는 것. 영어본과 한국어본이 정반대로 옮기고 있으니 둘 중 하나가 오역일 테지만, 문맥상 한국어본을 지지하기 어렵다(정황적으로도 어렵다. 작가가 영어본은 읽어봤을 테지만, 한국어본을 읽었을 리는 없으므로). 어떤 문맥인가?
그래서 나는 난초 대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 꽃망울이 터지면 분홍색 꽃잎이 사방에서 머리를 내밀겠지.
이 부분의 영어 번역은 이렇다(다른 영어 번역도 대동소이하다).
So I undressed for the orchid instead, and soon the buds began to blossom, little pink flowers were springing out everwhere.
무슨 뜻인가. 남편이 발가벗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니까(부부관계에 대한 완곡한 회피인가?) 아내는 남편 대신에 난초를 위해서 옷을 벗었다는 것이다. 난초 대신 옷을 벗은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난초가 여기저기서 활짝 꽃망울을 틔웠다는 것(한국어본의 미래시제도 과거시제로 바뀌어야 한다).
대번에 알 수 있는 건 번역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수십 번은 읽어봤을 첫 단락에서부터 오역하고 있다면, 게다가 문맥에 대한 파악이 전혀 안 되고 있다면, 유감스러울 수밖에 없다. 노르웨이어에 능통한 전공자나 전문가가 희소한 탓에 역자가 노르웨이어 책은 전담해서 번역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번역이라면 중역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역시나 노르웨이 작가로 스콤스볼보다 10년 윗 연배의 에를렌 루의 화제작 <나이브? 슈퍼!>(문학동네, 2009)가 국내에서 '찬밥'이 된 것도 혹 번역이 부실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개인적으로는 지난 2004년 모스크바 체류중에 한 대형서점에서 69년생인 이 '젊은' 작가의 사인회가 있었고 우연이었지만 나는 줄을 서서 작가의 사인본까지 받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언어적으로는 변방이기에(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차별받지 않겠지만) 노르웨이 문학을 우리가 자주 접하기는 어려운데, 정확한 중개가 어렵다면 실망스러운 일이다. 당장의 대책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 다만 출간 과정에서 더 확실한 검증과 검토 과정을 거쳤으면 좋겠다...
15. 02. 22.
P.S. 외국소설 번역과 관련하여 최근에 또 한 가지 난감했던 사례는 더글러스 케네디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밝은세상, 2014)이다. 의도적인 누락이 너무 많다는 지적 때문이다(http://asnever.blog.me/220240921764 참조). 어쩌다 한두 줄 누락은 실수라 쳐도 이 번역본의 경우엔 (분량을 줄이기 위한 것인지) 터무니 없는 누락이 너무 많아서 몇 퍼센트 번역인지 밝혀주는 게 옳겠다 싶을 정도다(이렇게 되면 작품을 인용할 수가 없다). <빅 픽처> 등의 대표작도 다 이런 방식으로 번역, 출간한 것인지 역자나 출판사의 도의(저의?)가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