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전날이라고 특별히 읽어야 하는 책이 있는 건 아니리라. 오늘도 수십 권의 책과 안면을 튼 다음에 손에 든 책은 김윤식 교수의 <내가 읽은 기행문들>(서정시학, 2015)이다. 대충 저자의 거의 모든 책을 구입하는 쪽이라(오래전에 나와 절판된 책들을 제외하면 내가 구할 수 있는 책은 거의 다 구한 듯하다) 이 역시 눈에 띄는 대로 주문해서 어제 배송받은 것이다. 사실 <내가 읽고 쓴 글의 갈피들>(푸른사상, 2014)을 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저자는 현장비평과 문학사 연구 사이에 틈틈이 문학/예술 기행문을 출간해 왔는데, 이번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책에서는 여행기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었소. 일기와 매우 닮은 여행기. 이를 어떻게 말해야 적절할까. 소생은 무려 16권의 여행기 책을 썼거니와 이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아득한 회색, 선연한 초록' 혹은 '황홀경의 사상'이라 하면 어떨까요.
두 마디로 나란히 적은 건 각각 <아득한 회색, 선연한 초록>(문학동네, 2003)과 <황홀경의 사상>(홍성사, 1984)로 나왔던 책의 제목이다(<황홀경의 사상>은 절판돼 알라딘에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 기행문으로 내가 제일 처음 읽은 게 <문학과 미술 사이>(일지사, 1979)였다(알라딘에 제목은 남아 있다). 짐작에는 기행문 종류로 첫 책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 이후에 15권이 더 나왔다는 애기가 된다.
그 15권을 다 떠올리지는 못하겠는데, 그래도 가장 생생히 기억하는 책은 <낯선 신을 찾아서>(일지사, 1988)와 <환각을 찾아서>(세계사, 1992), <지상의 빵과 천상의 빵>(솔, 1995) 등이다. 모두 학부와 대학원 때 읽은 책이어서 그런 듯싶다. 또 가장 열심히 읽을 때여서(도서관에서 김윤식 교수의 70-80년대 연구서와 평론집들을 쌓아놓고 읽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하면 <샹그리라를 찾아서>(강, 2003)만 하더라도 완독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미 마음놓고 책을 읽을 때는 지났던 모양이다.
그밖에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솔, 1999), <김윤식 문학기행>(문학사상사, 2001), <내가 읽고 만난 파리>(현대문학, 2004)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시나가와역>(솔, 2005) 등이 기행문 범주의 책들.
그러고 보니 나도 어줍잖게마나 문학기행 같은 책을 써보고 싶은 생각도 드는군. 여행을 별로 즐기지 못해 온 처지에서 기행문을 쓴다는 게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긴 하나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웅진지식하우스, 2014) 같은 책이라면 써볼 만하다는 생각도 갖게 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50년간 세계여행을 한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런 건지 궁금해서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여행1,2>(바람구두, 2011)도 구입했다(저자가 유명한 성전환자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아무튼 다시 김윤식 교수의 기행문 읽기로 돌아오자면, 저자는 책에 자신이 쓴 기행문들도 덧붙였다고 밝히면서 서문의 말미에 이런 소회를 적었다.
벗이여, 이 모든 것은 결국 무엇으로 수렴되겠습니까. 종교도, 사명감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앞서 있겠지만, 그러나 마지막 남은 것은 '아득한 회색, 선연한 초록'이 아니겠는가. 벗이여, 혹시 소생의 책상 위에 놓은 물건들을 보시라. 중국산 청동 촛대, 울란바토르의 레닌 배지, 오르세 화랑에서 구입한 드가의 무희(자석용), 유리상자 속에 든 <백조의 호수>의 발레리나 등등. 석가세존의 말씀대로 제행은 무상인 것. 그러나 벗이여, 꾸짖지 마시라. 죽을 때 모두 두고 갈 터이니까.
연휴가 지나면 봄이 한걸음 더 다가설 것이고, 선연한 초록으로 세상이 물드는 계절도 오리라. 봄맞이용으로 나 자신에게 선물한 <카프카전집>(러시아어판)도 그 전에는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흡족할 것이다. 제행 무상. 하지만 <내가 읽은 기행문들>을 읽으며, 읽다가 이런 글을 적으며, 잠시 부듯함을 느낀다. 무상함 속에서도 이런 밤은 괜찮다...
15. 02. 17.
P.S. 김윤식 교수의 여행기로 페이퍼에서 언급하지 못한 것은 <우리 문학의 안과 바깥>(성문각, 1986), <설레과 황홀의 순간들>(솔, 1994), <풍경과 계시>(동아출판사, 1995), <동양정신과의 감각적 만남>(고려대출판부, 1997), <바깥에서 본 한국문학의 현장>(집문당, 1998) 등이다(마지막 책은 책에 <바깥에서 본 한국문학과의 만남>이라고 오기돼 있다. <샹그리라를 찾아서>도 <상글리라를 찾아서>로 잘못 적혔다. 저자의 착오로 보인다). 거의 대부분의 책을 읽거나 소장하고 있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