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그룹의 사보 '아주좋은날'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격월간이던 잡지가 이번 호부터 계간으로 변경되었는데, 1월에 나왔으니 겨울호라고 해야 할지, 봄호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계절과 무관한 계간인지도. 청탁받은 주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문학세계였다. 안 그래도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란 주제의 강의도 가끔씩 하게 되기에, 나로서도 정리하는 의미가 있다. 지면에는 작가명이 '푸시킨''도스토옙스키'로 표기됐지만 옮겨온 글에서는 서재에서 써온 대로 '푸슈킨''도스토예프스키'라고 표기한다. 더 자세한 건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현암사, 2014)를 참고하시길. 아직 번역되지 않은 대표적 평전 두 권도 번역되면 좋겠다.  

 

 

아주좋은날(15년 1월) 러시아문학의 거봉,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러시아문학을 말하다

러시아가 가장 큰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바로 그들의 문학이다. 근거가 없지 않다. 세계적인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레프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대표 작가들이니 말이다. 두 작가는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는데, 러시아 근대문학의 탄생 시점이 바로 한 세대 전인 걸 고려하면 그 비약적 성장은 놀랄 만하다.


러시아문학의 탄생이라고 하면 알렉산드르 푸슈킨을 떠올리게 된다. 1799년에 태어난 푸슈킨은 1820년에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1837년 불의의 결투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다양한 장르에 걸쳐서 러시아문학의 탄탄한 토양을 만들었다. 그 뒤를 이어 니콜라이 고골과 미하일 레르몬토프 같은 작가들이 등장하여 그 토양을 더욱 기름지게 했다. 이 세 작가에 이어 다음 세대에 속하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에 와서 러시아문학은 서유럽 문학에 결코 뒤지지 않는, 아니 그보다 더 앞선 성취를 보여주었다. 모두 19세기 중후반 반세기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러시아가 그토록 자랑해마지 않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문학은 과연 어떤 높이에 도달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찬란한 빛을 잃지 않는 것일까? 사실 두 작가는 동시대에 활동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생애는 물론 작품세계까지 공통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상이하다.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란 양자택일적 물음이 가능할 정도다. 러시아 문학은, 나아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두 작가에 의해 양분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비극’에, 톨스토이의 소설을 ‘서사시’에 비유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대단히 드라마틱하고 그 중에서도 비극과 친연성이 있는 반면, 톨스토이의 작품은 서사시적인 스케일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나는 누구인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여느 러시아작가들과는 달리 잡계급 출신의 작가이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귀족도 아니고 농민도 아닌 중간층을 잡계급이라고 불렀는데, 의사와 상인, 성직자가 여기에 속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근면 성실했지만, 책읽기를 좋아한 아들은 조숙하면서도 낭비벽이 심했다. 공병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끊임없이 용돈을 요구하는 편지를 ‘울먹이는 문체’에 담아서 아버지에게 보냈는데,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요구한 액수보다 더 많은 돈을 부쳐주었다고 한다. 형편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편지가 워낙에 애절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력은 이런 ‘구걸’의 편지를 쓰면서 길러졌다고 하면 과장일까.

 

하지만 아들은 그렇게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대로 다 써버렸다. 그는 늘 돈에 쪼들렸고,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간청해야 했다. 작가로 데뷔한 이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아서 투르게네프에게도 손을 벌렸다가 사이가 틀어진 일화는 유명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빌려달라는 돈의 절반만 빌려준 투르게네프가 나중에 전부를 빌려주지 않았느냐고 착각하는 바람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분노를 산 것이었다. 두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기 수개월 전에야 화해했다.


이러한 이력을 가진 작가의 데뷔작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건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다. 이 작품은 가난한 중년의 하급관리 마카르 제부시킨과 그의 먼 친척인 소녀 바르바라가 주고받은 편지로 구성되었다. 1840년대 유행한, 하층민들의 삶에 대한 ‘생리학적 스케치’를 계승하는 작품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거기에다 가난한 사람들의 심리학을 덧붙였다. 가난하기 때문에 궁색한 살림살이를 걱정하면서 늘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도스토예프스키는 탁월한 장기를 발휘했다. 어떤 심리일까? 끼니는 굶어도 차는 마셔야 한다는 심리다. 끼니를 거르는 것은 선택일 수 있지만, 차를 마시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가난해서 그렇다는 인상을 주게 될 테니까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로 문단의 격찬을 받으며 성공적인 데뷔를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뒤이어 발표한 작품은 미온적인 반응을 얻는데 그쳤고, 결정적으로는 한 정치서클에 가담하여 활동한 게 문제가 돼 1849년에는 시베리아 유형까지 떠났다. 얼어붙은 땅에서 유형생활을 마치고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은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는 한 살 위의 형 미하일과 잡지를 발간하면서 작가로 재기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라는 문제적인 작품을 발표한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죄와 벌>부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는 걸작 장편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끊임없이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이 정체성은 언제나 타인의 인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인정이 빠진다면 우리는 사회적 존재감을 갖는 대신에 ‘내가 생각하는 나’, ‘내가 상상하는 나’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렇듯 나의 존재는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나는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면서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쟁투가 도스토예프스키 초기 문학의 주제였다. 또한 시베리아 유형 이후에 그는 이 문제를 국가적 정체성의 문제로 확장했다. ‘러시아는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 것이다. 러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답도 유럽이라는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타자와의 대비를 통해서만 얻는다. 누구보다도 유럽의 사상과 정치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인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유럽적인 작가’이기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수수께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가 타인과 타자에 그토록 관심을 기울인 반면, 톨스토이는 그 자신의 문제에만 몰입한 것처럼 보인다.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특히 세 살 때 잃은 어머니의 부재는 그의 인생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라면서도 형을 비롯하여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톨스토이에게는 죽음이라는 문제가 필생의 수수께끼이자 과제로 남았다. '필멸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유한한 삶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것이 그가 품은 물음이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든다면 과연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전적 데뷔작 <유년시절>에서부터 나타난다. 아홉 살짜리 주인공이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겪는 낯설음과 공포, 슬픔 등이 이 작품에 묘사되어 있다. 데뷔작이 호평을 받자 톨스토이는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자전 3부작을 완성했다. 그리고 농민계몽운동과 교육운동에도 헌신한 그는 34세라는 늦은 나이에 소피아 베르스와 결혼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었다. 이후 그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전후 러시아 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을 장대한 스케일로 엮은 <전쟁과 평화> 집필에 착수했다. 주인공 나타샤의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러시아의 정체성 혹은 통일성 문제다.

 

당시 러시아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두 계급은 사용하는 언어조차 아예 달랐다. 대다수 민중이 러시아어를 쓴 반면에, 상류 사교계의 귀족은 일상에서도 프랑스어를 썼다. 심지어 나폴레옹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근심 어린 대화를 프랑스어로 나눌 정도였다. 나폴레옹 전쟁은 바로 이러한 러시아 사회에 ‘러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 사건이었다. 


톨스토이에게서 사회적 통합의 문제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반복된다. 톨스토이는 우리는 크게 정신적 자아와 육체적 자아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바람직한 삶이란 이 두 자아가 안정적으로 통합되고 조화로운 관계에 놓일 때 가능하다. 하지만 육체적 자아의 욕망, 특히 성욕은 톨스토이가 보기에 쉽게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악마>, <세르게이 신부> 등의 여러 작품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성적 욕망의 파괴적인 힘과 그 파멸적 결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신적 자아와 육체적 자아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전쟁과 평화>와 함께 톨스토이 문학을 대표하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두 주인공 안나와 레빈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선택이다. 브론스키와의 관계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게 되자 안나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레빈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같은 오랜 물음의 해답을 찾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안나가 육체적 자아를 대표한다면, 레빈은 정신적 자아를 대표한다. 이 작품에서 두 인물은 잠시 만날 뿐, 서로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두 인물의 공존과 결합이 그려지지 않은 것은 이후 톨스토이가 소설이란 장르 자체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아의 통합이라는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소설은 더 이상 미더운 수단이 못 되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문학이란 미적 형식을 통해서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면, 톨스토이는 진정으로 선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예술로서의 소설을 포기했다. 문학에 대한 태도에서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여전히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며, 러시아가 충분히 자랑할 만한 작가들이다.

 

15. 0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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