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문화재단의 웹진 '수성문화'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지난 연말에 쓴 것인데, 톨스토이 특집에서 내가 맡은 건 '톨스토이와 러시아문학'이란 꼭지였다. 한번 더 느낀 것이지만, 대표작 <전쟁과 평화>가 세계문학전집판으로 올해는 출간됐으면 싶다...

 

 

 

수성문화(14년 겨울호) '거대한 인간' 톨스토이를 말하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문호이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걸작 소설의 작가이면서 사회 사상가이자 ‘인생의 스승’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미 생전에 ‘성자’로 추앙받기도 했으니 단순히 작가로만 기억하기엔 부족한 느낌을 주는 이가 톨스토이다. ‘거대한 인간’ 톨스토이는 어떤 생애를 살았고 우리에겐 어떤 교훈을 남기고 있는가.

 

1828년 야스나야 폴라냐의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난 톨스토이는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는 불운을 맞는다. 유복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머니가 그의 나이 세 살 때, 그리고 아버지는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성장기 대부분을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자라게 되는데, 특히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모성에 대한 갈망이 그의 젊은 시절 방탕과 여성 편력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4년에 카잔대학교 동양어학부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군에 입대해 크림전쟁(1853-1856)에도 참전한다. 전쟁의 실상에 대한 경험은 여러 단편들의 소재가 됨은 물론 대작 <전쟁과 평화>의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데도 활용된다.

 


작가로서의 데뷔는 1852년 잡지 <동시대인>에 <유년시절>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진다. 주변의 일상과 어머니의 죽음을 어린아이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리고 있는 데뷔작이 호평을 받자 톨스토이는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자전 삼부작’을 완성한다. 작가로서의 탄생이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다는 건 톨스토이에게서 문학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었던가에 대해 시사해준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관심과 물음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에게서 문학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자기 탐구의 수단이었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결혼을 늦추던 톨스토이는 1862년 서른네 살 때 당시 열여덟 살의 처녀 소피아 베르스와 결혼한다. 만년에는 불화로 유명해지는 부부이지만, 결혼과 함께 톨스토이는 생활의 안정을 찾고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오래 준비해오던 대작 <전쟁과 평화>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결혼이 그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 것이다. 세계문학사에서도 손꼽을 만한 스케일의 이 작품은 당초 톨스토이가 1825년 12월에 일어났던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다루려고 했던 계획의 부산물이다.

 

전제주의의 개혁을 요구하는 청년 장교들의 봉기가 새로 즉위하는 황제 니콜라이 1세에 의해 강제로 진압된 사건이 데카브리스트 봉기였는데, 톨스토이 가문에서도 가담자가 있어서 톨스토이는 이 정치적 사건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봉기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발생한 것이기에, 그는 봉기의 의미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1812년 전쟁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러시아에서는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나폴레옹 전쟁 전후 시기 러시아 사회를 총체적으로 다룬 <전쟁과 평화>이다.

 


유럽전역으로 정복전쟁에 나선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전력을 얕잡아보고 1812년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간다. 하지만 여름철 전염병과 이르게 닥친 추위 때문에 힘겨운 전쟁을 치른다. 더구나 전쟁 초반 전투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은 후퇴로 일관했고, 프랑스군은 모스크바까지 점령하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한다. 러시아의 항복을 얻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나폴레옹의 군대는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프랑스로 되돌아가는 퇴로 곳곳에서 러시아군의 기습을 받아 거의 궤멸하게 된다. <전쟁과 평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배경으로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의 모습과 나타샤와 안드레이, 그리고 피에르 등 주요인물의 행적을 그린다. 특히 핵심이 되는 인물은 매력적인 여주인공 나타샤 로스토바인데, 이 작품에서는 처음에 소녀로 등장하지만 결말에 이르게 되면 성숙한 여인이자 아내, 그리고 어머니로 성장한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러시아를 다룬 역사소설이면서 여주인공 나탸사의 성장과정을 다룬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전쟁과 평화>가 러시아문학에서 갖는 의의는 비단 작품의 스케일이나 문학적 성취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작품 초반에 나폴레옹의 침공을 두려워하면서 러시아 사교계에서는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러시아 궁정과 상류사회의 문화가 모두 프랑스식 문화였고 그들이 사용한 언어가 프랑스어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전쟁은 러시아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낳게 한 전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의 독자성과 고유성은 무엇인가를 질문을 품게 된다.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함께 국민적 각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쟁과 평화>가 러시아의 ‘국민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가 1860년대 톨스토이의 대표작이라면 또다른 장편 <안나 카레니나>는 1870년대 톨스토이의 창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20세기 독일작가 토마스 만이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라고 격찬한 <안나 카레니나>는 얼핏 한 러시아 상류사회 귀부인의 불륜 사건을 다룬 소설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얼개 속에서 톨스토이는 당대 러시아 사회의 온갖 문제를 다룬 거대한 사회적 벽화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작가 자신의 정신적 자서전도 겸하고 있는 것이 <안나 카레니나>가 갖는 독특한 면모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유명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통상적인 독법에 따르면, 이 소설은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대비시키고 거기에서 도덕적인 교훈을 이끌어내는 결말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행한 결말과 대조되는 레빈과 키치의 결혼생활은 이러한 결말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삼십대 초반 톨스토이의 결혼 생활을 모델로 하고 있는 레빈과 키치의 결혼생활도 결코 이상적인 조화와 상호이해에는 이르지 못하는 걸 암시하면서 작품은 끝나기 때문이다.

 

정작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이후 정신적 위기에 봉착하여 문학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모든 결혼생활에 대한 부정과 나란히 이루어진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정(결혼)은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 <안나 카레니나> 직후에 쓴 <참회록>에서 톨스토이가 도달하는 결론이다.

 


이미 <전쟁과 평화>를 발표한 직후에 죽음에 대한 절대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던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면서 다시금 그러한 공포와 대면한다. 죽음은 톨스토이에게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는데, <참회록>에 따르면 그에겐 인생의 진리가 바로 죽음이었다. <참회록>에서 그가 예로 들고 있는 동양의 우화는 시사적이다. 한 나그네가 맹수에게 쫓기다가 우물에 빠지는데, 빠지는 순간 관목 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우물 밑을 내려다보니까 용이 입을 쫙 벌리고 있다.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순간이고 살아나갈 방도가 없다. 죽음이 필연인 상황, 이것이 톨스토이가 본 인생의 진리다. 그런데 나그네는 그런 순간에도 관목 가지에 달린 벌통에서 흘러내리는 꿀을 핥으며 도취돼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는다. 바로 이것이 톨스토이가 생각한 삶의 모습이었다.


이 우화에서 꿀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라는 삶의 진리를 직시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거짓이고 기만이다. 그러한 기만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가 가정과 예술이라고 톨스토이는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거짓을 혐오했던 톨스토이가 이후에 가정과 예술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그는 더 이상 예술작품으로서의 소설은 쓰지 않고자 하며 여러 차례 가출을 시도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고자 한다. 몇몇 중요한 작품들을 더 쓰긴 하지만 예술에 대한 부정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며, 가정에 대한 부정은 1910년 그의 가출과 객지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완결된다. 여든 두 살의 노구를 이끌고 집을 나선 톨스토이가 생을 마감한 곳은 한 허름한 시골 역사(驛舍)였다.

 


작가로서 톨스토이의 면모를 주로 살펴보았지만 그는 급진적인 사상가이자 설교가로서 모든 제도적 권위와 폭력, 그리고 전쟁에 반대한 무정부주의적 평화주의자였다. 후기에 쓴 장편소설 <부활>에서 묘사된 교회 비판이 문제가 된 1901년 러시아정교로부터 파문당한 사실은 그의 종교관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던가를 말해준다. 세계문학사에 남을 걸작들을 쓴 작가였지만 말년의 톨스토이는 그가 쓴 작품의 의의마저도 부정했다. 작가이면서 작가를 넘어선 자리에 인간 톨스토이가 자리한다고 해야 할까. 러시아의 대문호라고 하지만 만년에는 러시아라는 국가 자체도 부정하고자 했던 톨스토이였기에 그에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은 ‘거대한 인간’밖에는 따로 없는 듯싶다. 

 

15.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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