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잠시 들여다본 책은 개정 번역판으로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민음사, 2014)다. 예판시 주문을 했고 며칠전에야 펭귄판 영역본과 함께 배송받았다(영어판을 따로 갖고 있지만 바로 찾을 수가 없어서 펭귄판도 같이 주문했다). 이전 번역판과는 달리 미셸 푸코의 영어판 서문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가 서문격으로 번역돼 있어서 일단은 다행스러웠다(물론 이 서문을 읽다가 책을 덮는 독자들도 많이 있으리라). 그리고 예의 아주 유명한 서두를 읽다가 오래 전에 쓴 페이퍼가 생각났다. 2005년 7월에 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다(즐찾 300이 넘은 걸 기념하여 쓴 페이퍼인데, 그 후 거의10년이 지났고 현재는 5660명이다. 한 세월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새 번역본이 20년만에 나온 김에, 거의 10년 전 페이퍼도 다시 읽어보는 의미에서 옮겨놓는다. <안티 오이티푸스>의 첫 대목에서 '그것'에 대한 해석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번에 나온 김재인판의 번역은 이렇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le ça)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그 나름의 짝짓기들, 그 나름의 연결들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다음 단락부터는 2005년의 글이며, 빌미로 삼은 김항의 글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새물결, 2009)에 수록돼 있다. 한편 새 <안티 오이디푸스>의 판권면에 책의 1판 1쇄가 1997년 4월 25일에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994년에 나온 만큼 3년이 누락되었다. 1994년에 첫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옮긴이의 말'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런 착오가 발생한다는 건 놀랍다. 편집자가 너무 무신경했다...

 

브리핑 거리들은 정말로 널려 있지만, 책상에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힌 건, 혹은 가장 만만하게 눈에 띈 건 김항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세계의문학>, 2005년 여름호)이다(사실은 데리다의 "이론을 좇아서"란 글을 염두에 두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았다). 필자는 동경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데,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를 우리말로 옮긴바 있고, 나는 <세계의 문학>지에서 그의 글을 두번째로 읽게 되었다. 국가와 폭력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글은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온다.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할 저자들이 여럿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건 그냥 글의 서두뿐이다. 이 서두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서두이기도 하다. 

"그것(Ça)은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흐르며, 때로는 멈추면서, 도처에서 그것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호흡을 하고, 그것은 열을 내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그것은 섹스를 한다. 그럼에도 '한데 싸잡아 그것(le ça)'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도처에서 이것은 여러 기계들이다. 게다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하고, 접속하여 기계의 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 문단에 대한 필자의 해설: "여기서 '그것(Ça)'은 입이다. 호흡하고, 열을 내뿜고, 먹는 입. 항문과 연관되고 성기를 빠는 입. 이렇게 다른 기계와 연결된 기계인 입을 '그것(le ça=Es)'이라 부른 일, 즉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 입을 대표하는 입 일반은 없기 때문이며, 입은 항상 무언가에 연결된 기계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이라 부르며 안심한다."(강조는 나의 것)

 

이 대목을 읽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몇 년 전의 '논쟁(?)'이다. <문학과 사회> 2002년 여름호에 이종영의 "파시스트 들뢰즈와 가타리가 반(反)파시즘을 말하다"란 글이 실렸고(이 글의 풀-버전은 <내면성의 형식들>(2002)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파시즘과 반(反)파시즘'이란 보론으로 들어가 있다), 이어서 이를 반박하는 김재인의 글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가을호에 게재됐다. 이 논쟁의 핵심(즉, 들뢰즈/가타리가 파시스트냐 아니냐)은 여기서의 관심사가 아닌데, 다만 흥미로웠던 건 인용한 대목에서 '르 싸'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자신이 엉터리 번역본인 국역본 <앙띠 오이디푸스>를 참조하고 있다고(그러니까 <안티 오이디푸스>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며 당연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김재인에 대해서 이종영은 독자들/친구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의 번역이 엉망이고 ‘위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김재인 씨가 사례로 제시한 내용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에서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앙띠 오이디푸스>의 첫 문단을 듭니다. 즉 한글판에서 ‘이드’(Id, das Es)로 옮겨놓은 첫 문단의 ‘싸’(ça)가 ‘이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앙띠 오이디푸스> 첫 문단의 ‘싸’(ça)는 명백히 ‘이드’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숨쉬고 뜨거워지고... 똥누고 성교를 하는’ ‘그것’에 대해 말한 후, ‘그것’을 정관사를 붙여 ‘르 싸’(le ça)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은 정관사 ‘르’를 강조합니다... 김재인 씨는 이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똥누는 것은 토악질을 하는 것이고 성교는 하는 것은 키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러한 자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이 과연 <앙띠 오이디푸스>를 최명관 씨보다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이에 대해서 김재인은 이렇게 반박한바 있다: "내 주장을 반복하면 이렇다. 들뢰즈-가타리가 ‘르’를 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의도적인 혼동’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는 프로이트를 혼동시키기 위해.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수 정관사를 쓴 것은 더더욱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수 부정관사를 써서 ‘des ça’라고 했어야 옳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체요 리좀이다. 그래서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을 가리킨다는 점은 명백하다.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첫 문단의 서술을 잘 읽어보면 이 점은 명백하다(절대로 자의적 해석이 아니다). 이런 해석을 제시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이제 김항이 두번째인 듯하다(하지만, 이 '독특한 해석'의 반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나로선 이 서두에서의 '그것(Ça)'이 어떻게 '입'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하고 신기하지만 두 사람이나 이런 '독특한' 해석(처음 김재인이 그러한 견해를 제시했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유일무이한' 해석이었다. 전세계를 통틀어서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항만 빼놓고)을 제안/지지할 때는 정색하게 된다. 정말로 '입'이 열을 내면서, 먹으면서, 똥을 싸고 섹스를 하는가? 아마도 김재인/김항은 토악질=똥으로 오랄섹스=섹스라는 비유적 등식화를 여기서 추가적으로 요구하게 될 듯하다(정신분석학이 모든 게 '그것=입'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오랄섹스에 대해 근심하는 학문인가?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으로 부르며 안심한다? 나는 어떤 정신분석가들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은유/비유를 혐오한다(이것들은 은유가 아니다!). 고로 똥은 똥이고 섹스는 섹스다.

 

김항의 인용/번역문에서 바로 제시돼 있듯이, "도처에서 이것(Ça)은 여러 기계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유방이나 입은 이 기계들 가운데 하나이다. 상식적으로 읽을 때, 들뢰즈/가타리는 이 (욕망하는)기계들을 통칭해서 그것(독어로 Es/ 불어로 le Ça/ 영어로 Id)이라고 정신분석학이 명명한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계들의 복수성을 일반화하고 단수화하는 것이기 때문에(반복하지만, '기계들'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더불어 그것은 '입'이라는 단일한 기계가 아니라, '기계들'이다). 물론 이어지는 대목에서 보듯이,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 어느 것(=기능)이 될지 불확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이 '기계들'의 대용어나 통칭어가 될 수는 없다.

 

김재인은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맨처음 '그것'은 입이 아니다. 김항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신분석학에서 입을 무의식(=그것)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두 유능한 연구자의 입에서 왜 이런 '독특한' 주장이 반복되는 것인지 다시금 궁금하고 신기하다...

 

여기까지가 2005년에 쓴 것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역자의 견해가 그간에 변함이 없는지 알고 싶었지만 책에는 따로 역자의 주석이 붙어 있지 않다.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가이드북' 형식의 책을 따로 펴낼 예정이라 한다. 그래서 좀더 기다려봐야겠지만, 여전히 같은 견해라면, 나로선 또 계속 궁금하고 신기할 듯하다(프로이트가 '그것'을 '이드'라고 부름으로써 '욕망 기계들'을 부당하게 축소했다는 게 내가 이해하는 들뢰즈의 입장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가 적은 소회는 이렇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강의도 진행했고 논문들도 썼지만, 옮긴이 자신도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는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다만 외국에서 간행된 저술들과 논문들 그리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접한 강연과 대화를 통해, 아직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 시점에서 세계적으로 충분히 이해된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확인은 특별한 자신감으로 다가왔으며, 번역 작업을 이쯤에서 마쳐도 되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 언제까지 혼자서만 읽는 텍스트로 놔둘 수는 없으며,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이가 공유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요컨대 역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어판 <안티 오이디푸스>는 '자신 없음'과 '특별한 자신감'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그에 상응하여, 한국어로 읽을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이번에는 분명 읽을 수 있으리라는 특별한 자신감도 든다. 내년쯤에는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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