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뉴스레터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 칼럼을 옮겨놓는다. 마크 바우어라인의 <가장 멍청한 세대>(인물과사상사, 2014)를 읽고 든 염려를 적었다. 재미있게 쓰인 책은 아니지만 스크린적 사고방식과 수평적 소통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디지털 문화의 문제점을 다룬 몇몇 책들과 같이 읽어볼 만하다.

 

  

 

독서인(14년 12월호) 디지털 시대와 가장 멍청한 세대

 

가장 멍청한 세대?! 디지털 세대에 대한 도발적인 명명에 공감과 반감이 교차할 수 있겠다. 그런 논란을 충분히 예상했겠지만 미국 한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독서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한 마크 바우어라인이 총대를 멨다. <가장 멍청한 세대>(인물과사상사)는 부제대로 ‘디지털은 어떻게 미래를 위태롭게 만드는가’에 대한 예증과 통렬한 비판으로 채워진 책이다. 영문학자보다는 사회학자에 가까울 정도로 저자는 온갖 조사 결과와 통계, 그리고 인터뷰 등을 토대로 미래 세대, 곧 현재의 청소년과 청년 세대의 무지에 대해 진단하고 근심한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휴먼 스테인>의 작가 필립 로스의 말을 빌린 ‘가장 멍청한 세대’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문화가 미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저자의 고민은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 젊은 세대의 지적 현황에 대한 다양한 조사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대부분의 청소년이 정보 시민으로서 필요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역사와 공민학(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윤리교육)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단절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독서나 박물관 방문 경험이 없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고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는 추세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며, 세계지도에서 이집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찾지 못한다. 일부 과목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과거보다 지적 수준이 떨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 점은 현재의 교육환경을 고려하면 매우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다.


미국을 기준으로, 현재의 청소년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대학진학률이 급증하여 2005년 기준으로 성인의 27.6퍼센트가 학사 이상의 자격을 취득했다(우리의 경우는 몇 배 더 높은 수치를 보여줄 것이다). 문화기관의 여건도 좋아졌다. 미국 전역에 12만 개에 가까운 도서관이 있다. 청소년들의 금전적 여력도 과거 어느 때보다 크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학교 진학이 당연하게 여겨지며 손쉽게 오락에 접할 수 있다. 분명 부모 세대보다 훨씬 많은 교육 기회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주어졌지만 그 결과가 ‘가장 멍청한 세대’라고 하면 이는 분명 패러독스이다.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아이팟과 휴대 기기를 사용할 줄 알며 자원봉사도 하고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중산층 10대가 여전히 소비에트 연방이 어디인지도 모른다고 하면 말이다.


그렇다고 한 세대 전체의 지능이 갑작스레 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무엇인가. “배움을 위한 모든 도구와 기회가 준비되어 있지만, 젊은이는 그것을 배움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시간과 기회의 낭비야 어느 세대에게나 있는 일이지만, “인류 역사상 물질적 조건과 지적 성취 사이에 이토록 깊은 골을 만든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토록 많은 기술 향상을 겪고도 이토록 보잘것없는 정신 발전을 이룬 이들도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저자는 디지털 세대의 생활습관에 주의를 돌린다. 학교 교육의 기회가 늘어나고 지적 환경이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무지하다면 가정과 여가 생활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독서와 사회적 관심을 차단하는 인터넷 세대의 패거리 문화다. 글을 읽을 줄 알지만, 독서는 하지 않는 의사 문맹이 예전에는 수치였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당연한 자랑거리다. 책을 읽는 것보다는 최신 유행의 동영상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꿰고 있는 것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훨씬 더 유리하다. 우리들 기억에도 한 세대 전에는 청소년 드라마에서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가 읊조려지곤 했지만, 지금이라면 뭔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여겨질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중고등학생들에게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에 대해 말하면서 톨스토이만큼 유명한 작가라고 소개했다가 순진무구한 표정과 대면했던 일이 떠오른다. 작품을 읽기는커녕 작가의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것이었다.


물론 미국이나 한국 학생들 다수가 기록적인 베스트셀러 <해리 포터>는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그 경우에도 아이들이 <해리 포터>를 읽는 이유는 다른 아이가 읽기 때문이다. 또래와의 유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목적이 독서에서도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미국 청소년의 경우 독서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책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일상에 소설, 시, 희곡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10대와 20대 청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신에 정보통신 이해력이 새로운 미덕으로 간주된다. 우리도 그렇지만 이미 청소년들에겐 미디어 접속시간이 독서시간을 압도하고 있다. 스크린이 대세이고 ‘스크린적 사고방식’이 표준이 돼가고 있다. 10시간에 걸쳐 300쪽 짜리 소설을 천천히 읽느니 20개의 웹사이트에서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라고 장려한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독서문화와 교육 수준에 도달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시각적 문화는 추상적 공간 감각과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켜주었지만 다른 지능을 구축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분명 인터넷 웹에는 많은 자료와 정보가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이메일이나 인스턴트 메시지를 좋아하고 또래의 관심사에만 집중할 뿐이다. 웹은 수평적 소통은 강화시켜주었지만 지식의 전수와 교육에 필요한 수직적 소통은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그저 비슷하게 이야기하고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행동하는 또래 친구들과의 사교에만 몰입한다. 단테와 밀턴을 읽기는 따분하고 프랑스혁명사나 러시아혁명사는 읽을 시간이 없는 세대가 ‘가장 멍청한 세대’로 전락하는 건 필연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세대가 우리의 미래이며, 이들에게 민주주의의 존폐가 달려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의 독서와 교육 방식에 대해서, 문화와 전통의 의미에 대해서 심각한 숙고와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1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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