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부터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벤야민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모스크바 통신>에 그런 내용들이 좀 들어가 있다). 또 자주 얘기하다 보니 남들에게는 어느새 유사-전문가처럼 비치기도 하는 모양이다(물론 나는 벤야민에 관한 유사-전문가적 ‘에세이’이라면 웬만큼은 쓸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자면, “벤야민의 매력 앞에서는 자석처럼 끌리거나 몸서리치며 거부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니 벤야민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독자가 벤야민이란 이름을 자주 들먹이며 벤야민 읽기에 나서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현상’에 가깝다. 마치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비록 몸서리치며 거부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르기로 작정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벤야민 읽기가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벤야민에 대한 짤막한 글을 한편 쓰기 위한 필요 때문에 최근에 몇 권의 벤야민 책을 뒤적거렸는바(“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참조), 물론 재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나로선 곤욕이었다. 이유는 물론 다소간 부적절하고 무성의해 보이는 번역들 때문. ‘벤야민’이란 원(原)텍스트 자체도 난해하다고 하지만, 거기에 ‘우리식 번역’의 불가해성까지 겹쳐지게 되면 웬만한 지력(知力)으로는 감을 잡거나 읽어내기 힘든 수준이 된다. 남들 수준의 웬만한 지력만을 소유한 나로선 당연히 버벅댈 일인 것이고. 해서, 그런 하소연을 담게 될 이 편지는 유감스럽지만 ‘즐거운 편지’가 아니라 ‘괴로운 편지’가 될 것이다.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에서 벤야민 읽기의 길잡이로 내가 제시한 텍스트들은 아도르노의 <발터 벤야민의 초상>과 아렌트의 <발터 벤야민>, 그리고 숄렘의 <한 우정의 역사>인데, 이 중 아도르노의 텍스트는 (물론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깊이 있으면서도 상당히 난해하다(아렌트와 숄렘의 텍스트는 상대적으로 읽기 편하다).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역본을 참조하여 반나절 이상을 꼬박 투자해야 했다. 아도르노 전공자의 번역인 만큼 아도르노의 난해성은 십분 전달하고 있는 번역인데, 그런 만큼 좀더 읽기/이해하기 편한 번역은 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대로 읽기 편하게 고쳐 읽으려면 상당한 견적이 나오는지라 여기서는 그냥 한 대목만 지적하기로 한다.


국역본 <프리즘>의 276쪽. “이러한 강령은 그의 미완성 대표작에 대한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영원한 것은 아무튼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에 달린 한 조각의 레이스다.’” ‘미완성 대표작’이라는 건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인용문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아케이드 프로젝트> ‘안에 들어 있는’ 벤야민의 메모/노트이다. 일부러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한 대목을 꼽았는데, 이런 식으로 조금씩 틀어지는 대목들이 국역본에는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가령, 288쪽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듯이 먼지나 플러시천 같은 최소한의 객체 혹은 초라한 객체들을 편애하는 그의 태도는 관습적 개념망의 그물코 사이로 빠져달아나는 것들, 혹은 지배정신이 너무도 도외시 하여 성그한 판단 이외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모든 것들에 매료되는 기술과 상호보완적이다.” 흔히 ‘대상(들)’로 번역될 단어가 왜 ‘객체(들)’로 옮겨졌는지는 의문이다(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객체들’? 물론 ‘사소한 대상들’을 뜻할 것이다. 283쪽에서는 ‘사물화(reification)’을 ‘대상화’로 옮겨놓았는데,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이지 않다. 프루스트에게서의 ‘비의지적 기억(involuntary memory)’을 ‘본의 아닌 기억’(289쪽)으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역시나 불가능하지 않지만 촌스럽다. 가뜩이나 복잡해서 각도가 잘 나오는 아도르노의 문장들을 독해하는 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갠세이’해서야 되겠는가?(해서 아도르노의 텍스트는 따로 브리핑을 필요로 한다.)

 

 

 

 

아도르노에 비하면 <맑스주의의 향연>의 저자 마샬 버먼은 아주 친절하며, 번역 또한 깔끔하다(‘맑스주의의 모험(Adventures in Marxism)’이란 원제가 ‘맑스주의의 향연’으로 바뀐 것은 이해할 만한 조처이다. ‘모험’이란 표현이 혹시나 反맑스주의적 함의를 전달하지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모험’을 감수하지 않은 것이 바람직한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벤야민을 다루고 있는 12장에서 서평대상으로 삼고 있는 3권의 책 가운데 두 권은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지만(한 권은 하버드대학에서 새로 나온 선집의 1권이다) 신뢰할 만한 저자 버먼은 능숙한 솜씨로 벤야민에 관한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가령, 벤야민의 ‘유별난’ 파리(프랑스) 애호증에 대해서 버먼은 (벤야민 자신은 소원한 관계로 간주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본다. “벤야민의 인자한 아버지는 파리에 산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 집에서도 늘 파리에서 사는 것처럼 지냈다. 그 결과 벤야민은 별다른 노력 없이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에 통달했다.”(335쪽) 그리하여 “하이네 이후 프랑스 문화 속에서 이처럼 철저하게 편안함을 느낀 독일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개인사적 맥락 외에 버먼은 독일과 프랑스 간의 역사적 맥락 또한 짚어준다. “프랑스 계몽운동 이후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적어도 두 세기 동안, 파리는 조상 대대로 독일의 다른 한 쪽이었다.” 마지막은 구절은 “Paris has been Germany's ancestral Other.”를 옮긴 것인데, “파리는 조상 대대로 독일의 타자였다.” 정도가 낫겠다. 여기서 ‘타자(Other)’란 쉽게 말하면 “나에게 없는 걸 갖고 있는 놈”을 뜻한다: “독일인들은 언제나 파리를 자기들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두 가지의 주요한 근원으로 여겨왔는데, 섹스와 유행이 그것이다.”(336쪽) 여기서 ‘섹스와 유행’은 ‘Sex and Style’을 옮긴 것이다(하긴 독일은 자동차는 잘 만들지만, 우리 생각에도 포르노나 란제리와는 인연이 없어 보인다).


해서 “수많은 독일 고유의 정치학(독일 사상에서 창조적이며 풍성한 것, 그리고 망상적이며 위험한 것)은 섹시하고 멋들어진 친구 바로 옆집에 사는 고상한 얼간이라는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불쾌감에서 생겨난다.”(참고로, 이와 유사한 지적은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이사야 벌린도 반복하는데, 벌린은 역사적 낭만주의의 발상지가 독일이며 그 뿌리는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열등감이라고 주장한다.)


거기서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오면, 자, “자신을 독일 토박이 얼간이로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독일인답지 않은 멋쟁이로 인정받는 벤야민이라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이 독일인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따르려 했다고 생각한 독일 문화와 왜 조화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벤야민은 독일 문화를 독일인보다 더 잘 아는 유태인이며, 또한 ‘계몽의 도시’(=파리)에 훌륭하게 적응하고 자기 집처럼 너무 편하게 지낸 멋쟁이라고 미움을 샀다.”(336쪽) 자주 언급되는 벤야민의 양가성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비록 눈이 휘둥그래지는 파리에서는 촌뜨기/얼간이였지만, 베를린에서는 멋쟁이로 통할 수 있었던 것.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걸어다니는 모순덩어리(a walking contradiction)’였다.


버만이 벤야민의 전기에서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 가장 절친했던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프리츠 하인레의 자살과 그에 대한 벤야민의 (찬양적) 태도이다. 이것을 그는 1940년의 자살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벤야민은 이전에도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건 자살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벤야민과 루카치를 비교해볼 수 있다는 버만의 제안이다: “벤야민과 루카치를 비교해볼 만한 한 가지 방법은 둘 다 젊은 시절에 자살을 모면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한 사람이 죽었을 때 몹시 좌절했다. 하지만 루카치는 자신이 늘 자책했던 첫사랑의 자살을 조금도 현명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반면 벤야민은 가장 친한 친구의 자살을 언제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것으로 본다.”(349쪽 각주1) 이러한 지적은 매우 시사적인데, 나는 그런 관점에서 루카치와 벤야민을 비교하는 글을 구상중이다(더 잘 쓸 수 있을 버만이 아직 쓰지 않았다면).

 


이런 유익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향연>의 번역은 별로 흠잡을 구석이 없다(다른 번역들이 이 정도만 되더라도 ‘읽을 만한’ 세상이다!). 옥의 티라면 ‘문학 상식’이 약간 부족한 것. “도대체 어떻게 벤야민이, 그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들의 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체스판의 기사 이상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341쪽) 원문은 “How could Benjamin have thought that these people would see him as any more than K. trying to break into their Castle?”(246쪽) 여기서 암시적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은 카프카의 소설 <성>이고, K는 그 소설의 주인공 건축기사이다. 역자는 아마도 K를 Knight(기사)의 약자 정도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break into'는 ‘무너뜨리다’가 아니라 ‘침입하다’란 뜻이다.


‘문학 상식’ 운운하는 것은 내가 읽은 다른 장들에서도 그런 류의 오역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기병대>의 러시아 작가 ‘이삭 바벨(Isaac Babel)’을 ‘아이작 바벨’로 옮긴 것도 그렇고, 루카치를 다룬 장에서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 ‘라주미힌(Razumikhin)’을 ‘라주미킨’으로(각주에서는 한술 더 떠서 두 번이나 ‘라추미킨’으로) 옮긴 것도 사소하지만(?), 인명(人名) 경시의 사례들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정도면 ‘괴로움’을 말할 수 없다. 애초에 내가 ‘괴로움’이란 표현으로 염두에 둔 책은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이다. 전공자가 옮긴 데다가 외견상 아주 얌전해 보이는 책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이 번역의 ‘무지함’이라기보다는 ‘무성의함’인데, 그 ‘무성의함’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것인지 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시간상/분량상 다른 자리를 마련하겠다...

 

05.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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