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배송받은 연간물은 <2014 한국출판연감>(대한출판문화협회, 2014)이다. 이런 연간물까지 받은 건 출판계 개관 파트에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인문사회' 편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막상 포스팅하려고 보니 아직 올 연감은 알라딘에 입고가 되지 않은 모양이고, 2013년 연감만 뜬다. 정가 120,000원이나 하는 책을 일반 독자가 구매해서 읽을 일은 없을 것 같기에 지난해 실었던 글을 옮겨놓는다. 2012년에 출간된 인문사회 도서에 대한 간략한 (그리고 어느 정도 주관적인) 개관이다.

2013 한국출판연감: 인문사회
전반적인 출판시장의 침체가 계속됐던 2012년에도 인문사회 출판의 대세는 ‘힐링’이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악한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그 뒤를 이어서 법륜 스님의 <스님의 주례사>, <엄마수업>, <방황해도 괜찮아> 등과 김난도 교수의 후속작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이 사회적 분위기를 집약해준다. 연말 대선에 발맞춰 정치 관련서가 부쩍 많이 출간됐던 것도 2012년의 주된 출판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몇 권의 화제작과 이슈를 지표로 삼아서 2012년 인문사회 출판의 흐름을 짚어보기로 한다.



2012년 봄에 출간돼 뜻밖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다. 그보다 먼저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처음 소개된 저자는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으로 박사학위와 교수 자격을 취득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독일에서 2010년에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얇은 분량에 비해 만만찮은 철학적 성찰을 담은 책이 국내에서 수만 부나 팔려나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무엇이 어필한 것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제목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피로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피로사회’란 말만큼 리얼하게 다가오는 말도 드물었으리라.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말하는 ‘피로사회’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자기 착취 사회를 가리키는 ‘성과사회’와 그로 인한 ‘우울사회’의 대안이라는 점이다. 그는 탈진의 피로와는 대조되는 무위의 피로, ‘근본적 피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막간의 시간’을 가능케 하는 피로다. 곧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의 착취에서 벗어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다. 우리에게 더 와 닿는 표현으로 하자면 ‘휴식사회’나 ‘안식사회’라고 해야 할까. 자기계발서의 지향과는 정반대의 문제의식을 내장한 <피로사회>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간 것인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피로사회>의 조용한 붐은 2012년의 화젯거리로 모자라지 않는다. <시간의 향기>까지 저자의 책이 연이어 소개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아마도 재일 한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펴낸 도쿄대 교수 강상중과 함께 국내 독자에게는 가장 친숙한 재외 인문학자로 꼽히게 될 성싶다.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직시하도록 돕는 것은 인문사회 도서의 기본 덕목이다. 2008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세계경제의 위기 국면은 현재의 지배적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요청하는데, 2012년에도 그러한 요청에 부응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다. 국내서로는 서민경제 전문가를 자처하는 선대인의 <문제는 경제다>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경제의 현실을 진단하고 부제대로 ‘버리고, 바꾸고,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짚어본 책이다. 제윤경‧이헌욱의 <약탈적 금융사회>도 가계 부채 1000조, 하우스 푸어 150만 가구 시대가 어떻게 도래하게 됐는지를 살피면서 그 책임을 추궁한다. 요지는 저소득층은 물론 중산층까지 금융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 원인이 자기 이익만을 챙기고 책임은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약탈적 금융 시스템’에 있으며 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번역서 가운데서는 마우리치오 마자라토의 <부채 인간>이 ‘부채’가 단순히 개인의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문제라는 사실을 밝힌 책이다. 오늘날에는 국가기관마저 금융기관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신자유주의는 부채의 억압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파괴한 일상적 삶의 체험기로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은 미국의 사회비평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3부작’이다. 2011년의 화제작 <긍정의 배신>을 통해서 저자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강력한 신념 체계로서 긍정주의는 신랄하게 공박한 바 있다. 2012년에도 ‘워킹푸어 생존기’ <노동의 배신>와 ‘화이트칼라 구직기’ <희망의 배신>이 연이어 출간돼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원제와는 다르지만 번역본의 제목에는 모두 ‘배신’이란 말이 붙어서 ‘배신 3부작’이라고 불리게 됐다. <노동의 배신>은 저자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저임금 노동의 실상을 몸소 겪고 쓴 일종의 ‘체험 삶의 현장’으로서 저임금 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중산층 화이트칼라의 구직난을 다룬 <희망의 배신>에서 저자는 기업체 임원급으로 취업하려고 수개월간 유료 코칭도 받고 네트워킹 행사에도 참여하고 이미지 카운슬링도 받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기술과 노동을 파는 블루칼라 노동자와는 ‘자기 자신’까지 팔아야 한다는 사실은 화이트칼라의 노동현실을 잘 집약해준다. 요컨대 일자리의 안정성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희생되고 있는 것이 그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의 필연적 귀결이 저자가 ‘중산층 대참사’라고 부른 중산층의 몰락이다. 이것이 비단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라는 데 ‘배신 3부작’이 갖는 실감이 있다. 그것은 현직 사회부 기자가 대한민국 청춘들의 꿈과 좌절, 희망과 절망의 이야기를 취재해서 묶어낸 임지선의 <현시창>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실감은 자연스레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과 그 대안의 모색으로 이어진다. 조이스 애플비의 <가차 없는 자본주의>와 E. K. 헌트의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 크리스 하먼의 <좀비 자본주의>,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이라는 수수께끼> 등이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면, 하워드 진과 앨런 마스의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왜 사회주의인가>와 세바스티안 둘리엔 등의 <자본주의 고쳐쓰기>,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등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개선하고 변혁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끄는 철학자는 2012년 6월에 방한 강연을 갖기도 했던 슬라보예 지젝이다. 인디고 연구소에서 슬로베니아의 지젝 자택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과 방한 강연을 묶은 <임박한 파국>, 그리고 아랍의 봄에서부터 월가 시위까지 2011년의 위험한 꿈들에 대한 분석으로서 <멈춰라, 생각하라> 등이 2012년에 나온 지젝의 책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지젝은 먼저 ‘임박한 파국’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현재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중국, 북유럽 등 성공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국가 기능이 망가져 있는 콩고와 같은 나라도 포함한다. 자본주의의 대표적 성공사례인 애플만 하더라도 아이패드의 위탁제조업체 폭스콘의 공장은 중국에 있다.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말미암아 중국 노동자들을 연쇄 자살로 내몬 기업이다. 이런 폭스콘이 새로운 성공신화를 쓴 애플의 이면이다. 중요한 것은 폭스콘 없는 애플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그러한 어두운 이면과 배제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이러한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매뉴얼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멈춰라, 생각하라’는 주문을 던지는 지젝은 오늘날 좌파의 임무는 답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2년에는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대선이 있었고, 연말에는 우리도 대선을 치렀다. 결과적으론 박근혜·문재인 양자 대결이 됐지만 선거의 가장 큰 변수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였다. 대선에 출마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만큼, 대담 형식을 통해서 청년실업과 비정규적, 언론사 파업 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안철수의 생각>은 최고의 화제작이 됐다. 이와 더불어 강준만의 <안철수의 힘>도 멘토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안철수의 가능성을 짚은 책으로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한국사회의 민감한 이슈로 쌍용자동차 이야기를 다룬 공지영의 르포르타주 <의자놀이>도 무거운 주제를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표절 문제를 둘러싼 다소의 논란과 함께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됐고, ‘나꼼수’의 멤버 주진우의 <주기자: 주진우의 시사활극> 역시 이슈 도서로서 열띤 반응을 얻었다. 2012년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지표가 될 만한 책들이다.



독자들의 꾸준한 지지를 얻고 있는 인문 저자들의 활약도 2012년의 수확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7>(제주도편)은 최대 베스트셀러 시리즈 저자의 명성을 이어갔고, 스캔들, 학벌, 중산층문화 등 다양한 사회적 현상을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욕망에 대한 개인적 고백을 시도한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는 인문 에세이의 범위를 넓혀주었다. <인문 고전 강의>의 후속편으로 펴낸 강유원의 <역사 고전 강의>와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으로 김수영 시인을 다룬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는 각자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여일하게 밀고나간 책이다.



국외 저자로 시야를 돌리면, <허삼관 매혈기>의 작가 위화가 10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와 책과 혁명에 관한 일본의 젊은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의 강연록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열혈 인문독자들의 지지를 얻은 책으로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연말에 출간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 인문적 사유의 힘을 보여준 2012년의 책이었다.
14.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