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뉴스레터 '독서인'의 독서카페 칼럼을 옮겨놓는다 프랭크 도너휴의 <최후의 교수들>(일월서각, 2014)를 읽고 적었는데, 우리의 대학과 인문학 현실에 대해서는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소스타인 베블런의 <미국의 고등교육>(길, 2014)은 마침 올해 번역되었기에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독서인(14년 11월호) 최후의 교수들과 인문학의 미래 

 

대학의 인문학 전공자들의 취업문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한다. ‘인문학 위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대학사회에서 터져 나온 것이 지난 2006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위기는 해결되기보다는 만성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상시적 위기 상황이라면 위기라는 말은 더 이상 의미를 갖기 어렵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인문학은 태생적으로 언제나 위기와 함께였다는 성찰도 제기된다. 한 번도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고 하면, 새삼스레 위기를 되뇌는 건 호들갑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위기, 더 나아가 대학의 위기가 여전히 문제적인 상황이라고 생각된다면 일독해볼 만한 책이 프랭크 도너휴의 <최후의 교수들>(일월서각)이다. 미국 대학의 기업화와 인문학의 위기를 다룬 책이지만 한국 대학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목들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최후의 교수들’이란 제목부터가 저자가 느끼는 대학의 위기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대학의 교수직이라면, 적어도 종신재직권을 보장받은 정교수라면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는 전적인 자율성을 보장받는 특권층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에 따르면 미국에서 그러한 교수 상이 확립된 건 고작 80여 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보다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인데, 문제는 그러한 교수들이 이제 더 이상 불필요한 방향으로 대학이 변모해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미국 대학의 역사와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도록 한다.


먼저 저자는 미국 대학의 위기를 기업과 대학의 불화 관계의 산물로 정리한다. 미국에서 기업과 대학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사회를 특징짓는 두 조직체였다. 그 배경에는 두 조직체의 급속한 성장이 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대학과 국가 경제가 유례없는 성장을 기록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수치로 살펴보면,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미국의 국부는 879억 달러에서 1,654억 달러로 늘어났고 1920년에는 3,354억 달러를 기록했다. 10년 단위로 곱절씩 증가한 셈이다. 고등교육의 성장도 괄목할 만한데, 18세에서 24세까지 연령층의 대학 재학률이 1900년에는 2.3퍼센트였으나 1930년에는 7.2퍼센트로 증가했고, 교수진의 수도 1900년 2만 3,868명에서 1930년 8만 2,386명으로 늘어났다. 기업과 대학이 모두 사회의 근간으로 성장하면서 서로를 의식하게 된 건 자연스런 귀결이다.


먼저 불만을 터뜨린 쪽은 기업가들이었다.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앤드루 카네기가 대표적인데, 대학의 전통적인 인문 교양교육에 대해서 그는 그런 교육이 “다른 행성에서나 써먹을 교육”이라고 조롱하면서, 그와 대비하여 산업현장에서 즉각 써먹을 수 있는 실제적인 교육을 치켜세웠다. 셰익스피어와 호머의 ‘죽은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속기와 타자를 배워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시카고의 사업가로 승강기 제조업체 크레인주식회사의 창업자 리처드 텔러 크레인은 한술 더 떠서 대학이란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존재라고 일축했다. 그 역시 “문학, 예술, 언어, 역사 등 비실용적이고 특수한 지식”을 버리는 대신에 쓸모있는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문학에 취미가 있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행복할 역량이 있는 사람은 유용성을 갖춘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난 100년간의 대학의 역사가 이러한 기업가들의 대학에 대한 적대적인 생각이 차츰 대학에 침투해온 역사라는 점이다. 대학은 그에 맞설 수 있었을까.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기업식 이윤추구와 조직운영이 대학에 끼친 파괴적인 결과를 의식하고 집필한 <미국의 고등교육>을 통해서 대학을 옹호하고자 했다. 그는 먼저 배움이란 금전적 목적이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활동으로 규정하고 고등교육의 가치는 통계로 표현될 수 없으며 그것을 제대로 음미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대학의 경영진과 이사회는 기업식 회계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대학을 마치 기업과 같은 관리와 평가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베블런이 보기에 기업과 대학은 추구하는 가치와 그 문화가 전혀 다르며, 특히 기업분야의 핵심인 경쟁은 고등교육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대학이 기업과 마찬가지로 실용성과 유용성만을 숭배하게 되면, 대학의 교육은 “임금 경쟁 속에 고용되어 최대 상업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숙련 노동의 한 종류”로 전락할 것이다.


베블런과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진보적 지식인이자 작가인 업튼 싱클레어는 미국 대학이 부자와 권력자의 지배 도구로 봉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아주 노골적으로 대학과 기업의 결탁에 대해서 비판하는데, 가령 컬럼비아 대학은 J. P. 모건 대학이고, 미네소타 대학은 오어 트러스트 대학이며, 시카고 대학은 스탠더드 오일 대학이라는 식이다. J. P. 모건이나 오어 트러스트, 스탠더드 오일은 모두 미국의 대기업들이다. 싱클레어에 따르면 미국의 기업 권력가들은 경제적 이윤 추구라는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침투하여 많은 전횡을 낳았다. 대학의 이사회가 총장의 배후에서 기업의 이익 논리를 관철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비단 미국 대학에만 국한된 건 아닐 것이다. 베블런과 싱클레어는 대학 총장과 기업친화적 이사회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적하고 ‘대학 관료체제’의 폐지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이것은 누가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란 문제를 낳는다.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는 제안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적 여론이 대학의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미국의 대중들이 돈이 최고라는 인식을 받아들이고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의 척도는 생산성이라는 기업의 논리를 수용하는 한, 고등교육의 가치도 ‘투자비용 대 편익’이라는 틀로만 평가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경우 자유교양과 인문학이 설 자리가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다. 남은 가능성은 싱클레어의 제안대로 교수들의 실질적인 행동이다. “교수들이여, 노조를 만들어 파업을 벌이시오.”라는 게 그의 제안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교수들 자신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규정하길 꺼려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미국의 경우 의류와 철도 노동자의 조직율이 90퍼센트가 넘는 반면에 교수들의 조직률은 2, 3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는 단지 성향만의 문제도 아닌데, 미국 고등교육의 이상은 “배움을 통해서 자신을 형성하고 개조한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이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교수는 “미국식 개인능력주의의 가장 철저하고 전형적인 담지자”이다. 교수 노조의 결성은 그러한 이상과 배치되는 만큼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상황으로는 대학의 기업화와 영리형 대학의 득세에 인문학과 교수사회가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비록 결론은 낙관적이지 않지만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인식만은 명확히 하는 게 좋겠다. 해법을 마련하기 전까지 당장은 그게 최선으로 보인다.

 

1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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