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 칼럼을 옮겨놓는다. 레나타 살레츨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를 골라서 읽고 적은 독후감이다.
독서인(14년 10월) 선택의 독재와 진정한 선택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도서출판b)이란 책으로 처음 소개된 레나타 살레츨은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동시에 라캉주의 정신분석가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엮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의 공저자로서 히치콕 영화에 대한 빼어난 독해를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지적 동료로서 지젝과 같이 편집한 책이 몇 권 더 소개되었지만 단행본으로 치자면 최근에 번역돼 나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가 국내에 소개된 저자의 두 번째 책이다. 간단한 이력을 이렇게 나열한 것은 살레츨의 책을 흥미롭게 읽어온 터라 더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젝이 독보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지만 통칭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로 불리는 그의 동료들, 곧 살레츨을 비롯하여 믈라덴 돌라르, 알렌카 주판치치, 미란 보조비치 등은 모두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릴 만한 새로운 철학적 통찰과 이론적 분석을 내놓고 있다.
원제가 <선택의 독재>인 이번 책의 메시지는 제목 그대로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무엇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인가? 살레츨에 따르면 선택은 후기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란 말의 원래적 의미를 따르면, 이데올로기란 우리의 삶이 구성되는 방식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다. 선택, 곧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관념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음으로써 자본주의의 지배를 영속화한다. 그렇다면 선택의 이데올로기성을 폭로하는 것은 자연스레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물론 반론이 가능하다. 선택이란 행위는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하고 자유는 다른 무엇보다 긍정적인 가치인데, 무슨 문제인가라는 반론이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보다 무엇이건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훨씬 더 나은 사회가 아니냐는 반문도 뒤따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듯 자연스러우면서 자명해 보이도록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효과이고 기능이다. 가령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한 마거릿 대처의 유명한 선언을 예로 들어 보자. 대처는 사회는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남녀, 그리고 가족”뿐이라고 말했다. 사회라는 게 허울이고 허상이라면, ‘사회적 문제’라는 말은 어불성설이고 ‘사회적 고통’도 부정확한 표현이 된다. 대신에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것이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효과다. 이렇게 되면 “사회의 부정의에 대한 투쟁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가난에 대한 수치와 경제적 성공의 사다리에서 더 높이 올라가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자리잡는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사회의 계급적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은 은폐된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모두가 선택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데 있어서 평등하지 못한 사회적 조건을 보지 못하게 한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또 다른 관념으로서 ‘합리적 선택’ 또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실제 사람들의 선택은 합리성과는 별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는 라캉주의 정신분석가로서 저자가 장기를 발휘하는데, 그가 보기에 어떤 선택은 합리적 숙고보다는 그 사람의 더 깊은 심리적 구조를 반영한다. 무슨 말인가. 예컨대 히스테리증자나 강박증자, 그리고 정신병 환자는 그 심리적 구조에 따라 각기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히스테리 여성은 으레 자신의 선택 결과에 실망한다. 항상 ‘이게 아니야!’라고 느끼며 또 다른 물건을 고르지만 불만족은 해소되지 않는다. 선택한 물건의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다. 히스테리의 전형적 증상일 따름이다. 남성 강박증자라면 어떨까. 그는 어떤 선택에든 주저하며 꾸물거릴 것이다. 그는 자기가 욕망하는 대상이 자신을 집어삼키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대상에 대한 접근을 가급적 회피한다. 항상 누군가에게 억압당하고 조종 받는다고 생각하는 정신병 환자에게는 선택의 상황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그는 항상 누군가의 선택을 대리한다고 느낀다. 이러한 예시들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생각만큼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시적 소비만 하더라도 그렇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의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 고가의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비합리적 선택의 전형적인 사례다.
선택의 실상이 이러함에도 선택이 찬양된다면 그것은 합리적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비단 자본주의 사회만이 그런 건 아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권리와 계급 없는 사회라는 이상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찬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한갓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과거 동유럽에서 인민이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 투쟁할 때 당 기관원들은 권력이 이미 인민에게 있기 때문에 정권과 싸워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인민주권이라는 허울이 현실의 모순에 대한 직시와 투쟁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살레츨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선택이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선택은 주로 소비와 관련한 선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더 중요한 선택의 가능성을 은폐한다. 하지만 우리가 시야를 더 확장하자면, 더 근본적인 선택은 사회구조에 대한 선택이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그 권리는 자본주의를 거부할 권리도 포함하는 게 온당하다. 과연 그러한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는가. 선택의 독재를 수용할지, 아니면 거부할지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저자 살레츨이 우리에게 묻는다.
철학자 지젝은 유사 선택의 사례로 설탕봉지를 예로 든 적이 있다. 커피에 프림과 함께 넣는 설탕이 같은 종류임에도 흰 봉지와 노란 봉지에 따로 담겨져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다고 해보자. 흰 설탕이냐, 노란 선택이냐는 선택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차피 질적인 차이가 없는 선택이기에 그것은 진정한 선택에 값할 수 없다. 유사 선택이다. 간판은 다르게 달고 있지만 기본적인 정치적 입장과 정책 면에서 별로 차이가 없는 정당들 사이에서 유권자가 선택해야 한다면 그 또한 유사 선택을 면하기 어렵다. 진정한 선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다시 긋는 행위다. 가능한 것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라고 치부되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끌어안는 행위다. 주어진 것 안에서만 고르라는 선택의 독재를 넘어서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진정한 선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4.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