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덜 깬 상태라 커피 한잔 마시면서 정신차리기용 페이퍼를 적는다. 어젯밤에 이리저리 검색해본 러시아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에 대해 적으려고 한다. 발단은 앤드류 마의 <세계의 역사>(은행나무, 2014).
일단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앤드루 마에 대해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정치평론가로 소개되는데, 중요한 커리어는 영국 BBC의 역사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동했다는 점. '현대 영국의 역사'와 엘리자베스 2세의 치세를 다룬 '다이아몬드 퀸' 시리즈를 다큐로 만들고 책으로 펴내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세계의 역사>는 그의 또다른 역작으로 소논문과 학술지를 제외하고도 약 2000여 권의 책을 읽고 방대한 세계사를 요령 있게 갈무리했다. 'BBC 세계사'로 부름직한 책.
번역까지 돼 반가운데, 알고 보니 이 시리즈가 KBS2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다고 한다. DVD 타이틀로도 나와 있으니 세계사 이해의 훌륭한 보조자료가 될 듯싶다(한때 세계를 경영해본 나라의 시점에서 본 세계사다). 나도 덩달아 원서까지 구입해서 틈틈이 읽어보는 중인데, 서문의 끄트머리에서 저자가 20세기 러시아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 <삶과 운명>을 인용하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인간은 자신이 건설한 도시들이 자연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걸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늑대와 눈보라로부터 문화를 지키려고 한다면, 문화가 잡초로 뒤덮이는 걸 막으려고 한다면, 인간은 당장이라도 빗자루와 삽과 소총을 멀리 떼어 놓아야만 한다. 인간이 잠든다면, 1-2년 동안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늑대들이 숲에서 뛰쳐나오고 엉겅퀴가 사방에 퍼지며, 모든 것이 먼지와 눈에 뒤덮인다. 과거의 위대한 도시들이 어떻게 먼지와 눈과 개밀에 굴복했는지 생각해 보면 충분하리라.(22쪽)
인용한 김에 지적하자면 "인간은 당장이라도 빗자루와 삽과 소총을 멀리 떼어 놓아야만 한다"고 한 건 오역이다. "he(=Man) must keep his broom, spade and rifle always at hand."를 옮긴 것인데, 짐작엔 역자가 'always'를 'away'로 잘못 본 성싶다. "인간은 빗자루와 삽과 소총을 항상 손에 들고 있어야 한다."로 옮길 수 있다. 앤드루 마는 인용에 이어서 "아마추어 역사학자였던 그로스만이 남긴 위의 말은 이 책을 쓰는 동안 내내 내 귓가에 맴돌았다"고 적었다. 그런 태도로 세계사를 써나간 저자라면 신뢰할 만하다.
그렇다면 바실리 그로스만은 누구인가. 나도 언젠가 이름만 한번 들어본 작가인데,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오랫동안 당국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삶과 운명>은 '금지된한 걸작'이라고 해야겠다). KGB의 후신인 러시아 보안당국(FSB)의 1960년에 탈고됐던 그의 소설 원고를 해금한 것이 불과 지난 해의 일이다. 작년 7월 연합뉴스의 기사 일부다.
러시아 보안 당국이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걸작소설 원고를 비밀기록보관소에서 50여 년 만에 꺼내 25일(현지시간) 공개했다. 바실리 그로스만의 서사 소설 <삶과 운명>은 1960년 탈고한 뒤 압수돼 1980년대 말까지 당시 소련에서 출판을 금지했지만 이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되는 명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원고를 압수당하고 출판이 금지됐지만(작가는 1964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로스만의 친구 한 명이 원고 복사본을 한 부 갖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1980년에 스위스에서 러시아판이 출간됐다고 한다. 불어판과 영어판도 뒤이어 출간됐고. 하지만 실제 원고가 공개되고 연구자들의 검토와 비평 작업을 거치게 되면 보다 완전한 판본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FSB가 해금한 문서는 소설 원고 원본, 타자본, 교정 복사본과 저자의 노트 등을 포함해 1만 페이지 분량이다. 스탈린 치하의 숙청과 2차대전 중 소비에트 압제 상황 등을 거침없이 묘사한 이 소설은 당시 당국에는 비호감 대상 자체였다. 소설 저작에 그로스만은 10년 걸렸지만 1961년 KGB는 원고와 타자본 등을 압수해갔다. 그로스만 친구가 소지한 복사본 덕분에 1980년 스위스에서 러시아판 소설이 출판되고 곧이어 불어 번역본도 나왔다. 1988년 소련에서 축약판이 처음 출간되고 공산주의 몰락 이후 평판이 높아졌으며 작년 러시아 국영 TV에서 시리즈물로 방영한 뒤 더욱 인기를 끌었다.
기사에서 '작년'은 2012년을 가리킨다. 찾아보니 7시간 50분 분량의 TV 시리즈로 제작됐었다(http://www.youtube.com/watch?v=ptmF8-jtIXk). 독소전쟁 초기인 1942-43년 스탈린그라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이다. 이런 소설의 집필이 가능했던 건 그로스만이 종군기자로 직접 참전하여 모든 걸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영어판으로는 <전장의 작가>라는 제목으로 그 기록도 출간돼 있다. 저명한 전사가인 앤터니(안토니) 비버가 격찬한 책이다.
비버의 책은 <스페인 내전>(교양인, 2009), <디데이>(글항아리, 2011),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다른세상, 2012) 등이 번역돼 있는데(번역의 문제점이 많이 지적된 <디데이>는 재출간된다고 한다. 재번역까지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로스만의 증언과 소설은 <스탈린그라드> 집필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을 성싶다.
지나가는 김에 언급하자면 2차 대전에 관한 막강한 저작을 펴낸 비버는 지난해에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을 발표했다. <1945년의 베를린>, <해방된 파리> 등과 함께 밀리터리 독자뿐 아니라 역사교양서 독자들을 위해서도 소개됨직하다.
여하튼 다시 돌아가면, 바실리 그로스만 대작 <삶과 운명>도 소개되면 좋겠다. <삶과 운명> 외에 영어판으로 더 나와 있는 책들은 <만물은 유전한다>, <길>, <아르메니아 노트> 등이다...
14. 09.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