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편을 먹으며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맘먹고 시인들만 골랐으니 '이주의 시인'이다. 주로 고전 소설들에 대한 강의를 하다 보니 시를 읽을 기회가 뜸해졌는데, 연휴는 잠깐이라도 시간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시집 읽기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기에.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고르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세 시인의 연배가 모두 50대다. 이른바 중견들. 이재무, 김경미 시인과는 구면이고 윤희상 시인과는 초면.

 

 

먼저 이재무 시인의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 2014)가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초기 시집인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문학과지성사, 1995)로 기억하고 있으니 꽤 오래 전이다. 2012년에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수상 시인 시선집으로 <길위의 식사>(문학사상사, 2012)가 나와 있다.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는 1983년에 등단하여 30년 넘게 시를 써온 시인의 열번째 시집. 여전히 평이하면서도 미더운 시세계를 보여주는 듯싶다.

"아내는 비정규직인 나의/밥을 잘 챙겨주지 않는다/아들이 군에 입대한 후로는 더욱 그렇다/이런 날 나는 물그릇에 밥을 말아먹는다/흰 대접 속 희멀쑥한 얼굴이 떠 있다/나는 나를 떠먹는다/질통처럼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없어진 얼굴로 현관을 나선다/발 벌러 간다"('나는 나를 떠먹는다')   

 

이어서 <밤의 입국 심사>(문학과지성사, 2014)를 펴낸 김경미 시인. 내가 기억하는 건 첫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실천문학사, 1989)이니까 꽤 오래 전이다.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창비, 1995)와 <쉿,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6)까지는 시집의 제목을 기억하지만 <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2008)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2000년대 중반부터 시집을 챙겨 읽지 않은 모양이다. 1983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했지만 한 손가락에 꼽을 만한 시집을 펴냈으니 과작인 편.

"내가 있는 곳은 내가 있기에 혹은 내가 있어서/항상 적당치 않다/어젯밤에는 괴팍한 사람의 글을 읽었다/그 사람처럼 괴팍하지 못한 게 부끄러워/밤 내내 뒤척였지만/(중략) 오늘도 목이 부러진다"('오늘의 괴팍' 중)

"내가 있는 곳은 내가 있기에 혹은 내가 있어서/항상 적당치 않다"고 토로하는 '괴팍한' 시인이라면 여전히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윤희상 시인. 세번째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문학동네, 2014)이 출간됐다. 1989년에 등단했으니 올해가 25년차. 첫 시집 <고인들과 함께 놀았다>(문학동네, 2000)를 제목만 기억하기에 시로는 초면이지만, 지난 인터뷰 기사를 보니 여러 학회에서 만난 인연이 있는 분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해설에서 "우리시대에 읽기 쉬운 언어로 가장 많은 비밀을 끌어안고 있는 시집"이라고 평했는데, 시인의 가족사를 알려주는 시 '일본 여자가 사는 집'부터가 그렇다.

내가 동네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을 때

동네 밖에서 찾아온 낯선 사람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일본 여자가 사는 집이 어디냐고

아이들은 저기 기와집이라고 말했다

일본 여자는 우리 동네에서 사는 무면허 안과 의사였다

그렇다고 돌팔이 의사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멀리까지 소문난 일본 여자는 본래 간호사였다

일본 여자는 동네에서 태어나는 아기들을 받았다

돈은 받지 않았다

일본 여자는 조선 남자를 사랑했다

일본 여자가 사는 집은 우리집이고

일본 여자는 나의 엄마였다

괴팍하지는 않지만 담담하면서 속이 깊은 언어들을 부리는 시인이다. 이만한 시집들이면, 한가위 음식을 좀 덜 먹어도 되겠다...

 

14.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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