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마감 때문에 애를 먹으면서 적은 글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서두에 대한 소감이다. 본문 인용은 열린책들판과 민음사판을 혼용했다.

 

 

한겨레(14. 07. 14)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살아남기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영문학의 대표적 성장소설이다. 주인공 ‘핍’의 이름부터가 유아명이다. 성이 피립이고 이름은 필립이므로 정식 이름은 ‘필립 피립’이어야 하지만, 유아기에 혀 짧은 소리로 둘 다 ‘핍’이라고밖에는 발음하지 못해서 그냥 핍이라고 불린다. 성장소설의 주인공이 대개 그렇듯이 핍의 성장환경도 불우하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누나와 대장장이 매형 집에서 자라는데, 자상한 매형과는 달리 누나는 손찌검을 일삼는다.

 

소설은 일곱 살짜리 핍이 교회 묘지의 가족무덤 앞에 서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부모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 핍은 묘지에 새겨진 글자 모양에 따라 그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아버지는 단단한 체구에 피부가 거무스름한 곱슬머리이고, 어머니는 얼굴에 주근깨가 있고 병약했을 거라는 식이다. 묘지에는 다섯 개의 묘비가 더 세워져 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난 핍의 다섯 형제다. ‘다섯 어린 형제들’(five little brothers)이 번역본에는 ‘어린 다섯 동생들’(열린책들)과 ‘다섯 남동생들’(민음사) ‘동생 다섯’(동서문화사) 등으로 옮겨졌다.

 

 

영어의 ‘브러더’는 형과 동생을 모두 가리키지만 우리말로 옮길 때는 형이나 동생으로 특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핍의 실제 가족관계를 고려해본다면 그의 다섯 형제는 ‘동생들’이 아니라 ‘형들’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 다섯의 이름이 알렉산더, 바돌로매, 아브라함, 토비아스, 그리고 로저라고 명기된 걸로 보아 이들은 출생 후 얼마간 생존했음에 틀림없다. 만약 이들이 핍의 동생들이라면 그의 부모는 장녀를 낳고서 이십 년도 더 지나 장남 핍을 낳고, 다시 연이어 다섯 아들을 낳고서 세상을 떠난 게 된다. 현실성이 별로 없는 일이다.

 

핍의 가계를 현실성 있게 재구성해보자면, 누나와 나이 차이가 스무 살 이상 나므로 핍은 늦둥이 아들일 것이다. 그에겐 다섯 명의 형이 있었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핍이 부모에 대한 기억을 전혀 안 갖고 있는 걸로 보아 핍의 부모도 핍이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핍을 누나 부부가 부모를 대신해서 마지못해 키워왔다. 이것이 대략 핍의 일곱 살 인생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고달픈 처지의 핍이 아마도 자기 나이가 되기도 전에 일찍 죽은 ‘어린 형들’에 대해 “인류의 저 보편적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노력을 대단히 일찍 포기해 버린” 이들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태어나서 미처 양손을 주머니에서 빼지도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과 달리 핍은 사나운 생존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나가게 될 것이다. 겁이 없어서도 아니고 대단한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살아남고자 애를 써서다.

 

 

세상은 얼마나 험난한가. 가족의 무덤 앞에서 핍이 잠시 두려운 마음에 젖어 훌쩍거리려는 순간 험악한 탈옥수가 나타나 무서운 목소리로 윽박지른다. “이놈, 찍소리 말고 가만있어! 안 그러면 모가질 잘라 버릴 테다!” 그러자 핍은 벌벌 떨면서 애원한다. “오, 아저씨! 제발 제 목을 자르지 마세요.” <위대한 유산>이 오랫동안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면, 그 비밀은 공포에 떨면서도 살아남고자 애쓰는 핍의 모습에서 많은 독자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14. 0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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