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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대하여 ㅣ 동문선 문예신서 255
J.힐리스 밀러 지음, 최은주 옮김 / 동문선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를 대출해왔다. 저자의 지명도를 봐서는 그냥 사서 읽어도 좋겠지만(힐리스 밀러는 폴 드 만, 해롤드 불름, 제프리 하트만과 함께 예일 '마피아'의 4인방을 구성했던 비평가이자 자크 데리다의 절친한 친구이다. 데리다가 폴 드만 보다도 더 오래 교우한) 출판사가 또 워낙에 못믿을 출판사인지라 (애꿎은)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놓았던 것이다(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동문선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악명이 높다고 한다. 인세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서. 아마도 동문선은 단일 출판사로는 프랑스어 저작에 대한 판권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진 출판사일 것이다).
대출해 오면서 나는 루틀리지에서 나온 원서도 절반쯤 복사를 했다. 원서(2002)는 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가 동문선에서 '행동하는 지성' 시리즈로 몇 권 나와 있다. <믿음에 대하여>, <종교에 대하여>, <영화에 대하여>, <인터넷상에서> 같은 책들이 같은 시리즈이다(<인터넷에 대하여On the Internet> 대신에 제목이 <인터넷상에서>가 된 것은 출판사나 역자나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책을 내는 건지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가 읽어본 한도 내에서 이 시리즈는 허무하다(<종교에 대하여>와 <인터넷상에서>는 다 읽지 않았지만).
지젝의 <믿음의 대하여>에 대해서는 이미 리뷰도 쓴바 있지만, <영화에 대하여>만 하더라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제목도 모르는 역자가 옮겨놓았다(역자는 영화제목 <2001>을 순수하게 연도로 옮겨놓았다). 물론 이런 류의 '문화의 오역'은 무지의 소치로 떠넘길 수 있다. 문제는 말 그대로 '문장의 오역'이다. 가령 <문학에 대하여>에서 '문학'(literature)'에 대한 옥스포드영어사전(OED)의 (세번째) 정의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대목.
"대체로 문학 산출은 이렇다; 글쓰기의 전신은 특별한 국가나 시기 혹은 대체로 전 세계에서 나왔다. 이제 훨씬 더 엄격한 점에서 글쓰기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형식미나 감정적 효과에 기반에서 고려될 것이 요구된다."(14쪽)
이게 '문학'의 정의란다. 영문학 박사라는 역자가 어떻게 영어 사전의 정의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지 정말로 미스테리하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이런 걸 한국어라고 옮겨놓은 역자에게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하나? 이런 걸 읽으면서 진도가 빠지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나는 몇 쪽 읽다가 책을 덮었다). 이게 얼마나 '저질스런' 번역인지는 원문과 대조해보면 알 수 있다:
"Literary production as a whole; the body of writings produced in a particular country or period, or in the world in general. Now also in a more restricted sense, applied to writing which has claim to consideration on the grounds of beauty of form or emotional effect."(p.2)
역자는 'as a whole'이 뭔지도 'body'가 이 문맥에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restricted sense'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역자는 '의미'란 뜻의 'sense'를 여기서는 '(어떤) 점'이라고 옮겼는데, 다른 곳에서는 전부 '감각'이라고 옮겼다. 가령, '현대적 의미의 문학'을 '현대적 감각의 문학'이라고 옮기는 식이다. 역자의 그 '감각'을 좀 살리느라고 독자들은 애꿎게도 전혀 '의미없는' 문장들을 읽게 되었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문학적 생산(창작) 일반. 특정한 시대나 지역에서, 혹은 세계 전역에서 산출된 글들의 총체. 현재는 보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형식적 아름다움이나 정서적 효과를 고려하여 씌어진 글들을 가리킴."(약간 의역했다.)
대개의 동문선 번역서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역자 후기가 '당당히' 들어가 있는데, 한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문학비평가로서 제네바학파와, 후에 예일학파의 해체주의자들과 함께 이론을 펼쳐나갔던 밀러는 시적 언어와 수사에 관심을 두면서 '이해'한다는 정의에 대한 모든 인식력 있는 주장들을 해체하여, 세계를 반복하는 단어를 이해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독자는 의미의 미궁을 밝히려 하지만, 그 미궁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로부터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 실제로는 텍스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175-6쪽)
이 대목은 번역서 전체의 '증상'으로도 읽힌다. 놀랍게도 전체가 한 문장인데, 내가 보기엔 이것도 역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말을 옮겨온 말이다(그게 아니라면 '인식력 있는'이란 엉터리 표현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여간에 독자는 이 번역서에서 '의미의 미궁'을 밝혀보려고 하지만, 그 때마다 '다른 어떤 것', 즉 말도 안되는, 무책임하고 황당한 번역어들이 튀어나와서 텍스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음을 지켜보게 된다.(그러니 역자가 '게을러지는 순간마다 용기를 주셨던' 이들을 어찌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종말의식'에 동참하게 된다(이런 번역서는 언제 종말을 맞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 새로운 매체가 인쇄된 책을 점진적으로 대체하듯이 문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이다."(14쪽)
이 또한 "Literature in that sense is now coming to an end, as new media gradually replace the printed book."(p. 2)의 번역인데, 여기서 'as'는 '-하듯이'가 아니라 '하게 됨에 따라'란 뜻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in that sense'가 번역에서 누락됐다. 저자 밀러는 근대 이후에 발생한 문학에 대한 정의를 소개한 이후에 바로 '그런 의미의 문학'이 현재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 이후에 이어지는 번역문들은 ('뜰'은 커녕) 내리 '잡초밭'이다. 이윤기 선생의 바람처럼 나도 번역자들에게는 되도록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은 삼가하고 싶지만, 이런 경우들에서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이런 엉터리 번역서를 낸 데 대하여 저자에게 사죄할 일이며, 이런 쓰레기 같은 번역서를 내는 데 동원된 종이들과 잉크들에게 부끄러워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