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에 교보에 들렀다가 처음 본 책인데, 러시아의 대표적 아나키스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격문이 번역돼 나왔다. <청년에게 고함>(낮은산, 2014). 그의 자서전과 상호부조론이 번역돼 나온 바 있는데(자서전은 절판됐다), 이 격문은 1880년에 불어로 발표됐다 한다. 그래서 부제가 '130여 년 전 한 아나키스트의 외침'. 번역은 홍세화 선생이 맡았다.

 

“그동안 쌓아 올린 지성이나 능력과 학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신음하는 사람들을 도울 날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덕으로 타락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꿈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꿈을 실현하려 무엇을 할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토해 내는 크로포트킨의 울분을, 그 호소를 쉽게 뒤로할 수 있는 청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옮긴 홍세화는 “크로포트킨이 살았던 격동의 시대나 이 책을 일역본으로 읽으면서 젊은 정신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을 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젊은이에게 이 문건이 도대체 무슨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서 홍세화 선생은 <청년에게 고함>과 함께 자서전 <한 혁명가의 회상>을 권한다.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이라고 출간됐다가 <한 혁명가의 회상>으로 한번 더 나왔는데, 현재는 절판된 상태에서 아쉽다(<크로포트킨 자서전>으로 다시 나왔다). "19세기 유럽 노동 운동사는 물론이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러시아 역사까지도 모두 담은 일종의 체험적 역사서". 덧붙여서 최근에 다시 나온 미셸 라공의 <패자의 기억>(책세상, 2014)도 보태고 있는데, 20세기 세계사의 벽화를 그리고 있다는 소설이다. "알프레드 바르텔르미라는 프랑스인 아나키스트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려 19세기 말부터 1968년 5월혁명에 이르는 격동의 ‘역사’와 그 현장의 한복판을 누볐던 ‘인간’ 군상,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았던 ‘이념’을 엮어 실제와 허구가 넘나드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직조해냈다." 아래가 홍세화 선생의 추천사이다.  

첫 부분부터 빠져든 게 정겨운 파리의 정경 때문이었다면, 손에서 놓기 어려웠던 건 파국과 절멸 상태에 이른 한국 진보 세력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듯싶다. 아나키스트 주인공은 러시아혁명과 스페인내전을 거쳐 68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아 자신과 동료의 패배를 증언한다. 마지막 장을 넘긴 뒤 길게 남은 여운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과 사회를 위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장악한다지만, 만약 그 권력이 총구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과 사회를 배반하도록 예정된 게 아닐까? 강제력의 자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의 자발적 연대를 꿈꾼 아나키즘은 어쩌면 현 단계에서는 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책은 ‘패자들에 대한 기억을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소수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많은 독자가 이 소수의 특권을 누리기 바란다.

14. 06. 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