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발견'으로 하세가와 히로시의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교유서가, 2014)를 고른다. 제목이 일러주듯 책은 저자가 고른 '철학의 명저' 열다섯 권에 대한 해설을 담았다. 아니 딱히 분야가 '철학'에 한정된 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나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그리고 보들레르의 <악의 꽃> 등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인문고전' 정도라고 해야 할까.
저자는 일본에서 헤겔 주요 저작의 재번역으로 명성을 얻은 학자이고 국내에도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도서출판b, 2013)이 먼저 소개된 바 있다(일본의 헤겔학 수준에 대해서는 <헤겔 사전>(도서출판b, 2009)을 통해서 어림해볼 수 있다).
그렇게 마음대로 스무 권 정도의 책을 골라서(실제로 저자가 고른 건 열다섯 권) 자유롭게 써보는 일이라면 나도 어떤 목록을 고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게 되는데, 서문을 읽으며 좀 부럽게 느껴진 대목이 있다. 하세가와는 이렇게 적었다.
처음으로 잡은 것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다. <방법서설>은 오치아이 다로 역, 노다 마타오 역, 오바세 다쿠조 역, 다나기와 다카코 역 등 몇 종의 일본어역이 있다. 어느 번역본이 좋을까. 나 또한 헤겔을 번역하느라 꽤나 고생했던 터라, 번역본을 적당히 고를 수는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대로 다 구해서 눈앞에 늘어놓고, 몇 번이나 비교하면서 읽은 뒤, 모호한 일본어 표현이 적고 문장에 리듬이 있는 노다 마타오 역을 골랐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에서 다룬 15권의 작품 가운데 <기독교의 본질> <색채에 관하여> <눈과 정신>을 제외한 열두 작품은 여러 종의 일본어역이 있다. 도서관에 가서 가능한 한 많은 역서를 들춰보고, 일본어 표현이 알기 쉽고 문장에 격조가 있는 것을 선정기준으로 삼아 텍스트를 선정했다.
그러니까 이 책의 묘미는 (번역상으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선정 과정'에 있다. 우리는 어느 만큼 그 선정 과정의 즐거움과 (즐거운) 고충을 느껴볼 수 있을까.
좀 비관적인 기분이 들긴 했지만, 막상 찾아보니 상황이 아주 나쁜 건 아니다. 가령 하세가와는 '인간'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알랭의 <행복론>,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세 권을 글거리로 삼았는데, 모두 한국어로도 복수의 번역본이 있다. <행복론>의 경우에는 비교해봄직한 번역본이 대여섯 종이고, <리어왕>은 물론 그보다 훨씬 많다. <방법서설>은 좀 아쉬운 편이지만, 서너 종 가량의 번역본을 참고할 수 있다.
또 '아름다움'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하세가와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 비트겐슈타인의 <색채에 관하여>, 메를로퐁티의 <눈과 정신>을 골랐는데, <악의 꽃>의 경우 서너 종의 번역본이라면 좀 빈곤한 편이다. <색채에 관하여>는 과문하여 접해본 적이 없고(한국어판 비트겐슈타인 선집에도 빠진 것 아닌가?), <눈과 정신>은 <눈과 마음>(마음산책, 2008)으로 번역됐었지만 절판된 상태.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당연하게도 눈앞에 책이, 많은 경우엔 번역본이 있어야 한다. 어떤 책, 어떤 번역본으로 읽어야 할지 고심할 권리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더 훌륭한 번역본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독자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는 출판계의 탄식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바람일까...
14. 05.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