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과 두번째 작품 <분신>을 같이 묶어서 다뤘다. 강의차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초기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외투>와 <광인일기>, <코> 등의 고골에서 도스토예프스키로의 이행 과정이 주된 관심 주제다). 본격적인 도스토예프스키론도 시간을 두고 준비할 계획이다.

 

 

 

한겨레(14. 03. 24) 파멸을 미루려는 하급관리의 분투

 

가난한 하급관리를 주인공으로 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소설들을 다시 읽었다. 1846년에 연달아 발표한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과 <분신>이다. 서간체 소설인 <가난한 사람들>에서는 중년의 하급관리 마카르 제부쉬킨이 등장한다. 그는 먼 친척뻘 되는 소녀 바렌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려운 형편에도 차를 마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바렌카, 차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마시는 셈이지요. 체면치레로 품위 유지를 위해서요.”

 

차를 거르게 되면 짓궂은 타인들은 곧장 ‘나’의 가난을 조롱하거나 측은하게 여길 것이다. 그것은 그들과 대등하지 않다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에 예민하다. 그래서 까다롭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의 말에 신경을 쓴다. 양말에 구멍이 나 비어져 나온 발가락이나 다 해진 팔꿈치가 제부쉬킨에겐 마치 처녀성을 드러낸 것처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걸레보다도 못한 존재’였던 제부쉬킨이지만 바렌카와 편지를 교환하면서부터 차츰 자존심과 주체성을 회복한다. 책을 읽음으로써 그는 독서의 주체가 되고, 자신을 주어로 한 편지를 씀으로써 또 글쓰기의 주체가 된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못한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바렌카에게 “저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도 있고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제부쉬킨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바렌카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 많은 지주 비코프와 결혼하기 때문이다. 졸지에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리게 된 제부쉬킨이 작별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편지의 수신자를 잃는 것이다. 단지 문장이 좋아지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에게 편지 쓰기란 자신의 주체성을 입증하고 보존하는 핵심 수단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쓰지 못하게 되면 그는 그 자신을 다시금 잃어버리게 되리라.

 

<분신>의 주인공 골랴드킨 역시 하급관리다. 관료제 사회에서 그의 지위는 9등관이라는 관등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지위와 무관하게 더 나은 존재로 대우받고자 한다. 그는 주치의에게 “저는 제게 아주 특별하며, 제가 생각하는 저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고 토로한다. 그는 남들과 대등한 독자적인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문제는 아무도 그의 독자성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골랴드킨은 과거 자신의 은인이었던 5등관 관리의 고명딸 생일잔치에 초대도 받지 않고 찾아갔다가 봉변만 당하고 쫓겨난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그는 죽임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적 체면이 끝장났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경우 그 충격으로 자살하거나 정신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기 십상이지만, 골랴드킨은 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은 또 다른 골랴드킨, 곧 그의 분신과 조우한다. 골랴드킨의 분신은 처음에는 골랴드킨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곧 표변하여 골랴드킨을 파멸로 몰아넣는 데 일조한다. 결국 이야기는 골랴드킨이 정신병원에 붙들려가는 걸로 마무리된다.

 

얼핏 관료주의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파멸한 하급관리의 불행을 다룬 이야기로 읽히지만, 한편으로 <분신>은 파멸적 상황에서 그 결말을 최대한 유예하고자 애쓴 고투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자기 분열은 때로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유력한 방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4. 03. 23.

 

 

P.S. 국내 소개된 책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가장 고급한 안내서는 미하일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중앙대출판부)다. <도스토예프스키 시학>, <도스토예프스키 창작론> 등의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모두 절판됐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러시아어 원제대로 제목과 표지갈이를 해서 다시 나왔다. 더불어 콘스탄틴 모출스키의 평전 <도스토예프스키>(책세상, 2000)가 가장 높은 수준을 자랑하지만 아쉽게도 절판됐다. 참고로, 영어와 러시아어를 통틀어서 가장 압도적인 평전은 미국의 러시아문학자 조셉 프랭크의 <도스토예프스키>다(5권짜리이며 한권으로 나온 다이제스트판이 959쪽 분량이다. 모출스키의 책이 영어본으로 712쪽 분량). 우리말로도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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