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저자'도 고른다. 이번주는 분류하자면 책이 좀 뜸한 소강 국면에 해당하는데, 이것도 기회인지라 주로 고르곤 했던 인문사회분야에서 눈길을 돌려 시인과 작가를 이주의 저자로 주목해본다.

 

 

먼저, 시인 김남주. 20주기를 맞아 출간된 <김남주 시전집>(창비, 2014)와 <김남주 문학의 세계>(창비, 2014)가 근래에 나왔다. 작년 하반기에는 <김남주 시선>(지만지, 2013)도 나왔었다. 80년대에 <사랑의 무기>(창비, 1989)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94년에 세상을 떠나고 벌써 20주기라고 하니까 세월무상이다. 하지만 이름 세 자가 박힌 책이 어엿하게 출간됐으니 인간은 그 무상한 세월을 이겨내기도 한다. 이번 시전집의 의의에 대해선 이렇게 소개된다.

변혁운동의 뜨거운 상징으로서 한국시사에 우뚝한 자취를 남긴 김남주 시인(1945~94)의 20주기를 맞아 그의 시 전편을 망라한 <김남주 시전집>이 출간되었다. 1974년 <창작과비평>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한 이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10년 가까운 투옥생활을 겪고 1994년 49세의 이른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시인이자 전사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김남주 시인이 남긴 총 518편의 시를 집대성한 이 전집은 그의 시세계를 문학사적으로 온당하게 자리매김하고 그의 시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한 기초로서 뜻 깊은 성과이다. <김남주 시전집>은 특히 여러 시집에 중복 수록되면서 개제·개고된 경우가 많은 그의 시를 전 시집에 걸쳐 면밀히 검토해 시 텍스트를 확정하고 작품의 개제(改題) 내역을 상세히 밝혔을 뿐 아니라, 각 시의 집필 시기와 제재 등을 고려해 시의 순서를 세심하게 새로 배열함으로써 김남주 시의 전체상을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정본(定本)으로 완성되었다

 

김남주 시인과는 별로 관계가 없을 듯싶지만, 돌림자로 연상되기도 하는 젊은 시인 김경주의 네번째 시집이 나왔다. <고래와 수증기>(문학과지성사, 2014). 소개에 따르면, "흐르는 시간을 '다르게' 떠돌고자 하는 예술적 의지와 욕망은 여전하지만, 여태의 그가 시적 발명가나 실험가에 가까웠다면, 이번 시집 <고래와 수증기>는 김경주가 지닌 기질에 구도자적 특성을 몇 스푼 더 끼얹은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초기의 산문시에 비해 형식적으로 간결해진 51편의 시들에서, 내놓인 언어만큼이나 표현되지 않은 여백과 행간 역시 읽어내길 유도한다."

 

그렇게 여백과 행간을 정치하게 읽어내는 건 내 몫이 아니고, 얼핏 받는 인상은 시가 상당히 순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없는 계절'이라는 호언의 세계와 사뭇 달라 보인다. 그가 더 편하게 다가올 독자도 있겠고, 뭔가 김이 빠져나간 듯 느껴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시집이 한권 더 나온다면, 나름 궤적을 그려볼 수 있으리라.

 

 

일본문학의 거장 오에 겐자부로도 이주의 저자로 고른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 <말의 정의>(뮤진트리, 2014)가 출간돼서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문학과지성사, 2012)나 <회복하는 인간>(고즈윈, 2009) 등과 같이 묶일 수 있는 책이다.

시대의 위기에 대해, 평생 동안 수련해온 소설의 언어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는 노벨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비평적 에세이.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의 아버지이자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일본 문화와 사회에 대해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담담하게 써 내려간 수필집이다. 그동안 읽은 책, 만난 사람, 여행간 곳, 해온 일, 그리고 가족(특히 뇌에 장애를 가진 아들) 이야기가 주로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소설가로서의 여러 소회와 '새로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란 제목의 시리즈 글이 인상적이다.

 

 

오에의 소설은 별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하반기에 강의할 기회가 있어서 올여름에 모아놓은 책들을 한꺼번에 읽어볼 예정이다(그의 전집을 구해놓지 않은 게 아쉽긴 하다). 최근작인 <말의 정의>에서부터 거꾸로 읽어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14. 03. 15.

 

P.S. <말의 정의>를 읽다가 발견한 오류도 적어둔다. 이탈리아 작가 체사레 파베세에 대해 언급하면서(덕분에 파베세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와 비교한 대목이다. 

 

다자이 오사무(1909-1948) 탄생 백년 때 저에게도 작가의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왔습니다. 저는 전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단한 일을 하여 명성을 얻은 다자이 오사무가 마흔여덟 살, 파베세가 쉰 살에 한 자살을 비교하여, 태어난 해도 비슷한 두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읽어보면 어떻겠는가 하는 답을 했습니다.

생몰연대까지 병기해놓고 다자이 오사무가 마흔 여덟에 자살했다고 한 건 희한한 실수다(다자이는 서른 아홉에 자살했다. 우리 나이로 마흔에). '48년'에 죽은 걸 '마흔여덟 살'이라고 옮긴 것. 체사레 파베세(1908-1950)도 마찬가지다. '쉰 살'에 죽은 게 아니라 '50년'에 죽었다. 편집자가 너무 무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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